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가 살고 있는 섬
짙은 옥색 바다를 건너자, 비양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매일 숙소 창문 너머로,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마다,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할 때면, 마주했던 비양도에 간다. 비양도에서 맞이한 제주 날씨는 내 제주 여행 중 가장 좋았고, 가장 뜨거웠던 날이었다.
한림항(비양도행) 도선 대합실을 찾지 못해, 수출입 선박들과 컨테이너들로 가득한 한림항 안에서 한참을 헤매다 도선 대합실이 외부에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배 시간을 맞추기 위해 부랴부랴 움직였다. 다행히 배 시간에 늦지 않았다.
비양도는 2, 3시간 정도면 섬을 다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섬 규모가 작다는 말에 2시간 정도의 시간 차를 두고 왕복 배표를 구매했다. 승선신고서와 신분증을 제시 후, 원하는 배 시간을 말하자 드디어 비양도에 들어갈 수 있는 승선권이 주어졌다.
천년의 섬 비양도행, 천년호 2층에서 섬으로 향하는 뱃머리를 향해 앉았다. 머리카락이 바닷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렸지만, 습도 없는 시원한 바람이었기에 그마저도 마냥 좋았다. 멍하니 먼바다를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천년호 밑에서 하얀 물거품 일으키며 출렁거리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해안가와는 또 다른 바다 빛깔과 그 투명함에 나온 놀라움이었다.
아주 짙은 옥색 빛, 하지만 그 투명도는 잃지 않은 바다가 보였다. 문득, 고개를 들자, 비양도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림항에서 15분 정도 거리의 비양도는 협재해수욕장에서 바라봤을 때보다도 더 아담했고, 정말 조용했다. 그 섬에서 만난 주민은 카페와 식당에서 만난 사장님들을 제외하고는 오늘 막 따온 뿔소라와 멍게, 성게를 식당 주인에게 전달하기 위해 온 해녀 할머니가 유일했던 것 같다.
둘레길을 걷기 전, 카페에 들러 음료를 한잔 샀다. 보통 주변의 카페나 식당을 이용하면, 자전거를 무료로 대여해 주고 있었다. 내가 들린 카페에서도 자전거를 대여해 주고 있었는데, 1시간이면 충분히 도보로도 둘레길을 다 볼 수 있다는 말에 걷기로 했다. 그런데 목마름보다도 배고픔을 채우는 게 먼저여야 했었다. 카페를 나와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자마자 식당을 발견하고 배고픔을 느꼈고, 이 정도의 허기라면, 걷기 전 식사가 먼저라는 판단에 보말전복죽으로 배를 채웠다.
식당을 나서는데, 자전거를 이용해도 괜찮다며 사장님께서는 음료수 하나를 건네주셨다. 뜨거운 비양도를 걷기 전, 받아 든 음료수 하나에 나는 함박웃음으로 감사를 전했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해안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기암괴석들을 볼 수 있다.
비양도는 제주도의 화산체 중 가장 마지막에 생김 섬인데, *화산체는 마그마가 지표로 분출하는 화구로부터 분출물이 주변에 쌓여 하나의 산 생김새를 이루거나 분출물의 퇴적체가 남은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홀로 바닷바람을 맞으며 해안도로를 걷다 보니, 거대한 바위 하나가 보였다. 처음에는 뒷모습만이 보여, 그것이 코끼리바위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 바위를 따라 오른쪽으로 돌자, 비양도의 코끼리가 나타났다. 비양봉의 분화구 중 하나가 파도에 침식되어 코끼리 모양으로 남았다는데, 해안도로에서 바라본 코끼리는 왠지 다른 바위들과는 떨어져 있어 외로운 코끼리 한 마리가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 같아 보였다.
도로를 계속 따라가다 보면, 비양도에서 코끼리바위와 함께 유명한 호니토가 있다. 호니토는 용암류의 내부 가스가 분출하여 만들어진 작은 화산체로 보통 내부가 빈 굴뚝 모양을 하고 있으면, 비양도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한다. 마치, 애기를 업은 어머니 같다고 하여 '애기 업은 돌'이라고도 부른다. 처음 호니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때는, 거대한 석상이 부서진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소원을 빌기 위해 쌓은 돌탑인가 생각했다. 그 앞에 안내문이 없었다면, 이 생소하고 낯선 암석 덩어리를 보고도 못 알아볼 뻔했다.
비양도만의 지질적 특성이 녹아든 해안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50여 분의 둘레길이 빠르게 끝난다. 비양봉까지 2시간이면 다 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둘레길을 걷기 전 준비가 너무 길었던 걸까. 아쉽게도 비양봉은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짧지만, 강렬했던 해안도로에서 시간만으로도 비양도에서 시간은 아쉽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제주의 바다와 하늘을 보며, 오랜만에 차가 아닌 두 다리로 걸으며, 바람을 즐길 수 있었던 시간이 좋았다. 해안도로를 걷다 보면, 누군가가 쌓아놓은 크고 작은 소원 빌기 돌탑들이 있다. 다음 기회에 비양도를 다시 찾았을 때, 그 속에서 내가 쌓은 작디작은 돌탑을 다시 발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