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해방과 추앙, 그리고 나의 해방일지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와 독립출판물이 된 진짜 나의 해방일지 <점선길>

by 보리 Bori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인생 드라마를 보고 또 보는 게 취미이지만, 결말이 나지 않은 드라마를 도중에 다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나의 아저씨>가 아무리 좋았다지만 ‘해방’과 ‘추앙’이라는 낯선 단어들로 시작하는 1~2화를 보며 ‘너무 나간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 때문일까 집중해서 보지 못했고, 중간중간 분명 이거 복선인데 잘 모르겠다 싶은 것들이 많이 쌓인 느낌. 딱 50% 진행된 상태에서 다시 보기를 선택했다. 역시 놓친 게 많았다.


강남에서 택시를 타면 3만원이 나오는 경기도 남쪽 끝자락, 아파트 대신 논밭이 깔린 시골 풍경의 마을이 배경이다. 주요 인물은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다 큰(서른이 넘은) 남매 셋. 그리고 이들 옆집에 사는 낯선 남자. 이름도 모를 구 씨.

구 씨는 이 동네에 온 지 오래되지 않은 듯하고, 낮에는 아버지 공장에서 일한다. 일하지 않는 시간에는 혼자 멍 때리듯 먼 곳을 바라보며 술만 마신다.


전반부를 끌어가는 건 삼 남매 중 가장 철들어 보이는 막내딸 염미정이다.

말이 없지만 입을 열면 여느 드라마 주인공처럼 너무나 수려하게 말을 잘하는

속 깊고 다 참아낼 것 같지만 열 받으면 앞 뒤 안 가리고 욱하는

착실하게 부모 속 안 썩일 것 같지만 은근히 큰 사고를 치는 그런 캐릭터.


주중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주말에는 부모님을 도와 뙤약볕에서 밭일을 한다. 언니, 오빠와는 다르게 묵묵히. 순하고 착해 보이는 미정이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빌려준 돈 때문에 독촉을 받는 어느 날 다자고짜 구 씨에게 폭발하듯 말한다.

“나는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요. 당신에게는 무언가 해야만 할 일이 필요해요. 그러니 나를 추앙해요.”

밑도 끝도 없이 사랑도 아닌 추앙을 하라니. 해방에 이어 추앙이라니…

대사 대신 미간으로 연기하던 이 남자는 더 가관이다.

“너 남자한테 돈 빌려줬지? 뚫어야 할 데를 뚫어 괜한데 화풀이하지 말고.”


뚫으라는 말이 인상 깊었을까.

사내 동호회 가입을 적극 추천하고 점심시간도 조를 짜주며 친목도모에 신경을 쓰는 (내향형 인간은 살아남기 힘들어 보이는) 미정의 회사. 사내 동호회에 가입하지 않은 특별관리대상 1호 미정은 특별관리대상 2-3호와 함께 뚫고 나아가자는 해방클럽이라는 동호회를 만들어 버린다.


갇힌듯한 느낌. 돌고 돌아도 결국 다다르게 되는 벽.

미정이 경기도가 아닌 서울에 살았어도 똑같았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빌려준 돈을 받아내도 달라지는 게 없을 것 같다고 느끼는 이유는 진짜 뚫어야 하는 게 사는 곳이나 돈 때문이 아니기 때문일 거다. 자신을 가로막는 벽을 마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가둔 갑갑한 벽은 무엇이었을까



자기를 추앙하라고 했을 때 쿵 하고 마음이 내려앉게 만드는 구 씨의 대사가 있었다.

“너는? 너는 누구 채워준 적은 있고?”



오빠 염창희가 여자친구에게 ‘이 놈 별거 없구나 하는 눈빛’을 읽고는 헤어졌다는 말에서 미정은 자신도 느꼈던 그 눈빛들을 떠올린다. '너도 별 볼 일 없구나' 하는, 우리를 좀먹게 하는 눈빛. 늘 사랑스러움을 발견하고자 달려들었다가 자신의 볼품없음 만을 확인하고 돌아서는 반복적인 관계도.

하지만 구 씨가 던진 “너는 누구 채워 준 적 있느냐”는 말에서 자신도 다르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남자를 재고 재는 언니와 사랑을 갈구하다가 뒈질 거라는 친한 언니 앞에서 선언한다.

“그동안 고르고 골라서 누구를 만나도 그 사람이 막상 너무 잘 나가면 전적으로 응원해 주지도 못했어. 날아가 버릴까 걱정이 되어서. 잘나야 하는데 너무 잘나면 안 돼. 전적으로 준 적도 없고 전적으로 받은 적도 없어. 이젠 인간 대 인간으로 응원만 할 거야”라고…

그리고 밭일하다 뜬금 없이 구 씨에게 고백한다.

“내가 추앙해 줄까요? 당신도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는 것 같아서”라고…

자신이 갈구하는 걸 전적으로 줘보기로 한다. 전사처럼.


염미정은 그렇게 무언가를 바라지 않고 누군가를 추앙하기로 하며 스스로를 해방한다.




진짜 나의 해방일지


일을 잘하고 싶어 글쓰기 연습을 한다며 2~3년간 나의 커리어 이야기를 써왔다. 그리고 작년부터 책으로 엮어보겠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는 소설처럼 써보다가, 다시 편지 형식으로 써보다가, 자기 계발서처럼도 써보면서 포기하고 다시 시작하기를 반복했다. 현재까지도 진행 중인 내용인 데다 가까운 과거의 생각은 아직 숙성이 다 되지 않아 시간을 더 필요한 것 같다며 자주 후퇴했다.


다양한 글쓰기 수업도 들어보고 글쓰기 모임을 주최하며 꾸준히 연습했다. 그러다가 1:1 글쓰기 워크숍 수업을 들으며 지금까지 쓴 내용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다는 선생님의 말에 용기를 얻어 글의 끝을 낼 수 있었다. 이렇게 저렇게 오래 쪼물거린 초안을 가까운 지인에게 보여주며 피드백도 받아보았다.


나도 내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망으로 시작했지만 독립출판물로 엮어내는 작업을 하면서 얻은 건 따로 있었다. 바로 내가 스스로를 가둔 벽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

끊임없이 도전하고 무언가 시도하는 것 같지만 정작 알을 깨야 할 순간에는, 나의 약점을 들킬까 무서워서 한계를 뚫지 못하고 도망쳐 왔다. 글을 쓰면서도 느꼈는데, 책 편집을 위해 디자인 툴을 배우고 가제본을 하며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완벽하게 잘 해내고 싶은 욕심에 자꾸 포기하고 싶었고, 힘들고 버거우면 아팠고, 그 핑계로 자꾸 회피하려 한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나 자신을 전적으로 응원해 주지 않고 '역시 난 안돼'하며 자꾸 의심해 왔다는 것을.


책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두 가지 마음가짐 덕분이었다.

하나는 그동안 내가 계속 알을 깨야하는 그 순간을 회피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한계를 기꺼이 마주해보겠다 다짐한 일.

또 다른 하나는 힘 빼고 사뿐! 그냥 해보자! 마음먹은 일.


전적으로 나를 믿어주며 끝까지 나아가 보자 했던 이 과정이 나를 추앙하는 일이었고 동시에 해방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첫 번째 책이 진짜 나의 해방일지가 되었다.




오늘 인쇄소에 나의 해방일지 <점선길> 발주 메일을 보냈다.

글을 쓰고, 책을 만들고, 이제 이 책이 도움이 될 사람들에게 가 닿기를 바라며. 이 책이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의 시작이 되어 주기를 바라보며.


독립출판물 <점선길> 신청페이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