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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raphim Jul 07. 2020

소유의 저주,

카오스의 선물



2020, 7월 3일


곧 떠나갈 리옹 아파트는 지금 카오스 상태다. 아파트 외벽은 3월에 예정이던 새 페인트 도장 공사가 코비드로 연기되었다가 이제 시작되어 칸칸이 쇠막대들이 설치된 닭장처럼 변해 있고, 아파트 공기는 화학 제품 냄새로 가득 차 화학 공장 같고, 테라스에는 거대한 차양이 분리돼 타일 바닥길게 누워있으며, 베란다 테이블 세트가 거실 구석구석을 매우고, 방들엔 이사 준비로 박스들이 쌓여있어서 잘 피해 다니지 않으면 여기저기 부딪힌다.


이 혼돈 속에서 1주일을 더 견뎌야 한다. 스트레스 덜 받으며 더 정리할 수 있는 에너지를 비축해야 하는데,,  금방 지친다. 이런 때가 정리를 할 때인데. 마음도 짐도 비우기 좋은 시간. 소유로부터 가벼워질 수 있는 찬스인데,,, 머릿속에서는 열심히 주문을 걸지만 진도가 잘 안 나간다. 버리면 좋을 것들을 잘 찾지 못하고 있다. 버릴 수 있는 것들이 많을 텐데. 버리고 나서 후회가 없으려면 취사선택을 잘해야 하는데, 간혹 버릴 건 쌓아두고, 써야 할 것을 호기롭게 버리기도 해서...


이별이 힘든 것인지 미련이 강한 것인지, 잘 버릴 수 있는 것도 능력인가 보다... 물건을 비우면 마음이 가벼워질 텐데, 한번 소유하고 나면 그 구입 비용도 아깝고 나중에 필요할 것 같아 버리기가 쉽지 않다. 애초에 소유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구입 당시에는 그 절제의 분별이 힘을 갖지 못한다. 쇼핑의 독성이 주는 달콤함이 분별력보다 훨씬 강력하기 때문이다. 유럽 생활하며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소비의 유혹에서 자유로워지고 소비에 대한 욕구가 거의 사라진 것이다. 소비를 크게 자극하지 않는 그저 그런 상품들도 그렇고 광고나 홍보 마케팅도 자극적이지 않아 소비에 대한 감각이 점차 둔해지면서 쇼핑의 즐거움도 잊게 되었다.



서울에서 이렇게 했으면 저축을 꽤 할 수 있었을 텐데... 마음과 의지로 해결하기 어려울 땐, 환경을 바꾸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임에 틀림없다. 의지 약하다고 마음 여리다고 한들 변화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이 외부 환경을 바꿀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환경을 바꾼다고 저절로 그 문제가 해소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다른 시각과 다른 태도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은 갖게 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소프트웨어와 환경과의 조건 속에서 끊임없이 작용, 반작용을 거치며 유기적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자신의 의지나 태도 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은 간혹 그 자리를 벗어나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떠나보면 그동안 자신이 담겨 있던 그릇도 보이고, 자기가 몰랐던 나의 모습이, 내가 있었던 곳에서 무엇을 했으며, 어떻게 생각했는지, 무엇을 원했는지 그 간의 삶의 족적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부유물도 함께 떠올라 문제의 핵심이 가끔 헷길려 보이지만 고독과 낯선 환경에서 오는 이질감과 생소함 속에서 진짜 자신을 만날 수 있는 흔치 않은 시간들이 축복처럼 찾아온다. 물론 음부터 나 축복이야 하고 오지는 않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신을 차츰 이해하고 대면하고 받아들이노라면 아 고독과 이별과 낯섦이 주는 축복이 바로 이런 것임에 숙연해지고 절로 조금씩 더 겸손해진다.


그리고 그토록 자신에 대해서 무지했음에 엄청 놀라게 되고 그래도 또 놀라고... 그러다 아 이런 내가 나였구나, 훨씬 멋있고 괜찮은 존재인 줄 알았는데 참으로 나의 존재가 별게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 열 번쯤에는 슬프고 우울하고 화나지만 백번쯤 확인하면 그다음에 그 느낌이 자연스러워진다. 그래서 뭐! 이게 나지 뭐, 다른 사람이라고 별 수 있겠어. 다 어둠과 슬픔과 기쁨과 아픔을 앞뒤로 지고 가는 게 인간인 거지 뭐... 하고 좀 편해진다. 그래서 좀 편해졌다. 자신에 대한 환상과 기대가 비워지면 자유도 함께 실려온다. 난 자유다.!


내주에 이사하고 나면 더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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