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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raphim Feb 03. 2021

어리석은 성급함,

티핑 포인트, tipping point

* Tipping point:


The point at which, after a series of small changes, something reaches a level where it begins to change dramatically or starts to have an important effect on something/somebody. 

- naver  영어 사전 -


 일련의 작은 변화들이 모여서 중요한 영향력을 끼치거나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지점.



2021년 1월 9일 토요일,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조우'


한 달쯤 지나니 브런치 서랍에 제목만  넣어 둔 글이 생각나 몇 자 적어본다. 단조로운 생활로 글감이 별로 없는 요즘엔 브런치에 한 달 살이를 틈틈이 정리하게 된다. 이마저도 없었으면 그달이 그달 같았을 텐데, 그래도 브런치에 글로 올려놓으면 어떤 주제들은 계속 머릿속에서 생각을 키워간다. 


기온이 올라가고 태양의 열기가 작은 방구석까지 밀려들어오는 봄과 여름이 되면 들과 산으로 바다로 달려가고 싶고, 해 짧아지고 기온 뚝 떨어지는 겨울이면 난방비 절약하는 남편 덕에 스웨터 껴입고 장갑까지 끼고 싶지만 사색하는 우중충하고 암울한 철학자가 될 수도 있어 괜찮다. 서울에 비하면 기온 상으로는 많이 추운 곳이 아니지만 기 먹은 바닷바람과 겨울이 우기인 지중해성 기후에서는 바람이 뼈 속에 스민다는 추위가 간혹 느껴진다.



여름이면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왕성하던 그 열정과 기운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겨울의 한 복판에서 한동안 자신의 내면과 잔뜩 씨름하고 나니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간 듯하다. 얼마간은 회피하기 위해, 또 외면하기 위해 버티다가 결국 마주하게 되는 순간들, 그 시간이 오면 한편 괴롭지만 다른 한편 뭔가 덜어내고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한다.


그러나 비워지는 그 시간도 아무 때나 오거나, 서둘러 빨리 비우고 싶다고 비워지는 건 아니다. 끓어오를 때까지 물은 열을 받으며 상승을 위해 쓰다가 끓어 넘친다.  열작용이 있어야 마음도 차올라 넘쳐흘러 나오는 것들이 있다. 애정이든, 증오든, 회한이든, 후회든...



그런데 차오를 때까지 잘 의식할 수 없는 우리의 감정들이나 의미들이 우리의 허술한 무의식 속에 꼭꼭 깊이 숨어서 자기를 속이거나 다른 것으로 위장하기도 한다. 무의식에 박혀 있는 것들이 뜨거운 열을 받으면 잘 뿜어져 나올 수도 있다.  


물이 뜨거워지고 잘 데워지면 끓어 넘치듯 우리의 결정적 순간의 "카이로스"는, 일상적으로 흐르는 시간의 "크로노스" 속에서 부단히 만들어내는 작은 몸짓들이 모여 탄생된다. 사소하지만 부단한 고뇌와 사유들이 모여 어느 순간 "티핑 포인트"가 되면 우리의 무의식과 의식이 서로 깨어나는 결정적 순간이 찾아온다. 무의식이 열리고 의식이 각성하는 깨달음의 순간은 부단한 움직임 없이, 힌결같은 제련 없이는 얻을 수 없다.


오늘내일 그냥 시계처럼 꼬박 흐르는 시간은 권태로울 수 있지만 타성과 권태에 저항하지 못한 채 그냥 끌려 다닌다면, 우리의 시간은 벽에 걸린 시계의 숫자일 뿐이다. 일상은 평온하지만 때로는 반복의 안일함이 주는 타성과 권태의 독을 품고 있다.


편안하고 반복적인 삶에 무뎌지는 감성과 사고 작용을 자주 깨워내기가 쉽지는 않다. 때로는 특별하게 기억되지 않는 일상의 자잘한 일들이 더 중요할 수도 있고 또 그 일들을 다 해내기도 벅찬 날들이 있으니까.



그렇다고 일상의 편안함에 너무 익숙해지면 안 된다. 매일의 반복되는 성실함 속에서 자기만의 페달을 돌리고 있어야 한다. 자기만의 속도와 자기의 갈길은 자신밖에 모르니까, 그런데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앞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자꾸 뒤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만 하고 실은 마음은 다른 곳에 머물러 움직일 생각이 없는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의 삶은 어디로 해 가는가? 무엇을 향해 나의 삶은 가려고 하는가? 이 질문은 공허하지만 그래도 필요한 질문이다. 이 질문마저 없으면 공중에 날아다니는 풍선처럼 둥둥 날아오르다 곧 바람 빠져 휘리릭 추락할지도 모르니까.




2021, 2월 2일 화요일,


어젯밤 꿈에 작은 천사가 다녀갔다. 일곱 해쯤 내 곁에 머물렀다가 영원한 안식처로 떠난 그 아이는 많이 보고 싶은 날이면 꿈속에 찾아와 주고 한참을 놀다 가기도 해 준다. 그레도 매번 아쉬움 가득한 이별이었는데 어제는 마지막 인사인지도 모르겠다. 처음으로 아쉬움 없이 헤어졌으니... 아이 생전에 내가 바랬지만 해주지 못했던 아이의 세례식이 있었다.


하얀 세례복을 입고 몇몇 아이들과 부모들이 모여있는 성당 안에서 세례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아이는 한 곳에 모여있는 다른 아이들과는 조금 떨어져서 내 곁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사회자가 호명하는지 자기 여기 있다고 대답했고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차분하고 조용하게 세례식에 참여하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대견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꿈이 끝났다.



우리는 언제 이별할지 잘 모른다. 그리고 이별 뒤에 깊이 남을 아픔에 대해서도 이별 전에는 미처 알 수가 없다. 너무 평온한 매일에 함몰되지 않으려면 한 발씩 뒤로 물러서야 한다. 누군가의 뒷모습을 볼 수 있으면 이별의 고통이 좀 덜어질지도 모른다.




(모두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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