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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ra May 15. 2020

산너머 일곱개의 언덕을 넘으면

백설공주를 사랑한 한 아이 이야기

찔레꽃이 피는 계절이다. 햇살이 살짝 따가워지고 바람은 살랑이고 하늘이 예뻐지는 지금. 아~~~ 찔레꽃이 피는 계절이구나.


늘 다니던 길에 피어 있는 찔레꽃


찔레꽃 먹어본 사람?

유치원도 다니기 전 어릴 적 시골에 산 적이 있다. 물론 지금 사는 곳과 멀지 않은 곳인데 작은 도시인 여기도 시골이라면 시골이지만 기억 속 그곳은 정말 시골이다. 털털털 다니는 버스가 지나가면 먼지가 뽀얗게 일고 그 앞 작은 가게 한 편엔 비치볼처럼 생긴 눈깔사탕이랑 스페아민트 껌, 그리고 30원짜리 깐돌이가 있었다. 그 가게는 신기한 세계처럼 언제나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그런 동네에서 2학년까지 살았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 전성기, 행복한 시절이었다. 남부러울 것 없이 제일 순수한 시절... 엄마는 그 시절이 제일 힘들었다고 하시는데 내 기억 속에는 제일 신나고 제일 재미있고 언제든 집에 뛰어가면 엄마가 있어 좋았다.




그 동네 뒤에는 산이 있었다. 지금 보면 작은 동산일 텐데 그 당시 나에겐 높~~~은 산이었다. 친구들과 종종 그 산에 올라가 놀았는데 봄에는 할미꽃도 보고 진달래도 보고 여름엔 산속 작은 냇가 옆에 피는 찔레꽃을 보며 찔레 순을 따 먹곤 했다. 어떤 맛이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친구들과 엄청 맛있게 먹었다. 그 작은 냇가 옆에는 무당 할머니가 사는 당집이 있었는데 갈 때마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데도 무서워서 살금살금 걸었던 기억이 있다. 뭐라고 하거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는지 무당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전혀 나지 않는다. 그 집 툇마루에서 찔레가 피는 냇가가 잘 보였을 것이다. 그 툇마루에 꼭 한 번 앉아보고 싶었지만 너무도 무서워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일곱 언덕 너머 살고 있을 일곱 난쟁이와 백설공주

그 언덕 꼭대기에 서면 그 뒤로 높은 산이 보였다. 진짜 높은 산이었는데 그 산을 넘고 또 넘어 일곱 개의 산봉우리를 넘으면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왜? 그러게... 동화 결말은 백설공주는 왕자님을 만나 일곱 난쟁이와는 헤어져 성으로 떠나는데 말이다. 그런데도 그 산 꼭대기에 서면 발꿈치를 끝까지 높이 들고 눈에 보이는 산을 세고 세며 백설공주가 난쟁이들과 사는 산은 어디쯤일까 헤아리곤 했다.


그 당시 백설공주에 푹 빠져있는 아이였다. 반에서 제일 작았고 생일도 늦고 세상을 모르고 엄청 울보였는데 신기하게 책을 좋아했다. 무엇보다 백설공주 책을 제일 좋아했다. 집에 책이 많지는 않았고 그림책 같은 것은 당연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감사하게도 글이 엄청 많고 그림이 거의 없는 두꺼운  명작 동화 전집이 있었다. 그중에서 백설공주 책을 특히 사랑했다. 어린 나에겐 책 속 세상이 또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다. 읽고 또 읽고 또 읽어서 책이 다 헤지고 뜯어질 때까지 읽었다. 책 표지가 뜯어진 날에는 오래 크게 울어서 엄마한테 혼난 기억도 있다. 책이 높은 선반 위에 있어서 의자를 놓고 책상을 밟고 올라가 책을 꺼내곤 했다.


읽으며 매일 혼자 이런저런 상상을 했다. ‘백설공주를 만났으면.... 난쟁이랑 같이 놀았으면... 아니, 어쩌면 내가 백설공주인데 기억을 잃었을지도 몰라....’라는 말도 안 되는 엉뚱한 상상까지...... 지금 생각하면 터무니 없는 상상인데 진짜 그때는 세상 진지했다. 언덕 꼭대기에 서면 정말 백설공주가 보일지도 모른다고까지 생각했으니 말이다. 가파른 길을 힘들게 올라가서는 발꿈치를 들고 산봉우리를 세는 일상이었다. 아이들은 내가 산봉우리를 세고 있으면 ‘또?’, ‘백설공주는 없어.’라며 다른 놀이를 하거나 냇가로 달려가 버렸다. 혼자여도 백설공주를 상상하는 마음에 즐거웠던 것 같다. ‘치, 너희는 백설공주님이 안 놀아줄걸?’하며 산봉우리를 세고 또 세고..... 그렇게 사랑하는 소중한 시절을 보냈다.




늘 다니던 길을 산책하다가 작고 예쁜 꽃을 발견했는데 ‘무슨 꽃일까, 가시도 있네.’하며 네이버에서 사진을 찍어 검색했다니 ‘찔레꽃’이란다. 이런... 잊고 있었구나. ‘찔.레.꽃’ 이 단어를 읽는데 눈물이 똑 떨어졌다. 언제 나는 이렇게 나이가 들어 버렸을까? 찔레순을 따 먹던, 백설공주를 사랑했던 그 아이는 어디로 가 버렸을까? 잊고 있던 기억 한 자락이 스르르 얼굴을 내밀었다. 그래그래 그럴 때가 있었지. 싱그럽던 초록 잎사귀들 사이 졸졸 흐르는 작은 냇가에 피어있던 가시 달린 찔레꽃. 그 옆에서 산봉우리를 세던 작은 아이......


언제부터 산봉우리를 세지 않게 되었을까? 이사를 온 후부터 였을까? 아니면 이미 그 전부터였을까?

산봉우리를 세지 않게 되었던 그 어느날부터 더 이상 아이가 아니었을까? 아이에서 벗어난 것일까? 다른 아이들처럼 백설공주는 있을 리 없다고 상상을 멈춘 그 날부터 조금씩 조금씩 어른이 되어 갔던 것일까?




찔레꽃이 던져준 기억의 단상들

붙잡고 싶은 날들의 기억들

일곱 개의 봉우리
낡고 닳은 책 한 권
뽀글머리 키작은 울보 아이
소죽 끓이는 냄새
숨이 턱에 차게 뛰어 들어가면 치마에 쓱쓱 손을 닦으며 웃던 젊은 엄마 모습
엄마 품에 얼굴을 묻으면 맡아지던 엄마 냄새


정말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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