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다망한 하루
며칠 날씨가 좋았는데 오늘 오전은 비가 흩뿌리듯 내렸다. 그래서 첫 "Girls who run" 요크대 동아리 주관 러닝을 앞두고 긴장되었다. 이 동아리는 일주일에 네 번 러닝을 하는데 원하는 요일을 미리 신청하고 같이 모여서 뛴다. 저녁 시간과 일요일을 제외하니 오전 7시에 모여 5km 정도를 뛰는 하루만 남았었다. 한국에서 평균 10km의 아침 러닝을 하면서 나름 런부심(?)이 있었기에 신청했다. 그리하여 오늘 아침, 나를 포함해 총 10명의 학생들이 시작 지점인 학교 도서관 앞 정류장에 모였다. 간단하게 몸풀기 운동을 한 뒤, 선발대로 뛰는 원년 멤버와 후방을 지원하는 멤버를 소개하고 뛰기 시작했다.
아침 6시 반쯤 집에서 나올 때만 해도 어두웠는데, 뛸 때가 되자 해도 뜨고 비가 그쳐서 안심했다. 하지만 달리기 시작한 지 10분 만에 잘못된 걸 느꼈다. 다들 너무 잘 뛰는 반면, 나는 아침에 캠퍼스까지 이미 30분 정도 부지런히 걸으면서 이미 체력이 다 떨어졌는지 너무 힘들었다. 설상가상으로 9시 수업 때문에 태블릿 PC가 든 가방까지 멘 채로 뛰어야 했다. 복장은 불량하지만 너무 잘 뛰어서 반전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이 10분 만에 사라졌다. 졸지에 완주를 걱정하게 되었다. 다행히 Girls who Run 동아리의 정신 "you will never be left alone (너는 결코 혼자 남겨지지 않을 거야)"에 걸맞게 원년 멤버가 나를 끝까지 챙겨주었다. 우리 둘을 뺀 나머지 사람들이 너무 멀리 가버려서 길도 헤매고, 비도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해서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내가 뛰다 걷다를 반복하는 상황에서도, 자기 페이스(pace)가 있다면서 엄청나게 응원해 준 경제학 전공 학부생 친구 덕에 포기할 수가 없었다. 결국 끝까지 완주하고 단체 사진도 찍었다. 헤어질 때 그녀가 다음에도 꼭 보자고 얘기를 해주었다. 복장 불량에 너무 못해서 역대급 민폐가 되었는데 빈 말이어도 너무 고마웠다. (하지만 한동안 러닝 트라우마로 못 갈 듯하다. 미안!)
"A free weekly turn up and run club aimed at like-minded girls to connect, stay active, and socialise! Whether you’re an experienced runner or just starting out, we offer a safe and supportive environment with multiple runs a week. We are here to run with you, encourage you and form new friendships, coming along to our runs you will never be left alone."
- Girls who Run 동아리 소개
오늘은 수업이 하나라 2시간짜리 강의 하나를 듣고 기숙사로 돌아왔다. 기숙사 리셉션에서 준비해 주는 "Coffee Morning"이라는 이벤트가 있는데 티 또는 커피와 함께 비스킷을 먹으며 기숙사 내 친구들과 어울리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거였다. 방에 돌아와 얼른 샤워를 하고 시작 시간이 지나 내려갔는데 스탭만 있었다. 내가 처음 온 사람이라며 스탭이 반가워했다. 우유를 넣지 않은 블랙티(홍차)로 부탁하고, 비스킷을 같이 먹으며 스탭과 둘이 한참 수다를 떨었다. 가족 관계, 반려동물, 요크의 유령(ghost) 스팟 챌린지 등 다양한 주제로 얘기를 나눴다.
이벤트가 끝날 시간 무렵에 긴 곱슬머리의 덩치 큰 남자가 본인 머그컵을 들고 나타났다. 그가 카푸치노를 부탁할 때 내 홍차에 물을 리필하고 얘기를 나눴다. 스탭이 떠나고 난 뒤에도 1시간 반 가까이 그와 대화를 나눴다. 올리버를 줄여 '올리'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Creative Writing(창작 글쓰기)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한국 문화에도 관심이 많은데 PSY의 강남스타일을 지금도 좋아한다고 했다. (이 노래가 나올 때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가 없어서 라디오로 반복해 들었다고 했다!) 그가 요크 바이킹 뮤지엄과 맛집, 본인이 살았던 요크셔 도시도 추천해 주고, 영국과 한국 음식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눴다. 앞에 놓인 비스킷에 하나도 손을 대지 않는 게 신선한 충격이라, 나는 영국 비스킷이 세계 최고라고 생각한다니까, 본인은 다이어트 때문에 안 먹는다면서 자기 할머니가 'window cake'라고 부르는 영국 디저트를 알려주었다. 여하간 내가 단어가 안 떠올라 잠깐씩 일시정지가 될 때도 올리가 친절하게 기다려준 덕에 대화가 잘 통했다. 우리는 다음 리셉션 행사인 "National Gingerbread Cookie Day" 때 보자고 인사한 뒤 헤어졌다.
