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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raphim Oct 06. 2021

메모리 in 뉴욕

롱아일랜드와 기차


뉴욕에서 잠시 직장 다니며 롱아일랜드에 살던 시절, 롱아일랜드에서 맨해튼 펜 역까지 다니는 LIRR (Long Island Rail Road) 기차를 타고 다닐 때면 늘 즐거웠다. 아침 출근을 위해 기차역에 차를 주차하고 기차에 올라타면 출근 인파로 빼곡히 차 있어 맨해튼까지 서서 가는 날도 많았지만 운이 좋은 날에는 자리에 앉아 차창 밖 풍경에 잠겨 갈 수 있었다.


브루클린 대교


마치 여행하듯, 기차에 몸을 실으면 기분이 절로 좋아졌고, 그러다 주말이면 롱아일랜드 동쪽 끝 대서양 부두가 있는 "몬탁 (montauk)"까지 기차를 타고 쭈욱, 창가에 붙어 앉아 차창과 하나가 되었다. 기찻길 풍경에 푹 빠져 기차도 달리고 나도 달렸다...


존스 비치


계속 다가오는 기차 길과 펼쳐지는 차창 스크린을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히 행복했다. 얼마나 그리워하던 자유이던가, 얼마나 원하던 시간이던가,,, 대서양이 보이기도 하고 틈틈이 와이너리가 펼쳐지던 그 풍경을 보며 기차가 달려가는 그 길은 소박한 여행이었고 자유의 세계였다.


기차에 있는 동안, 기차가 달리는 동안에는 하늘로 떠난 아이와의 추억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이의 모습도 떠오르지 않았다. 누구도 어떤 존재도 내게 미치지 못했다. 그저 혼자 존재할 수 있어서 슬픔도 회한도 기억도 다가오지 않아서 참 좋았다.


LIRR

매월 발행되는 기차 시간표를 잘 챙겨놓고 시간 맞춰 역에 나가서 기다리던 기차를 타고 롱아일랜드를 일주하거나 문명의 화려한 행태를 보고 싶을 때면 맨해튼으로 달려 나갔다.


기차 시간표에 맞춰 나가지만 기차역에 주차하다가 아니면 그냥 걸어 나가다가 도착하는 기차를 보고 급히 달려가는 날도 더러 있었다, 허둥지둥 올라타서는 기차 검표원에게 표를 사고,,, 간혹 검표원들이 낯익어서 서로 눈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어느 때엔 시간에 쫓기려고 늑장을 부린 날도 있었다 .


맨해튼 펜역


몹시 급하게 달려 나가면, 상념들이 그리운 추억들이 뚝뚝 끊어져서 좋았다. 언제 그랬지 싶게 휙 날아가버리생각들, 성급한 몸짓들이 내 영혼을 숨 쉬게 했다.


조용하고 고즈넉한 기차 여행을 늘 동경했었다. 회사를 바쁘게 오가는 주중에 그 낭만이 너무 짧아 주말이면 토요일마다, 일요일마다 기차를 타고 롱아일랜드로 맨해튼으로 출석했다. 그 자유가 너무 행복했다. 사가는 일이 싫어지고 열심히 무엇을 이루기 위해 열정적으로 사는 일이 점점 의미를 잃어갔다...



맨해튼 다운타운


무엇을 위해 이토록 열심히 사는지 차츰 커지는 의문 속에서 자신의 팽팽한 끈을 느슨하게 풀어줘야 할 것 같았다. 왜 앞으로 앞으로 질주하려는 걸까. 달리기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맨해튼의 참 시크했던 한 카페에서 줄줄이 이어진 상념들을 다 지우고, 맨해튼의 버스 노선과 길들이 잘 인쇄된 지도를 뚫어져라 보면서, 맨해튼 구석구석을 탐방하며 놀아보자고 마음먹었다.


센트럴파크


맨해튼 남쪽 끝자락 배터리 파크에서 북쪽 센트럴 파크까지 계속 걸은 날도 있었다. 중간 브로드웨이쯤 샐러드바에 들러 식사를 하거나 센트럴 파크 가까운 샌드위치 델리에서 간식을 먹으며 틈틈이 쉬다가 다시 걷기를 반복해서 애비뉴(세로 난 도로)와 스트리트(가로로 난 도로)를 가로지르며 발길 닿는 데로 눈길 머무는 데로 걸어 다녔다.


배터리 파크


낮 12시쯤 나가 밤 10시쯤 아니면 새벽녘 1,2시에 겁 없이 들어오기도 했다. 그즈음 뉴욕의 치안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거리 정류장에서 버스를 갈아타는 것도, 노선을 잘못 타서 낯설고 약간은 험한 동네에 내리는 일도 즐거웠다. 그 동네의 까만 주민들이 "어 뭐지" 하며 쳐다보는 시선에도 난 별로 놀라지 않았다. 약간의 두려움이 들기도 했지만 버스 정차장에서 태연하게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의연함을 내보이기도 했다.


몬탁의 등대


뉴욕의 겨울 낮 시간은 참 짧았다. 오후 네시면 벌써 해가 기울어 외투를 잠그고 귀가를 서둘렀지만 점점 익숙해지며 밤 시간의 불빛도 즐기게 되었다.


뉴욕의 겨울


* 이미지 모두, 구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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