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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리 Bori Jul 21. 2024

하고 싶은 일vs 잘하는 일? 정답이 없는 이유

교열자의 일부터 커리어 성장통까지 feat. 교열걸

교정교열 관련 책을 찾다가 발견하게 된 일본의 소설책『교열걸』

'걸’이라는 단어와 패션 디자이너가 그린 스타일화 같은 일러스트는 어째 첫인상부터 거리감을 갖게 했지만 ‘교열자가 하는 일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는 한 줄 때문에 일단 읽어보기로 했다. 교정교열 책들을 구매하면서 총 3권짜리 장편소설 중 1권을 함께 구매했다. 어느 금요일 저녁 가볍게 읽을 책으로 골라 교열걸 1』을 집어 들고 침대에 기대어 읽기 시작했다. 공부하듯 반 의무감에 읽던 교정 교열 책들과는 달리 재밌게 술술 읽혀새벽까지 앉은자리에서 한 권을 뚝딱! 하게 했다. 바로 2~3권을 인터넷으로 주문하고는 기다리는 주말 동안 일본에서 드라마화된 <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고노 에쓰코>를 정주행 했다. 그리고 다시 책을 3권까지 완독 했다. 사실 재미로만 본다면 드라마로 끝내도 되었을 텐데 다시 책을 다 보고 싶었던 이유는 마음을 쓰라리게 후벼 파는 포인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책과 드라마가 무엇이, 왜 좋았는지부터 그리고 무엇이 콕 와닿았는지 감상을 정리해놓고 싶을 정도로. 


‘걸’이라는 단어와  일러스트는 어째 첫인상부터 거리감을 갖게 했지만 ‘교열자가 하는 일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는 한 줄 때문에 일단 읽어보기로. 


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코노 에츠코




교열자는 무슨 일을 하나? 교열은 어떻게 하는 건가?

패션 잡지《라시》의 열혈팬인 주인공 코노 에츠코는《라시》의 편집자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잡지를 출판하는 경범사에 도전하지만 벌써 여러 번 떨어진 상황. 반복되는 면접 자리에서 교열팀장의 눈에 들어 교열팀원으로 채용이 된다. 과월호의 제목과 페이지 수까지 기억해 내는 탁월한 기억력, 궁금한 걸 참지 못하는 성격은 교열자에 딱이라는 판단을 한 것. 교열팀을《라시》의 편집부로 가는 발판 삼아 일을 시작하지만 안하무인이나 얄밉기보다 솔직하고 귀엽게 보이는 건 원하는 일을 향해 집중하고 노력하는 태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를 채용한 팀장님의 안목은 탁월했다. 그는 교열이 편집자가 되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하면서 교열 일에 빠져들고 일도 잘 해낸다. 저자의 글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고치는지, 교열자와 편집자는 어떻게 역할이 구분되어 있는지 등을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교열자의 일과 관련한 부분은 책에서 해당 부분을 발췌해 두었다. 


덧) 책 속 문장으로 보는 교열자의 일 

한자 숫자와 아라비아 숫자가 혼용되는 부분을 일단 지적했다. ‘악우이’ 다음에는 ‘며’를, ‘승객’과 ‘이백 명’ 사이에 ‘은’이라는 글자를 넣었다. ‘저희’와 ‘우리’의 통일은 어떻게 하지? 그리고 두 번째 ‘일족’에 밑줄을 긋고 ‘삭제?’라고 쓰고 나서, 조금 뭉뚝해진 연필심으로 교정지 위를 해파리처럼 헤맸다. 
‘아키하바라노미야 일족은 역사상 실존하지 않는데 OK?’
‘겐지와 헤이시 가문이 있던 시절에 아키하바라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OK?’
‘빛나는 전통 두건을 쓴 무리가 입은 옷은 정장인가, 아니면 헤이안 시대 복장인가? 묘사를 해야 상상하기 쉽지 않을까?’ 
해당하는 부분에 v 표시를 하고 본문 바깥 여백에 꼬불꼬불한 글씨로 겨우 의문 사항을 적어 넣었지만 아무래도 소용없을 것 같아서 지우개로 느릿느릿 지웠다. 

『교열걸 1』 65쪽


감정이입했잖아. 냉정하게 교열할 수가 없다고.

