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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의 자존감

양자역학 다큐를 보다가

by 김혜정


모든 원자는 사실 굉장히 평등한 존재이다. 그런 원자에 사람들이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한 것이지, 원자 자체로는 각각의 존재로 볼 때 차별을 당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양자역학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오늘 한 수업이 생각났다. 초6학년 친구들에게 <홍길동전>을 가르쳤는데 홍길동도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이들과 평등한 존재였으나 우리 인간이 만든 굴레인 신분 제도 때문에 가치가 절하된 존재였지 않은가. 하지만 집안 내에서 몹시 차별받던 길동, 타고난 재능을 발휘하지 못해 속만 끓이던 길동은 가출을 감행한 후 자신보다 훨씬 더 차별당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길동 자신은 비록 첩의 소생이었지만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덕분에 배를 주려 본 적이 없고 낡은 누더기 옷조차 입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허나 정처 없이 떠돌며 난생처음으로 알거지 같은 천민들을 만나며 충격을 받게 된다. 길동이에 이어 이렇게 세상 밖에 나가 처음으로 극심한 빈부의 격차를 느꼈다는 사람이 하나 더 생각났다. 바로 석가모니다. 후에 불교를 창시하는 이 고타마 싯다르타는 왕이 될 황태자였기에 왕실 교육을 받으며 세상과 담을 쌓고 지냈다. 그러나 호기심을 못 이기고 우연히 실제 세상을 둘러보고는 서민들의 바닥 생활이 얼마나 참혹한가를 깨닫고 수행에 돌입하여 결국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욕심이 모든 번뇌의 근원이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원자가 각자의 존재 가치가 있듯 모든 생명체에게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인데 우리는 우리가 만든 허상 속에서 어떤 대상에 대해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혹은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당면한 현실 가운데 자식 교육이 그렇다. 자식을 키우면서 자식이 잘 되라는 의미에서 자신의 기준과 잣대를 들이밀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미쳐 버릴 것처럼 고통스러워하고 절망하는 우리네 모습이 그렇다. 이 세상에 타의에 의해 태어나서 타인의 손에 길러지다가 사회가 규정한 수많은 기준과 잣대와 편견 때문에 상처받는 우리 아이들의 내면을 먼저 들여다 보기보다 부모 자신의 욕구를 먼저 채우려고 했던 이기적인 모습이 그렇다.

나 역시도 어려서부터 규제와 통제 속에 갇혀 살아왔고 내 작은 생각과 사소한 행동은 억압적인 가정 안에서 때론 철저히 무시당했었다. 자유와 평등을 제1의 원칙이라 일컫는 자유 민주주의 사회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고 이미 형성된 획일적인 관념의 틀 안에서 부자유를 경험해 왔다. 하지만 모든 인간에게 생각의 자유는 허용되어야 하고 다른 이들과 비교되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못 생겼어도 장애가 있어도 공부를 못 해서 학벌이 낮더라도 우리 각 개인은 존중받아야 할 가치가 있다. 직업에 귀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빈부가 그 사람의 됨됨이를 규정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 모든 사람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허용할 때 비로소 우리 개개인은 사회적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자식 중에서도 부모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한다고 티 나게 이뻐하는 것도 불평등이요, 부모의 이기심이다. 이런 것은 다 자기 위주로 생각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들이다.

따라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이다 : 자식을 비교하지 말자. 개인의 재능과 자질, 특질은 모두 소중하다. 누가 무엇을 잘한다고 해서 특별히 예뻐하지도 말고, 못 한다고 해서 무시하지도 말아야 한다. 집에서 안 해도 사회에 나가면 비교 편차에 따라 늘 차별당한다. 사회적 차별은 쉽게 해결될 수 없다. 특히 우리 한국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니 집에서는 우리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해 주고 평가의 대상으로 삼지 말자.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진정으로 응원해 주고 속상한 일이 있다면 정직과 도덕, 평등을 가르친답시고 남의 편들지 말고 아이의 마음에 편들어주자. 가정에서 사랑받고 존중받아야 아이의 자존감이 성장한다. 나이를 자동으로 먹는다고 해서 자존감도 자동으로 생기는 것이 당근 아니다. 자존감은 부모의 인정으로부터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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