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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아 moi Nov 27. 2023

반려는 운명

가족구성은 1인 1 묘입니다.


 집 안에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퇴근 후, 나를 기다려 주는 가족이 있는 것과 같다. 1인 가구인 나는 내 의지로 독립해 혼자 살고 있지만, 내 공간이 누군가 혹은 무엇과 함께한다는 채워짐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저 나 혼자만의 공간과 시간이 어느 정도 필요했기에 한 선택이었다.


 나 혼자만의 충분한 시간을 보내고 나면, 이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고요함과 묘하게 바깥 세계와 동떨어진 것 같은 외로움이 올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퇴근 후 당연하게 맡을 수 있던 밥 짓는 냄새, 끓고 있는 찌개 냄새, 툴툴거리는 내 투정을 받아주던 가족에 관한 생각이 나곤 했다. 하지만, 독립 후 좀 더 편안해진 가족과의 관계를 떠올리며, 나는 이곳에서 느끼는 이 기분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대신 편안함과 쓸쓸함이라는 두 가지 감정이 공존하는 이 공간을 다른 무엇인가로 채우기로 했다.


 십 년 전, 오랫동안 키우던 반려견을 보내며, 다시는 반려동물은 키우지 않기로 결심했고, 지금 살고 있는 오피스텔로 이사 왔을 때만 해도 그 결심은 여전히 확고했다. 조금은 마음 편하게 키울 수 있는 화분을 집에 들이기로 결심했다. 화분이 시들어도 나에게 대단한 타격을 주지 않을 것이기에 키우기로 한 것이다.


내 반려 식물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화분에 무심하게 물을 주고, 가끔 바라봐 주었을 뿐이다. 기특하게도 그 화분은 혼자서도 꽃을 피워냈다. 화분 키우기란 이렇게도 쉬운 것이라는 착각은 어리석은 용기로 분갈이를 시도하게 했고, 서툴기만 한 솜씨의 결과물은 제법 신경 썼던 그 화분을 죽였다. 식물의 뿌리부터 썩어 들어간 화분은 살릴 길이 없었다.

 

 언젠가부터 화분 주변으로 작은 벌레들이 들끓었다. 그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그 벌레들로 인해 그 화분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옆에서 잘 자라고 있던 작은 화분까지도 그 벌레에게 점령당해 있었다. 결국 모든 화분을 잃어버렸다. 화분 키우기에 자신감이 붙어, 이제 내 취미는 플랜테리어라고 호기롭게 말하곤 했는데, 화분 키우기를 너무 얕잡아 본 초보자의 오만이었다.


 내 첫 반려 식물로 제법 마음을 준 꽃 화분을 버려야 했고, 꽤 오랜 시간 화분이 자리했던 곳은 텅 비어버렸다. 이상한 허전함이 찾아왔다. 반려라는 말에는 짝이 되는 동무라는 의미가 있어서일까, 화분이 있던 시간보다도 더 오랫동안 비어있던 창가 자리가 더욱 휑하게 느껴졌다.

 비어있는 듯한 그 자리가 싫어 꽃을 사기 시작했다. 마음 쓰지 않아도 이미 화사하게 피어있는 그 꽃이 내 방에 다시 생기를 주었다. 그만큼 시든 꽃은 쉽게 버려졌다. 더 이상 반려 식물이니 화분 키우기니 정성과 마음이 드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는 간편함에 익숙해졌다. 사 왔다가 버리면 그뿐인 꽃은 내 공간이 허전해질 때면, 쉽게 내 공간을 채워주었다. 꽃병에 꽂힌 꽃은 아름다웠지만, 살아있는 느낌은 주지 못했다. 죽어있는 생화는 어느 날부터인가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고, 더 이상 살아있는 존재를 들이지 않았다.



 급격히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또다시 묘한 쓸쓸함도 찾아오기 시작한 어느 날, 너무 작아 귀엽다기보다는 애처로워 보이기만 했던, 어린 힝구를 만났다. 그리고 3개월간 꼬박, 퇴근길이면, 그곳을 지나갔다. 시간이 갈수록 장난기 가득해지는 힝구가 어둑한 퇴근길의 묘한 쓸쓸함을 채워주었다.

 그때도 반려동물에 대한 마음은 확고했고, 곧 이 예쁜 아이는 집사를 만날 수 있을 거로 생각하는 사이, 10월 말 늦가을에서 한겨울이 지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쇼윈도 앞 투명 칸막이에 갇힌 채 힝구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왜 이렇게 해맑은 건지, 자꾸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자 힝구를 데려오면 안 되는 이유를 만들었지만, 3개월이 넘도록 봐왔던 힝구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나는 힝구의 평생을 책임질 수 있는지 자문했고, 내 대답은 기꺼이 그러고 싶다였다. 그렇게 그 작은 고양이는 내 힝구가 되었다.

너무 작았던 아이가 자꾸 신경 쓰였다

 

 사고뭉치 힝구의 똥꼬 발랄함이 때론 감당하기 쉽지 않을 때도 있지만, 이제 힝구가 곁에 없는 순간은 나도 쉽게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힝구가 온 지 10개월, 내 세상이 1인 가구에서 1인 1 묘 가구가 되었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힝구 덕분에 집안에서 온기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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