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지금 내 나이보다 어렸을 때, 아버지의 꿈은 목장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엄마를 만났고, 졸업 후 당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님의 첫째 아이이자 내 형의 이름을 딴 '상권 목장'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없는 형편에 젖소를 한 마리 한 마리 늘리고 조금씩 돈을 모아 땅을 사서 축사도 짓고 벼농사도 확장했다.
언젠가 소주를 한잔 하다가 아버지는 당신의 30대를 회상하며, 정말 쉬지 않고 일했노라고 내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아버지의 꿈
IMF 사태
그로부터 10여 년 후, 아버지의 꿈에 중대한 위기가 찾아왔다. 내가 초등학교 3~4학년 때였을 것이다. 온 국민을 불안과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뜨린 IMF 경제금융위기가 들이닥친 것이다.
사실 내가 자란 예산을 비롯한 시골 지역은 IMF 금융위기라는 말이 서울 같은 대도시에 비해 쉽게 피부에 와 닿지는 않았다.
지금 그때를 돌이켜 보면 시골 학교로 전학을 온 서울 아이들이 몇 명 있었고(대부분 부모의 부도로 할머니 댁에 맡겨진 아이들이었다), 피부가 새하얗던 '서울 출신 아이들'은 특유의 깍쟁이 기질로 은근한 질투와 따돌림의 대상이 되곤 했다.
"누구네 아버지 서울에서 대따 잘 나가는 부자 사장님이었대~"
하는 식의 소문이 나돌았을 뿐이었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IMF로 인한 가정 해체를 그 작은 사회에서 목격한 셈이다.
아버지와 용봉산에서 (아마 난 이때부터 등산을 좋아했나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버지도 IMF 사태로 큰 어려움을 겪으셨다. 젖소를 먹일 사룟값이 부족했던 것은 물론(때가 되면 사료창고에 사료포대를 등짐으로 나르던 아저씨들을 보는 일이 드물어졌다), 당시 우유 납품 대금도 제때 받지 못하셨다.
당시 아버지는 남양유업에 우유를 납품하셨었는데, 대금의 반만 현금으로 받고 나머지는 유통기한이 긴 멸균우유 박스가 집 다용도실 안을 꽉 채웠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의 속도 모르고 어린 나는 집 안 가득 초코 우유와 딸기 우유가 쌓여 있는 걸 보고 무척 신이 났다.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오면 의기양양하게 다용도실로 데리고 가 마음껏 초코/딸기 우유를 먹고 싶은 만큼 고르라고 하곤 했다.
나는 그야말로 우리집이 부유하고 풍족한 줄로만 알았다.
아버지는 그로부터 얼마 안 있어 목장 경영을 접고 친척이 운영하는 회사에 취직을 하셨고, 생전 해본 적 없던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시작하셨다.
Anti-Coronavirus
코로나 바이러스
아버지와는 반대로 나는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다가 지금 자영업의 일선에 있다. 온갖 이슈와 유행의 영향을 정통으로 맞으며 고군분투하는 야생과 다름없는 필드. 그게 내가 1년 가까이 문래동에 있으며 목도한'자영업의 얼굴'이다.
다양한 이벤트와 프로모션, 우리만의 색깔과 전략으로 위기를 헤쳐나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쉽지가 않다. 당초 예정됐던 주말 스텝 채용도 뒤로 미뤄졌다. (기존에 내 글들을 보고 지원해 주셨던 분들 정말 죄송합니다..)
손님은 급감했고 매출은 곤두박질쳤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 모두 각자의 몫을 조금씩 줄여가며 위기에 대응하고 있지만 얄궂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기세에 정신없이 얻어터지고 있는 형국이다. 보다 파격적인 프로모션을 내거는 한편 장, 단기 임대 사이트들까지 찾아다니며 직접 영업을 하기도 한다. 외국인이 안 들어온다고 두 손 놓고만 있을 순 없으니까, 숙박이 필요한 상황인 내국인 수요라도 알아봐야지.
정부가 내놓은 대책들을 꼼꼼히 살펴보며 고용유지 지원금 같은 것도 알아보는 중이다.
"대형 호텔들도 문을 닫고 있는 마당에 우리, 견뎌낼 수 있을까요?"
요즘 동료들과 한숨 섞인 걱정과 고민을 나누며 답 없는 사태의 출구를 찾느라 분주하다.
앞으로 당분간은 이런 비상사태를 견뎌내야 한다. 견뎌내는 사람이 능력자다.
"그러게 따박따박 월급 꽂히는 직장인이나 계속하지 그랬니"
그래도 아직 덜 얻어맞았나 보다. 이런 물음에는 여전히, 결단코 '후회 없음'으로 일관한다. 지재유경. 유지경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