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ra May 16. 2020

장미를 가꾸는 곳에 엉겅퀴는 자라지 않는다.

장미와 엉겅퀴 중 어떤 것이 더 옳은가?

긴급 돌봄에 나오는 아이들과 산책을 했다. 교문을 나와 작은 오솔길을 걸었다. 계절이 가고 계절이 오고 있었다. 어느새 맞이 하지 못한 계절이 서서히 떠나고 있었다. 몇 차례 개학이 연기된 그 자리에 봄이 와 있었는데 우리의 봄은 어디에서 숨죽이고 있었을까? 누림을 당하지 못하고 숨죽이던 봄이 한 걸음씩 떠나고 있다. 바람이, 햇살이 여름의 향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여름 빛을 머금어가는 은행나무


몇 차례의 개학 연기, 드디어 5월 20일 개학, 그러나 다시 5월 27일로 개학 연기


비난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는데...... 비난이 스멀스멀 저 깊은 곳에서 나오려 한다.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애기똥풀 무리를 보고 윙윙 날아다니는 벌들도 보고 땅을 기어 다니는 개미도 보았는데 한 아이가 그런다.

"개미야, 넌 참 좋겠다. 마스크 안써도 돼서."

아이의 얼굴을 보니 표정이 진지하다.

"그러게, 개미는 참 좋겠다."

아이가 다시 그런다.

"옛날엔 우리도 마스크 안 썼잖아요. 개미는 좋겠어요. 내가 개미라면 좋겠어요.”

그러게 그랬지..... 말없이 아이를 보았다. 하루 종일 마스크을 써야 하는 유치원이라니. 사회적 거리두기, 그리고 생활 속 거리두기. 아이의 손을 잡아주기도 어려운 이때 아이의 마음이, 그 깊은 곳 마음이 느껴져 내 마음도 찡했다. 언제쯤 마스크 없이 자유롭게 이야기 나누며 우리의 일상을, 오고 가는 계절을 마음껏 느낄 수 있을까? 그런 날이 다시 오기는 할까? 사실 요즘은 마음이 힘들어 그런지 일상으로의 회귀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그런 날들이 오기는 할지 절망적인 느낌이다.


산책길에 보았던 애기똥풀 군락과 민들레 한 송이
아이가 부러워 한 마스크 안 쓴 개미의 집


아이들과 산책하며 꽃, 나무, 돌멩이, 곤충들 사진을 찍었다. 그 무엇 하나 예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 무엇 하나 마스크 따위는 쓰고 있지 않았다. 마스크 쓴 아이들 눈에 그들이 얼마나 부러웠을까, 나도 부러운데 아이들에게는 오죽했을까, 마음이 아렸

다. 벌써 마스크를 쓴 코와 인중에 땀이 송글송글 맞히는 계절인데.


누구의 잘못으로, 어떤 선택으로 우리는 이런 시기를 맞이했을까? 무모한 개발 때문이었을까? 동식물을 고려하지 않은 자연 파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누군가의 욕심이었을까? 그 무엇 때문이라 해도 이 아이들의 잘못으로 비롯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 나이 딱 한 번뿐인 계절을 이렇게 보내는 아이들에게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떤 아이에겐 두렵지만 설레는 첫 유치원 시작이었을 테고 또 어떤 아이에겐 마지막 유치원 생활일텐데..... 어른들의 잘못인 것 같아서, 나 역시 그 어른이어서.




퇴근 후, 딸아이에게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엉겅퀴 꽃을 본 아이가 중얼거렸다.


아가야, 네가 장미를 가꾸는 곳에 엉겅퀴는 자랄 수 없단다.


엉겅퀴, 그 자체로 참 어여쁘기도 하다.


"어? 이건 무슨 말이야?"

"읽던 책에서 나왔어. 비밀의 화원"

그래서 인터넷을 검색해 봤다. 와~~~ 진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 글귀가 나왔다.(물론 출판사마다 번역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무슨 뜻일까,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좋은 생각이 자리 잡은 곳에 옳지 않은 생각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말이란다. '그래그래, 그런 뜻이구나. 옳다, 옳다.'하고 생각하며 엉겅퀴 꽃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엉겅퀴 그 자체도 참 예쁜 거다. 과연 장미만 옳을까, 그렇다면 엉겅퀴가 옳을까...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들어섰다. 어떤 꽃이 더 예쁘다고, 어떤 생각이 옳다고 누가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지금 누군가 옳다고 한 행동이 오랜 시간 후에도 옳은 일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 어떤 선택으로 비롯된 지금 이 사태가, 옳다고 생각된 일에서 비롯되었을까, 아니면 잘못된 선택으로 시작되었을까? 장미에서 시작되었을까, 엉겅퀴에서 시작되었을까?




지켜내기


아이들은 스스로를 지켜내기 어렵다. 아니,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 어른들이 지켜내야 한다. 주변을 지키고 자기 자신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을 지킬 수 있고 이 아이들이 자라 또 다음 아이들을 지켜낼 수 있다.


교실을 지켜야 한다, 나를 지켜야 한다, 내 주변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 내 아이들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 주문처럼 요즘 반복하는 말이다.


개학을 준비하다, 갑자기 개학 연기 발표로, 다시 개학 연기에 따른 지원 계획을 세워야 했다. 그리고 다시 개학을 준비하고 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에 맞추어 그 날 그 날 계획을 수정하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이 것이 맞는지, 저것이 맞는지 고민하는 날들이다. 누구에게나 그러하겠지만 교사로 한 번도 직면한 적 없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고민으로 힘겨울지언정 '지켜내기'를 게을리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잡아 본다. 매일 혼란스러운 요즘, 지금의 이 생각이, 이 행동이 장미인지, 엉겅퀴인지 나도 모르겠지만 보다 세상을 옳게 하는 일인 거라고,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고, 오늘도 나를 지켜내 본다.


아가야, 네가 장미를 가꾸는 곳에 엉겅퀴는 자랄 수 없단다.

-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 [비밀의 화원] 중 -






매거진의 이전글 아직도 꿈이 있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