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적 선긋기
때로는 나와 아직 어떤 서사도 쓰이지 않은 새로운 관계에서 위로받을 때가 있다.
나의 과거도 현재도 알지 못한 채, 어떤 편견이나 감정 없이 그 자체로서 나를 바라봐 주는 낯선 사람이 주는, 묘한 편안함.
몇 년 전, 혼자 떠난 제주도 여행, 유난히도 조용했던 게스트하우스의 밤이었다. 그날따라, 게스트하우스의 손님은 나 이외에 다른 두 사람뿐이었다. 새벽 5시에 한라산에 올라갈 거라던 한 사람과 이제 막 스무 살이 되어 자전거로 혼자 여행을 떠나 온 어린 친구였다. 스태프들과 조용한 파티가 끝나고 아쉬웠던 우리 셋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이야기 주제는 역시 제주도였다. 여행 첫날 한라산에 올라갔다 온 나는 한라산에 대한 정보를 공유해 줬고, 각자 제주도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인생의 온갖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이도 성별도 살아온 환경도 다른 우리가 어느 순간, 서로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런 흘러가는 대화가 편안하고 즐거워 우리의 대화는 새벽 3시가 되도록 이어졌다. 그날 처음 만나, 내일이면 보지 못할 사람들이었지만, 낯선 느낌은 느끼지 못했다. 현실의 삶에서 떠나온 여행지였기에 마음의 여유가 생겼던 걸까, 적어도 같은 여행자라는 공통점 때문일까, 그 어떤 사건으로도 감정으로도 얽혀있지 않아 오직 그 순간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새로운 사람들과의 시간은 신선했고 나 자신이 환기되는 기분이었다.
나를 알지 못하는 장소에서 느낄 수 있는 자유로움처럼, 관계에서도 촘촘하게 나와 내 주변을 채우고 있던 감정과 관계들 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움과 홀가분함을 느끼는 순간, 비로소 온전히 내 감정에 집중할 수 있다. 문득 사람들과의 관계들 속에서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로, 내가 사라지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나와 관계된 사람들에게 물들어 가다 보면 내가 아닌 낯선 누군가가 되어버린다. 그럴 때면, 잠시 관계 속에서 벗어난 거리 두기가 필요해진다. 나를 잃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