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것이 익숙하지 않던 나에게 찾아온 여유
그렇게 나는 처참한 잡 구하기의 실패를 연달아 맛보았다. '가자마자 일해야지!' 다짐했지만 결코 내 계획대로 순순히 되어주질 않는구나. 그렇게 나는 강제로 2달이라는 시간을 놀게 되었다. 통장잔고를 확인할 때마다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지만, 놀랍게도 통장잔고를 확인하고 은행 밖을 나가면 모든 것이 지워졌다.
10월의 가을. 눈에 보이는 것마다 말도 안 되게 아름다웠기에 고민 따위 생각날 일이 없었다. 할 일도 없는 나는 매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대충 집히는 옷을 걸쳐 입고 그냥 동네를 걸었다. 우리 집 근처에 작은 강이 하나 있었다. 그 강을 멍하니 바라보면, 마음속 날 더럽히는 것들로부터 깨끗하게 치유받는 느낌이 든다. Reflection. 내 얼굴까지 비칠 것 같은 투명함.
이 호수의 이름을 '하늘거울'이라고 지었다. 하늘이 오늘 자신이 모습이 보고 싶을 때 이 곳을 찾아오리라. 목을 꺾어 하늘을 바라보지 않아도, 하늘의 모습을 그대로 내려볼 수 있다. 사실 내 로망 중 하나였다. 그냥 이런 놀라운 자연 광경을 잔디 위에 앉아 하염없이 바라만 보다가 해가 지면 집으로 들어가곤 하는 것. 자연이 흘러가는 대로 느껴보는 것. 캐나다의 자연은 역시나 나에게 그렇게 보답해주었다.
잡 인터뷰에서 바닥 끝까지 처참함을 맛봐도, 밖을 나오면 '어머나..'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캐나다의 자연은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살 수 없을 정도로 청량하고 깨끗하다.
이 길고 긴 강을 따라 걸으면 우리 집이 나왔다. 매번 버스 탈 돈이 아까워 이 강을 따라 집까지 하염없이 걷는다.
이런 게 바로 여행과 다른 점일까. 내가 만약 여행으로 캐나다를 왔다면, 이 강을 볼 여유조차 없었겠지. 아니 알지도 못했겠지. 내가 지금 여기에서 생활하기에, 이 자연을 내 것처럼 즐길 수 있는 거야.
풍성한 자연이 깃든 이 곳을 걸을 때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나무들을 보면 얼마나 오래 이 곳을 지켰을까 생각한다.
이 모든 곳이 집에서부터 걸으면 만날 수 있는 곳. 그러니까 그냥 발만 딛어도 예쁘다. 이 넓고 넓은 캐나다 땅덩어리를 구석구석 다 가보고 싶은 욕심이다. 캐나다에서의 동부는 단풍으로 원래 유명하지만, 이것들이 피고 지는 것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은 여기서 사는 사람들만이 누리는 특혜가 아닌가.
하늘은 파랗고 단풍은 색색들이 찬란하고, 잔디는 빛나도록 샛 초록이다.
누군가가 워킹홀리데이는 한국을 도망치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고 했다. 그래. 이런 곳으로 도망 칠 수 있다면, 얼마나 로맨틱한 도피겠는가. 이런 도피라면 한 번쯤은 모든 걸 접고 도망쳐봐도 손해 볼 것 없다고 생각한다.
중학교 때부터 어머니 용돈 한번 받지 않고, 꾸준히 일을 하며 바쁘게 살아왔던 나에게 이보다 더 아찔한 도망은 없었다.
나는 여유라는 것을 처음 배운게 아닐까 싶다.
처음엔 이런 한가로움이 낯설었지만, 어느새 그 시간 자체를 즐기고 있는 나를 보면,
'아 이런 게 잠시 쉬었다 간다는 것일까. 몇 년이 될지 모르는 내 인생에 딱 1년 쉬는 시간을 갖는 것일 수도'
우리 모두에겐 이런 도망이 필요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