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품과 회화를 함께, 글립토테크

파워 J의 코펜하겐 카드 200% 활용-11

by 세런 Seren
코펜하겐 근교 투어 이동 동선 f.t. 도장 깨기
사정 없이 내리는 비, 글립토테크 미술관 옆 티볼리 정원

계획했던 대로 프레데릭스보르 성, 루이지애나 미술관, 오르드럽가드 미술관을 하루 만에 도장 깨기에 성공했다. 코펜하겐 중앙역에 돌아오니 5시 반쯤이었다. 역에서 버스를 타러 가는 사이에 갑자기 비가 확 쏟아져서 당황스러웠는데 10분쯤 지나 미술관 앞에서 버스를 내릴 때는 화창했다. 정말 알 수 없는 날씨다.


글립토테크 미술관 정문, 드가 특별전 소개

글립토테크 미술관의 정식 명칭은 "니 칼스버그 글립토테크(Ny Carlsberg Glyptotek)"다. 덴마크의 맥주 기업 칼스버그(Carlsberg) 창업자의 아들, 칼 야콥센(Carl Jacobsen)이 설립한 미술관이기 때문이다. 한편 ‘Glyptotek’는 “조각품 보관소”라는 뜻이지만 이곳에는 19세기 프랑스와 덴마크 회화도 많이 있었다. 내가 방문한 목요일은 21시까지 영업하고 마침 실내에서 특별 공연도 있어 현지인이 꽤 몰린 듯했다.


글립토테크(조각품 보관소) 답게 입구부터 조각 작품들이 넘쳐난다.

로비에서 쭉 나가면 엄청나게 높은 유리 천장 아래에 자리 잡은 온실 정원이 나온다. 정면에 단독으로 전시되어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은 마르크 퀸(Marc Quinn)의 "All of Nature Flows Through Us (모든 자연은 우리를 통해 흐른다)" 조각품이었다. 풍만하면서도 근육미가 있는 여성의 몸 위와 주위에 수많은 아기들이 매달려 있는 모습에서 '모성과 생명'이라는 직관적인 메시지를 얻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관객과 눈을 마주치는 기분이 드는 그림, 덴마크인의 긍지와 투지를 드러내는 그림, 분홍 원피스 입은 아이가 귀여운 그림

우선 19세기 덴마크 황금기(Danish Golden Age) 회화들을 보았다. 작품들이 정말 많았는데 덴마크 국기와 검을 든 젊은 여성이 단호한 표정으로 전진하는 모습을 그린 회화가 인상적이었다. 이는 덴마크의 역사와 관련 있다. 과거 덴마크는 사실 엄청 큰 나라였다. 하지만 19세기에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현재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1814년 키엘 조약으로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빼앗겼고 19세기 중반에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전쟁에서 패배해 독일 지역 영토도 상실) 따라서 이 그림은 덴마크가 작은 왕국으로 축소된 상황에서 긍지와 투지를 드러내기 위한 그림이라 볼 수 있다.


오딘, 토르, 로키까지 북유럽 신화 가족 모임

회화를 한참 보고 긴 통로를 지났다. 창문 밖으로 타일 벽화도 멋있었다. 다음 전시관에는 바이킹 민족의 후예라 볼 수 있는 덴마크답게 북유럽 신화 속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마블 영화 속 토르와 로키를 생각하면 조각품은 배우들 모습과 너무나 달랐지만, 특징은 잘 살린 듯했다. 특히 둘의 아버지인 오딘은 디즈니플러스에서 본 로키 시리즈 속 오딘보다 근엄했다.


동화 삽화 같던 그림 (아기 밧줄로 묶어 놓은 게 실화인가!)

이 그림은 덴마크 화가가 이탈리아에 가서 본 걸 그린 풍속화라고 한다. 중앙에 앉아 있는 여성이 아이를 밧줄로 묶어, 앉은자리에서 흙장난하라고 둔 게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밧줄이 너무 짧아 아이는 그냥 절을 하는 모양새였다. 한편 오늘날 유아용 하네스(harness) 같은 게 과거에도 있었나 보다.


죽음을 앞둔 소크라테스의 고뇌가 담긴 그림 (악마인지 저승사자인지 흐릿하게 보이는 형체가 압권!)

이 그림은 정면에서 보는 것보다 측면에서 보는 게 인상적인 그림이었다. 사형 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혀 사색하는 소크라테스를 그린 그림인 듯 했다. 그림의 중앙에는 두 팔을 벌려 환영하는 듯한 헐벗은 형체가 있는데 나에겐 서양판 저승사자처럼 느껴졌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받아들일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약간의 부상(?)은 있지만 전신상으로 살아남은 조각들
나의 취향은 근육보다 옷의 질감을 잘 살린 작품들

이어진 전시 공간부터는 조각들만 있었다. 오래전에 만든 작품이라 전신상을 유지한 경우는 몇 없었다. 반신상도 코가 주로 없어져 얼굴이 멀쩡하지 않은 게 더 많았다. 그런 와중에도 온전하게 전신을 유지한 조각상들이 경이로웠다. 이런 조각상들은 고개를 들고 봐야 할 정도로 커서, 당시에 이런 작품을 만든 조각가들이 존경스러웠다.


사자, 하마, 돼지 동물 친구들 (사자 얼굴은 하회탈 쓴 듯)
양감을 살린 동양 신화 속 동물 조각

주로 사람 형상의 조각은 전시관 내에 있는데 복도에는 동물 조각상들이 많이 있는 기분이 들었다. 여하간 강렬한 파랑, 노랑의 대비 속에 얼굴에 붉은 화장까지 한 사자, 하마, 새끼들을 품은 돼지 조각상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하마와 돼지는 실제 동물을 그대로 보는 듯한 사실적인 조각이 놀라웠다.

한편, 글립토테크에는 고대 그리스, 로마 조각만 있는 줄 알았는데 동양과 이집트, 로마 이전의 조각 작품들도 있었다. 덕분에 '동양 신화' 속 동물들을 조각한 듯한 벽화를 보았다. 입체감을 살린 게 신기해서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가며 구경했다. 뿔 달린 말과 네 발로 걷는 뱀 같은 벽화가 인상적이었다.


문이 잠겨 있어 아쉬웠던 조각관, 내가 본 기념품 샵 중 제일 멋있었던 곳
발 디딜 틈 없었던 온실 정원, 그리고 자전거 군단

문이 잠겨있었던 조각품관은 창문으로 감상만 하고 기념품 샵으로 갔다. 예쁜 마그넷은 없었지만 샵의 인테리어 자체가 멋있어서 좋았다. 건물 밖으로 나와 엄청난 양의 자전거를 보고 놀랐다. 입장할 때부터 쿵쿵거리는 디제잉을 하고 2층 발코니석에서 공연도 했었는데, 보던 사람들이 현지인이구나 싶었다. 이런 역사적인 미술관에서 그런 행사를 하는 게 통용되는 게 신기하고, 덕분에 젊은 시민들이 와서 고전과 현대를 아우르는 예술을 즐기고 가는 게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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