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부터 에리히 프롬까지 철학자의 전하는 지혜
철학에 입문하기 좋은 책이라고 추천받아서 사두고는 거의 일 년을 책장에만 꽂아두었던 책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문장 메모 리추얼을 하면서 매일 나에게 던질 질문이 많은 것 같아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질문을 찾아 시작한 책은 철학의 관심에 불을 지폈고 에리히 프롬의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라는 책을 만나게 했다.
'무력감'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6장에서는 자신의 무기력을 합리화하는 다양한 사례가 소개된다. 이거 완전 내 이야기인데! 뼈 맞은 느낌과 속을 들켜버린 것 같은 부끄러움, 그리고 '이런 이유 때문이었구나' 하는 놀라움과 깨달음이 반복된다. 그리고 마지막 챕터 '활동적인 삶'에서는 우리가 무력감을 느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매슬로우 욕구 단계에서 보듯 인간은 기본적으로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가 해결되면 사회 속에서 존경받고 나아가 성장하며 자아실현을 하고 영향력을 주고 싶다는 욕망을 갖는다.
뛰어나고 능력 있고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 각자의 방법으로 무언가를 한다. 원하는 바를 위해 노력한다. 분주하게 움직이며 애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근본적인 목적에 대한 이해 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노력하지만 본인이 원했던 결과를 얻지 못한다.)
‘역시 난 틀렸어’하며 무력감을 느낀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며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믿는다.
어떤 계기로 인해 결국은 내가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있으리라는 근거 없는 기적을 기다린다.
자주 아프다. ‘내가 무기력한 이유는 신체적인 문제 때문이야.’
트라우마로 인해 활동성과 용기를 빼앗긴 거라 생각한다.
심한 경우, 망상에 빠져 자신의 상황을 절망적으로 만들고 자신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납득시킨다.
통제하고 지휘하려는 성향이 강한 사람은 자신이 주도할 수 없는 상황을 패배로 느끼며 악순환을 키워가기도 한다.
에리히 프롬의 설명에 따르면, 무기력해지는 상황의 뿌리는 타인의 사랑과 인정을 얻을 수 있는 그 어떤 노력도 하지 못하는 (혹은 노력하더라도 사랑과 인정을 얻을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이다. 그 결과 열등감이 생긴다. 인정받고 싶어 애쓰지만 늘 나의 무능력을 마주할 뿐 열등감을 느끼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나 역시 '내가 원하는 바가 무엇이고 왜 그것을 원하는지 제대로 바라보지 않고 무작정 분주하게 움직이는 대부분 사람들' 중 한 명이고,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믿으며 노력하고 애쓰는 과정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합리화하며 살고 있다. 무능하지 않다고 믿고 싶어 무능함을 발견하면 못 본 척 눈감아버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다고 우기기도 하면서. 우리는 무력함을 받아들이지 못해 온갖 망상을 동원해 절망적으로 저항한다.
길긴 하지만 무력감의 합리화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반복되는지 사례를 설명한 부분을 덧붙인다.
전쟁에서 패배한 나라의 심리적 자세를 살펴보면 앞에서 설명한 보상 메커니즘을 시간 순서대로 발견할 수 있다. 평화협정이 체결된 후 한동안은 정치 사회 활동이 이례적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새 헌법, 새 상징, 새 법안을 만들었다. 자신들은 꿈을 꾸는 게 아니라 현실을 바꾸는 사람이라고 선언했다.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실질적 변화가 없었다. 지도자의 열정과 (그 열정이 단순한 핑계와 계략이 아니었다면) 대중의 활동성 역시 공허한 분주함으로 밝혀졌다.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낼 만한 진짜 활동성이 부족하고 무력했기 때문이다.
노력의 결과가 없자 곧바로 '시간에 대한 믿음'으로 넘어갔다. 성공을 기대하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했기 때문이고 느끼면서 인내심을 갖고 너무 조급해하지만 않는다면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 달랬다. 하지만 바라던 방향과 정반대 결과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에 대한 믿음을 고수할 수 있으려면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지 않으려 고개를 돌려야 했다.
그런 후 차츰차츰 시간에 대한 믿음의 자리를 기적에 대한 믿음이 꿰차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인간의 노력이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 의심했고, '신성한' 지도자와 상황의 '전환'에 모든 것을 걸었다. 무엇을 바꾸고 싶은지,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알려하지 않았고 비록 내용에 공감하지 못한다 해도 아무 일도 없는 것보다 뭐든 급격한 변화가 있는 게 낫다고, 그래야 최소한 자신들이 노력했으나 실패한 일을 이룰 가능성이 있리라고 믿었다.
패배한 지도자들은 권위주의 이데올로기가 승리한 후에도 시간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또 한편에서는 처음부터 기적에 대한 믿음이 존재했지만, 그것은 소시민 계급에 한정되었다. 소시민 계급은 심해지는 경제력 박탈 탓에 무력감이 가장 컸다. 따라서 그들은 전쟁 직후엔 군주제와 과거의 깃발이 되돌아오는 기적을 꿈꿨고, 그 후엔 '지도자'와 '한 번의' 변혁을 기대했다.