『교열걸 1』 68쪽


일에 익숙한 교열자가 하루에 완벽하게 교열할 수 있는 매수는 보통 25페이지 정도라고 한다. 

『교열걸 1』 141쪽


26일→25일? [현대어역『신장공기』에서]
건너편→상대편?, 불고하고→불구하고, 개장()→개성()
‘늦은 밤’은 명확한 구분이 없는 시간대인데 ‘되고 나서야’라는 표현을 써서 ‘당도했음’을 나타내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문장 아닌지? 

『교열걸 1』 153쪽



작업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에쓰코는 일단 글자 배치를 확인한다. <K-bon> 교열을 시작한 이후로 이 과정에 좀 더 공을 들이게 되었다. 편집부에서도 확인하지만 교열을 할 때는 날원고의 본문과 대조하여 레이아웃을 지정하다 빠진 부분이 없는지 우선 확인해야 한다. 다음으로 문장을 읽으며 같은 루비가 반복해서 사용된 곳이 없는지와 루비의 위치를 확인한다. <C.C>는 비교적 루비가 많다. 그리고 같은 단어를 위치마다 다르게 의미 없이 한자와 가나로 나누어 쓰지는 않았는지, 또한 한자 표기법이 여러 개인 단어를 한 가지 한자로 통일해서 사용했는지 확인하고, 각 잡지의 기본 표기법을 기준으로 사용할 수 없는 한자를 걸러낸다. 문학 분야에서는 저자의 규칙에 따르지만, 잡지에서는 작가나 에세이스트 이외의 필자가 쓴 글에는 각 잡자의 규칙을 기계적으로 적용한다. 그러므로 문학 분야에서처럼 글쓴이에게 ‘저자교’를 보내서 확인해 달라고 하지는 않는다. 사실 확인이 필요한 부분은 틀렸으면 알아서 수정하고, 연호나 고유명사는 필자와 편집자가 자료를 첨부했으면 일단 그걸 보며 틀리지 않았는지 확인한다. 첨부하지 않았거나 자료가 불충분한 경우는 가능한 한 알아보고, 그래도 정 모르겠으면 연필로 의문을 제기한다. 책 제목과 공연 일시, 문의처의 전화번호가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날짜와 요일은 맞는지도 살펴본다. 숫자는 잘못 볼 가능성이 높으므로 몇 번이고 확인한다. 

『교열걸 1』 223쪽


만약 문장이 유치하고 내용이 사실과 다르더라도 그 내용이 이익만 창출하면 그만이라면, 교열은 필요가 없을 테고 애당초 교열이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겠지. 

『교열걸 1』  243쪽

ㄴ 완성도를 높이는 과정의 의미 


에스코는 연재 제1회 때부터 만들어둔 용어 통일표를 꺼내어 비교하면서 연필로 적어 넣었다. 연재소설은 작가 본인이 설정과 등장인물 이름을 잊어버릴 때도 있다고 하니, 에스코는 교열할 때 실수하지 않도록 연재가 시작되면 교열 작업을 마친 교정지를 복사해 놓고 인명과 등장하는 가공의 장소, 가공의 물건들의 일람표와 일반적인 용어 통일표를 작성했다. 

『교열걸 3』  28쪽





저마다 꿈을 반쯤 접고 일을 시작한 사회 초년생의 이야기 

그리고 책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 

잡지사 편집자라는 꿈을 오래 품고 키워온 에츠코 주변에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교열걸 2』는 주인공의 주변 인물을 다룬 스핀오프다. 어쩌다 보니 독자 모델을 하던 잡지의 편집자가 되었지만 일에 재미나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모리오, 작가를 꿈꾸다가 문학 편집자가 된 후지이와, 편집자가 되고 싶었지만 동성애자라는 정체성 때문에 원고 뒤에서 일하는 교열자를 선택한 요네오카, 무명작가를 데뷔시키겠다는 꿈을 안고 입사했는데 어느새 과로에 찌든 가이즈카. 각자는 저마다의 꿈을 품었지만 나름의 이유로 현실적인 대안을 선택했고 현실을 살아가며 자신의 방식을 찾아간다. 단순히 사회 초년생의 커리어 성장통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문학부터 잡지까지 책을 만들기 위해 일하는 다양한 직업을 접할 수 있다는 점도 재미 요소 중에 하나이다. 이런 면에서 <중쇄를 찍다>와도 비슷하다. 중쇄를 찍다를 재미있게 읽은 분이라면 교열걸』도 분명 흥미롭게 읽을 거다. 