지난주에 이어 매주 수요일 저녁 7시부터 열리는 HP Muggle Society (해리포터 머글 동아리)에 갔다. 두 번째 모임의 컨셉은 "Magical Students"로 드레스코드는 본인 기숙사의 색이 있는 옷 또는 액세서리를 착용하고, 해리포터 지식을 테스트하는 퀴즈를 푸는 거였다. 한편 지난주에 기숙사 배정식 뒤 함께 앉은 그린핀도르 친구들 사이에서 너무 말을 못 알아듣고 못 했던 데다가, 퀴즈까지 푼다니까 걱정이 되었지만 자꾸 부딪혀야 영어가 늘 테니 그냥 뻔뻔 모드로 갔다.
모임 장소에 지난주에 오지 않았던 그리핀도르 친구가 한 명 더 있었다. 아예 해리포터 그린핀도르 스웨터를 입고 온 그녀는 인도 출신 학부생이었다. 한국어도 조금 할 줄 알고, K-pop, K-drama를 좋아한다고 했다. 곧이어 지난주에 왔던 심리학 석사 과정 중인 친구까지 합세해 여자 셋이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그러던 중 지난주에 했던 기숙사 배정식 얘기가 나오면서, 해리포터 공식 홈페이지에서 하는 정식 테스트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두 사람은 이미 해봤다면서 나에게도 해보라고 했다. 혹시나 그리핀도르가 안 나오면 민망하겠다 싶었는데 그리핀도르로 나오면서 신뢰도와 자신감이 올라갔다.
본인의 기숙사 사람들끼리 모여 앉아 참가자 수와 드레스코드를 맞춘 인원 수로 점수 부여를 한 뒤, 게임을 시작했다. 첫 번째 게임은 해리포터 지식을 테스트해서 많이 맞춘 기숙사 순으로 점수를 주는 거였다. 우리 성적은 22/25여서 3등을 했다. 한편 고유명사인 이름의 발음은 아는데, 어떻게 쓰는지 원어민이 스펠링을 헷갈려하는 게 신선했다. 이어서 두 번째 게임은 논리 격자 퍼즐을 했는데 5*5 칸에 주어진 힌트를 갖고 채우는 스도쿠 같은 거였다. 끝으로 주어진 단어들을 알파벳들 속에서 찾는 퍼즐 게임이었는데 매직 아이를 하는 기분이었다. 둘, 둘씩 짝지어 풀었는데 단어를 찾을 때마다 짜릿했다.
퍼즐 게임의 결과를 원년 멤버들이 집계하는 동안 같은 기숙사끼리 "Who am I" 게임을 했다. 사진 속 주인공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그 사진을 팀원들에게만 보이게 한 뒤, Yes-No 질문을 통해 내가 누군지를 맞추는 일종의 스무고개 게임이었다. 우리는 네 명이서 돌아가며 게임을 진행했다. 보통 "Am I a student/professor?" 또는 "Am I a woman?"으로 하는 걸 보고 나도 따라 했다. 해보니 역시 질문에 답을 하는 것보다 질문을 하는 것과 답을 맞히는 게 어려웠다. 그래서 첫 번째 사진 속 주인공인 볼드모트가 얼굴만 생각나고 순간 이름이 안 떠올라 멘탈이 잠시 나갔었다. 두 번째는 시간이 없어 Yes-No 질문 대신, 주인공에 대한 키워드, 힌트를 주는 식으로 진행했다. 'Free'라는 힌트로 내 사진 속 집요정 도비를 맞췄다. 솔직히 우리말로 해도 자신 없는 게임이었는데, 원어민 친구들과 함께해서 성취감이 배로 느껴졌다.
2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내 기숙사와 가까운 곳에 사는 심리학 석사 중인 친구와 걸어왔다. (사실 버스를 타려 했으나, 다른 동아리 사람들도 마치고 나와 사람이 너무 몰린 탓에 두 대를 놓치고 도보를 선택했다.) 덕분에 30분 정도 걸어오는 길에서 정말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나이 얘기가 나왔는데 10살은 더 어리게 봤다는 얘기도 듣고, 영어를 잘한다는 칭찬도 들어서 너무 좋았다. 어쩌다 보니 오늘은 영어 대화도 많이 하고, 자신감도 생기는 날이었다. 듣기에 불편함 없고, 고급 어휘와 표현도 구사할 수 있게 더 잘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