소름 돋는 건 이 문장이었다.
"인간은 변하고 싶고 변할 수도 있다고 느끼지만 사실은 다른 모든 것은 다 기대해도 오직 하나, 변화를 위해 스스로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기대만은 하지 않는다."
도대체 왜?
프롬은 이런 무능함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자신이 나약하고 무력하다는 깊은 확신에서 나온다고 줄곧 강조하는데 그 원인이 우리의 성장배경에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태어나서 보살핌 없이는 살아날 수 없을 때, 부모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성장과정에서 무기력이 본성처럼 새겨질 수밖에 없다는 것. 사랑으로 보살핌을 받았어도 자신의 권한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이룰 수 없으며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고 무엇도 바꿀 수 없다.
두 번째는 독자적인 삶을 살아야 할 시점이 되어도 부모의 친절 아래 스스로 무력감을 깨우쳐 나가야 할 경험을 하지 못하고 무능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진심으로 바라고 절실하게 노력한다면 원하는 걸 모두 이룰 수 있다고 배워왔지만 현대사회로 올수록 출생의 우연이 더 많은 걸 결정한다. 늘 기대하며 무언가를 열심히 해보지만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기대와 현실 사이의 괴리는 반복학습을 통해 역시 난 틀렸다는 생각만을 견고하게 만들 뿐이다.
시민계급의 특성은 ~이다. 는 문장으로 이 챕터는 시작된다. 웬 시민계급 타령인가 싶었는데, 중간쯤 와서 이런 무기력을 느끼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시민 계급에게만 드러나는 특징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그 이유는? 다시 위에서 말한 성장과정과 연결된다.
시민계급의 아이들은 겸손과 겸허, 이웃 사랑의 덕목을 배우며 현실에 순응하고, 자신의 행복추구권을 축소해가는 과정을 배운다. 하지만 권력을 가진 소수집단의 아이들은 이런 규칙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배운다. 성공을 원한다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인정머리가 없어야 한다. 엘리트의 자식들은 이 비밀을 제때 탑재하게 되고 다수의 대중은 이 비밀을 모른 채 살아간다.
따라서 대부분은 평생 사회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어리둥절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용당한다. 19세기의 예를 들면, 권위자들이 노동자에게 명령하며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했던 권위주의, 상류층이 노예무역으로 돈을 버는 것과 같은 형태의 착취, 인종차별 등이다.
지금은 이 문제가 해결된 것 같지만 교묘하게 얼굴만 바뀌었을 뿐 실제로 역사 속에서 이 과정은 반복되고 있다.
이제는 복종을 기본으로 한 비합리적 권위는 사라졌지만, 인간의 능력을 바탕으로 한 합리적 권위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합리적이라며 모두가 수긍하지만 사실 그 합리는 소수 엘리트가 독점하거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착취도 여전하다. 모두가 자기 밖의 외적인 목적을 위해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인간처럼 행동하는 기계와 같은 사물의 생산을 위해 자신을 착취하고 그 앞에 무릎 꿇는다.
1. 사회 상황과 정치적인 힘을 깨달아야 한다.
무력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뭔가 나아진다는 기대를 하지 않기 때문에 이론을 따분하고 중요하지 않게 생각한다. 우리는 늘 권위에 복종당하고 착취당하며 살고 있다. 역사가 반복되는 이유는 어쩌면 이것 때문일지 모른다.
교묘하게 짜인 판 위에 놀아나지 않으려면 우리를 지배하는 '권위'의 껍데기가 어떻게 바뀌어 가고 있는지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하며 근본적인 문제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결국 사회와 정치의 이론을 공부해야 하고, 역사 속에서 이들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알아야 한다.
2. 인간의 심리적 메커니즘을 제대로 달아야 한다.
생각이나 감정이 어떤 이유로 시작된 것인지, 합리화는 아닌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구조적으로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걸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생각이 어떤 프로세스를 거쳐 이루어지며 그로 인해 우리가 어떤 착각을 하는지, 행동을 하고 싶어하는지 정신적, 심리적 메커니즘을 이해하면 문제는 바로잡고, 잘못된 건 고치려 노력할 수 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잘 알아가라고 말한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답을 찾으라 한다. 나를 오해하지 않으려면 나의 본능에 충실하기보다 이론을 우선 제대로 깨달아야 한다.
에리히 프롬은 말했다.
이론은 행동의 조건이다.
어떻게 잘 살아가야 할까
내가 원하는 건 무엇일까
성공이란 무엇일까
바쁘고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철학책은 자꾸 질문을 던진다. 고민하기보다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다. 무기력을 느끼고 회피하려 했던 것과 비슷한 류의 작용이 아닐까?
어떻게 삶을 잘 살아낼 수 있을지 질문 앞에 눈감지 않고 마주하며, 제대로 된 답을 찾아가기 위해 공부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이 없다고? 뭘 위해 그리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