교열걸 vs 드라마 <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고노 에쓰코>

책이 현실적이고 사실적으로 담백하게 교열자와 그 주변인물을 담아냈다면 드라마는 드라마로서 갖는 매력을 한 껏 살려주었다. 책이 교열자로 성장해 가는 스토리 중심이고 연애 스토리가 MSG 정도였다면 드라마에서는 일만큼이나 러브라인이 메인 스토리이다. 예쁜 배우과 화려한 패션도 눈을 즐겁게 한다. 긍정적이고 단순 명쾌한 성격이라던지, 지방에 살다가 도쿄생활을 하고, 월급을 받으면 대부분을 패션에 투자하느라 식과 주는 뒷전인 주인공의 일상이 드라마에서는 그저 예쁘고 화려해 보여서 아쉬운 점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책에서 와닿았던 포인트를 드라마가 잘 살려주어 만족스럽기도 했다. 



하고 싶다 생각한 화려한 일과 나의 적성이 다를 때의 괴로움 

에츠코는 좋아하다 못해 사랑하는 잡지의 편집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출판사에 들어와 존재도 몰랐던 교열부에서 일하게 된다. 화려한 그녀와 달리 교열부의 일은 수수하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점점 교열부의 일에 빠져든다. 조금씩 서서히 에츠코는 교열의 매력에 스며든다. 패션잡지 편집부 일을 잠시 경험하면서, 동경했던 일과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은 다르다는 걸 깨닫는다. 


입사한 후 처음으로 일이 재미있었다. 

『교열걸 1』 223쪽


생각을 달리하면 교열이 독자에 더 가까운 것 같아. 직접적으로 거리가 더 가까운 건 편집이겠지만. 그러니까 이런 거지. 교열은 호텔의 개실을 단장하는 느낌이야. 손님을 기분 좋게 접대하기 위해서 남모르게 활약하는 닌자라고 할까. 

『교열걸 1』 227쪽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요. <라시> 편집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경범사에 들어왔는데, 왜 교열부로 발령 난 건지 계속 불만스러웠는데, 지금은 여성 잡지를 교열하는 게 정말로 재미있어요. 게다가 저는 패션 잡지를 교열할 때는 잘못된 부분을 전대로 놓치는 법이 없어요. 왜 이런 데서 재능이 발휘되나 싶어서 억울할 지경이에요.”

『교열걸 3』 242쪽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지 못하고 매달려 온 삶. 청춘 드라마 같은 에츠코의 이야기를 책과 드라마로 모두 섭렵하고 빠져들었던 건, 하고 싶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모습에서 자신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브런치에 계속 써온 일 이야기에도, 커리어 성장기라고 명명한 독립출판물에도 원하는 일을 위해 분투한 시간이 켜켜이 쌓여있다. 그렇게 도전을 시작하고 시도하고 좌절하며 지내온 긴 시간 동안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할 수 없었다. 포기되지가 않았다. 

그러나 작년 퇴사 후 프리랜서로 에디터 일을 시작하면서, 하찮게만 보이던 내 강점과 장점의 진가를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꼭 원하던 일이 아니어도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만족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도저히 깨지지 않을 것만 같던 단단한 장벽에 금이가고 있었는데, 그때 이 책을 만나며 비로소 공감이 된 것. 

<중쇄를 찍자>를 너무 좋아했지만 내심 불만이었던 장면이 있다. 만화가를 꿈꾸며 20년간 어시스턴트를 해 온 누마타 와타루가 결국 꿈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장면. 당시 내 눈에는 자신의 한계를 알아차리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용기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루저처럼 보였고 내가 겹쳐 보이면서 불편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잡지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독자로서의 마음이었고 자신에게는 교정자의 일이 잘 맞다고 깨닫는 장면이 뭉클했다. 그즈음 여러모로 마음이 편안해지고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는 느낌이 들었고 이 원인이 뭘까 궁금했었는데, 답을 찾은 느낌이었다. 




