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 다른 삶의 방식을 경험하고 받아들일 기회

7년 된 딩크족의 결혼생활에 만족하는 이유

by 보리 Bori

우리는 자라면서 부모님의 생활양식에 익숙해지고 길들여진다.

나의 경우에는 보편적이고 안정적인 길을 선택하며, 미리 계획하고 계획을 실행하면서 경쟁해서 살아남기 위한 삶을 살아왔다. 물론 성취의 기쁨과 보람을 즐기면서..

학교와 회사에서 모범생처럼 딴짓하지 않고 성실했으며. 남들보다 잘 해내기 위해 눈치껏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가족 외에 다른 사람과 7년 정도를 살면서 기존에 내가 살아오던 방식에 몇 가지가 추가되었다. 남에게 관대해졌으며, 삶의 태도가 여유로워지면서 스트레스가 줄었고, 내 삶을 주체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이를 보여주는 친구에게 배운 말 세 가지


그럴 수 있지


많은 커플들이 그렇듯 투정 부릴 일이 생기면 나는 친구에게 조잘조잘 일러바치듯 이야기한다.


나 : 자료가 안 와서 연락했더니 이해가 안돼서 못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는 거야. 어제 전화로 그렇게 자세하게 설명을 했는데 이해가 안 된다는 게 말이 돼? 아니 그리고 이해가 안 되면 연락을 해야지 왜 혼자 끌어안고 있는 거야?


가만히 듣다가 한참 후, 베이스 톤의 부산 사투리로


친구 : 그럴 수도 있지


모든 사람이 마누라처럼 빠르지 않을 수 있어. 나도 누가 통화로 설명하면 속도를 못 따라가서 난처할 때가 있어. 그래서 전화통화보다는 메일이 좋아. 순간 이해가 안 되거나 놓치더라도 메일은 계속 다시 볼 수 있잖아. 그러니 메일로 정리해서 다시 한번 보내봐~ 그 사람도 괴로울 거야.


상대편의 입장에서 다른 사정이나 이유가 있지 않았을지 생각해 보라 일러준다.


진심으로 화가 난 상태였다면 저런 반응이 화를 돋웠겠지만, 다행히도 친구는 그 정도의 눈치는 챙길 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론 처음엔 맥이 풀린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틀린 말이 없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좋고, 이렇게 남에게 관대한 마음을 베풀 줄 아는 태도가 멋있어 보여서 배우려 노력했다.


남 탓은 내 마음에 나쁜 기운을 스멀스멀 퍼트린다. 이해하고 해결책을 찾는 편이 나에게도 낫다. 엄격한 잣대는 나에게만 들이대자. 남에게는 관대하자. 서로를 위해서!

이런 마음가짐으로 조금씩 변하고 있는 최근의 대화 패턴은 이렇다.


나 :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아?


… 잠시 후


나 : 아니다. 그럴 수도 있지


친구 :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쓰담쓰담)



천천히 해


가족행사가 있는 어느 주말의 장면을 비교해 보자.


<보리의 조카 돌잔치 날>

돌잔치 날짜와 장소 정하기는 한 달 전부터 미리미리! 그날의 스케줄과 몇 시에 누가 누구를 픽업해서 갈 것인지까지 일치감치 계획한다.

당일날 아침 출발하면서 각자 도착시간을 미리 공유하고, 착착 계획대로 진행한다. 아점으로 식사를 하고 단체사진도 찍고, 소화시킬 겸 조카가 좋아하는 물놀이도 다녀온다. 저녁은 엄마가 준비한 상차림으로 푸짐하게 먹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산책을 하고 헤어진다.


<시부모님 생신파티 날>

3일 차이로 아버님과 어머님 생신이라 부산에 가는 날. 어머님께서 저녁 식사에 맞춰 천천히 오라고 하신다. 집에 도착했는데 아버님이 갑자기 1박 2일로 골프를 가셨다 한다. 자고 일어나 식사하고 쉬고… 생일파티는 저녁에 진행되었다. 도련님은 차를 놓쳐 생일파티가 끝나 밤늦게 도착한다. (그래도 아무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날 아침 일찍 서울로 출발했다.

'2박 3일을 부산까지 왔다 가는데 뭐지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은 찝찝한 기분은... '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친구 저번 우리 조카 돌잔치 모임 때 얼마나 어지러웠을까?


서로가 적응된 속도가 이만큼이나 달랐다.

이 때문에 가끔 부딪히기도 했었다. 나는 매번 약속 때 늦는 친구에게 잔소리했고, 함께 외출을 준비할 때 자꾸 재촉하는 나 때문에 스트레스받는다며 친구가 여러 번 클레임을 제기했다.


어느 날 퇴근 후 친구와의 약속 시간에 30분 정도 늦게 되었다. 늦는 거 싫다며 잔소리하던 내가 늦었으니 한소리 듣겠구나 싶었는데, 그때 전화로 친구가 했던 말 “나는 핸드폰으로 게임하고 있으면 되니깐 천천히 와”

구박하던 나와 달랐다. 천천히 와도 괜찮다 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공평하게 나는 다음 친구의 지각에 넓은 아량을 베풀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한 번은 봐줘야지 했는데, 깨달음은 여기서 왔다. 매번 기다리는 건 똑같았고, 막상 다른 것이라고는 내 마음가짐이었는데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보니, 잠깐 기다리는 그 시간이 참 별것 아니더라.

늦어질 수 있음을 예상하며 여유를 갖다 보니 서로 부딪힐 일이 적어졌다. 그래도 나의 계획을 세우는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다만 이제는 빡빡하지 않게 여유를 둘 뿐이다.


지금은 많이 느긋해져서 친구와 삶을 호흡하는 속도가 어느 정도 비슷해졌다.



네가 하고 싶은 게 뭐야


나 : 친구야 나 회사 너무 다니기 싫은데 그만둬도 돼?


친구 : 그럼! 나는 마누라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

마누라 하고 싶은 사업 해. 자리 잡으면 나 회사 그만두게 ㅎㅎㅎ


내가 사이드 프로젝트나 퍼스널 브랜딩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건 친구의 이런 바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결혼 전에는 한 번도 회사를 그만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다.

친구가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고 하면 나는 농담이라도 그러라고 하지 못했는데, 친구는 매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회사 그만두고 자기 일을 하라고 말했다.


자주 메모장에 하고 싶은 일이며, 사업 아이템이며, 아이디어를 적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게 없다.

(최근 프리랜서 간접경험을 아주 살짝했는데 이건 다음번 글로 한번 써보는 걸로…)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걸 찾아보겠다며 이것저것 배우고, 경험해보면서 나의 사용법을 알아가는 중이다. 이것뿐이어도 괜찮다.



만약 삶을 다시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결혼은 안 할 것 같다. 그때도 나는 딩크족일 거고, 그렇다면 굳이 결혼이라는 제도에 묶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결혼생활의 유일한 단점이라 생각하는 두배의 의무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테니…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보는 경험은 절대 포기할 수 없을 듯하다.


어른이 되어 나의 선택에 의한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만든다니 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물론 그만큼의 고통은 필수적이겠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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