"하고 싶은 일과 적성에 맞는 일이 달랐던 거예요. 그 사실을 어제야 겨우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하지만 실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죠. <라시> 편집자가 적성에 맞으면 얼마나 좋을까?” 
에스코는 오랜 세월 애태우며 동경해 온 직업과 스스로 결별하고, 1년간 사랑을 키워온 연인에게도 이별을 고했다. 



세 권에 걸친 이야기에서 이렇게 몇 문장으로 마무리되는 게 조금 아쉬웠는데, 이 메시지를 드라마는 더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책에서는 에츠코의 애인은 소설가를 꿈꾸고 결국은 헤어지는 것으로 끝나지만, 드라마에선 이 친구는 소설 대신 인터뷰집을 완성한다. 전면에 드러나지 않지만 표 나지 않게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는 직업인들을 인터뷰한 것. 


드라마를 보다가 메모장에 수집한 대사 

“전부 당연시하는 일이라서 일일이 기뻐하지도 않고 누가 점검하는지 신경도 안 써. 하지만 전부 대단한 일 아니야? 당연한 걸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건 뒤에서 묵묵히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야.” 
“왜 그렇게 당연한 걸 잊고 살았을까?” 
“존재를 인식 못할 만큼 당연하게 일하는 것… 그게 당연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바라는 목표일 거야. 내 소설을 교열해 준 너를 만난 덕분에 처음으로 교열이란 일에 관심을 갖게 됐거든. 이런 직업이 또 있지 않을까? 빛이 안 드는 데서 일하지만 빛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그게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였어.”

드라마 <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고노 에쓰코> 중에서 


가장 와닿았던 대사는 바로 다음이다. 에츠코에게 라시 편집부 채용의 기회가 주어지지만, 그는 교열팀의 사고를 수습하느라 PT를 준비하지 못하고 기회를 날려버린다. 자책하는 그에게 동료가 해주는 말. 


“PT건을 뒤로 미룬 나 자산에게 정말 실망했어. 그토록 간절하게 랏시에 가기를 원하면서 행동은 어중간하잖아.”
“그건 어중간한 게 아니야. 넌 이번에 교열부 업무와 랏시로 이동할 기회를 놓고 교열 업무를 우선시했어. 그건 네가 교열부 직원이란 자각이 있었기 때문이야. 교열 일을 랏시의 편집자가 되기 위한 도구로만 삼았다면 난 널 경멸했을 거야. 하지만 넌 꿈이 따로 있으면서도 눈앞에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어. 그래서 교열부 사람들도 널 받아들여줬던 거야. 넌 어중간하지 않아. 네가 앞으로 편집자가 되든 교열자가 되든 너는 너야. 적어도 어느 쪽이 됐든 난 너를 응원할 거야.”

드라마 <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고노 에쓰코> 중에서 




 

세상엔 꿈을 이룬 사람도 있지만, 이루지 못한 사람도 있다. 튀는 직업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직업도 있다. 개중에는 꿈을 이뤘지만 내 꿈은 이게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하지만 어떤 마음으로 어떤 일을 하고 있든지 눈앞에 주어진 일은 최선을 다해 해내야 한다. 그것이 자칫하면 평범하게 반복될 일상을 의미 있고 소중한 나날로 바꿔주는 방법이란 것을 그는 몸소 보여주었다. 언젠간 그의 꿈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그날까지 그를 응원할 것이다. 꿈을 이루었든 이루지 못했든 현재의 일에 긍지를 가지고 세상을 위해 묵묵히 일하는 수수하지만 굉장한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드라마의 마지막 내레이션을 보며 생각했다. 

'이 대사를 진심으로 공감하며 받아들이는 데까지 참 오래 걸렸구나. 그렇지만 잊지 말자. 반짝거리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추구하며 도전했던 시간이 있었기에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가능했다는 걸. 또 다른 의심과 불안이 찾아오겠지만, 또 받아들이기까지 오래 시간이 걸리고 괴롭더라도, 묵묵하게 받아들이며 최선을 다하다 보면 이렇게 또 깨달아지고 받아들여지는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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