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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산책,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내 가족을 돌보는 시간이 아침이었다.

by 김혜정


아침 5시 30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손에 들려 있던 안경이 툭하고 떨어지는 느낌에서였다. 안경을 다시 쓰고 욕실로 들어가 변기에 앉았다.


어젯밤 10시 넘어서 퇴근을 하고 가족들과 다같이 그 시간에 저녁을 먹고 브런치에 올라온 글을 몇 개 읽고 나니 11시가 넘었다. 큰아들 공부 좀 시키려다 “공부는 니가 알아서 하라”는 말로 실랑이의 막을 내리고 내 침대로 들어가 잠시 누웠다. 어느새 스르르 잠이 들었다. 방에 들어온 남편이 말을 시키는 바람에 비몽사몽으로 대꾸했다. 내가 잠들었다는 것조차 몰랐던, 눈치가 부족한 남편은 아들들 얘기를 이러쿵저러쿵 늘어놓았다. 그 바람에 정신이 다시 든 나는 말로는 맞장구를 쳐주었지만 이미 몸은 늘어질 대로 늘어져 있는 상태였다. 남편은 이 분위기를 몰아 잘 하면 안마를 시작하면서 나의 환심을 끌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피곤한 나는 이내 반대 방향으로 돌아눕는 비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거절의 의사를 표현하였다. 참고로 나는 남편과 침대를 따로 쓴다. 이 집에 이사오면서 내 건 슬로건! 수면은 보약이다. 수면의 질을 보장하라! 남편은 침대의 한가운데를 차지하는 데서 모자라 내 이불까지 빼앗아 다리 사이에 둘둘 말아 끼고 자는 몹쓸 버릇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밤마다 한기를 느끼며 잠에서 깼고 침대에서 떨어질까 봐 위태위태 조마조마 손끝으로 침대의 끝을 확인해가며 자곤 했었다. 그럼에도 숙면은 잘 취했지만 양손을 뻗고 싶을 때나 다리를 大자로 뻗고 싶을 때, 혹은 이리저리 뒹굴거리고 싶을 때도 마음대로 몸을 이용할 수 없어 답답했다. 그리하여 이 집에 이사오면서는 호텔방처럼 개인 침대를 두 개 마련했고 각각의 침대에서 사지를 마음껏 자유롭게 부리며 천하태평의 밤시간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호사스러운 생활이라고나 할까.

출근 시간이 바뀐 남편은 “그럼 이제 불 꺼도 돼?”하고는, 폰으로 브런치 글을 읽고 있던 나를 어둠으로 내몰고 왼 다리를 오른 다리에 척 올려놓고는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 불이 꺼지자 다시 스르르 눈이 감기면서 이내 나는 잠이 들어 버렸다. 잠이 들기 전에 폰은 바로 머리맡에 충전을 시켜놓았지만 안경은 그대로 코에 걸어두었다. 화장도 그대로였고 입 속 세균도 그대로였다. 폰만 정렬을 해 놓고 내 몸은 방치했다. 이렇게 잠이 드는 경우는 자다가 자꾸 생각한다. 일어나야지. 씻어야지. 안경은 침대 헤드에 올려두어야지. 그러나 생각대로 움직이는 건 힘든 일이다. 새벽에 몇 번은 생각했지만 결국 손에 들고 있던 안경이 침대 위로 툭 떨어지는 것을 감지한 그 순간 내 정신이 번쩍 돌아온 것이다. 아침 5시 30분에.

아무튼 욕실 변기에 앉아서 내 배를 만져보니 앞 산 둔덕처럼 참 두둑허니 실로 그 둘레와 무게를 감당치 못할 정도의 부피감이 느껴졌다. 순간 정신이 더 번쩍 나서 오늘은 그동안 생각만 했던 일들을 실천해 보기로 했다. 아침 산책!! 바로 아침 산책을 나가는 것이었다. 양치, 세수를 얼른 하고 주방에 나가 물 한 잔을 마시는데 와~~ 주방 창문 너머로 아침 해가 보였다. 5시 40분이었는데 해가 지금 뜨는구나. 날이 이렇게 밝다니!! 늘 7시 40분에 일어나던 난 2시간만 기상 시간을 당긴다면 매일 아침 뜨는 해를 만날 수 있다는 경이로운 사실에 갑자기 아침형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사이 남편도 일어나 씻고 나왔다. 봉추찜닭을 아침으로 대령하고 남편과 대화를 나누며 밥을 먹었다. 그 시간 6시. 와~ 아침 6시에 밥을 먹다니! 남편은 평소와 달리 든든하게 밥을 먹고 모닝 믹스 커피까지 와이프와 함께 마시고 가벼운 마음으로 출근을 했다. 원래는 11시까지 출근이었는데 8시 30분으로 변경된 이후 6시 반에 출근을 한다. 혼자 일어나서 일찌감치 출근하는 것이 못내 미안했는데 오늘은 근사한 일을 한 것 같아 내심 뿌듯했다.

다시 샤워를 하고 화장을 하고 트레이닝복을 입고 산책 나갈 채비를 했다. 그리고 숨을 고르려고 소파에 앉아 잠깐 손화신 작가의 <쓸수록 나는 내가 된다>는 책의 첫머리를 읽고 있는 동안 욕실에 두고 나온 안경을 깜박했다. 그 사이 큰아들, 작은아들이 차례로 안방 욕실 해바라기 샤워기를 이용하고 있었는데 아이들이 불편할까 봐 그 틈을 노리지 못했다. 세심한 둘째 아들은 나오면서 내 안경을 가져다주었고 비로소 나는 시력을 되찾으며 산책을 감행할 수 있었다.

밖으로 나간 7시 40분경, 바깥 기온은 18도였다. 너무 이상적인 온도였다. 햇볕은 따뜻했고 바람은 선선했다. 봄!! 내가 좋아하는 봄의 지금은 절정일까, 막바지일까. 요 전 주에는 낮에 너무 더웠지만 어젯밤 살짝 비를 뿌리고 난 후 오늘은 무지 청명하고 공기 냄새도 좋았다. 초록이들도 선명하고 명랑한 발걸음들도 상냥했다. 집 앞 공원을 가볍게 산책하며 그동안 안부조차 묻지 못했던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주말에도 전화하기가 부담스러워서 못했는데 이 상쾌한 아침 모닝콜이 제격이다 싶었다. 엄마가 이 시간에 웬일이냐면서 반색을 했다. 엄마도 통화한 지가 오래되고 궁금해서 전화하고 싶었다면서. 늘 바빠 보이는 딸한테 행여나 방해되지 않을까 염려하고 배려하는 엄마라서 내 편에서 전화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늘 있는데 한 번 걸면 평균 1시간은 잡아야 하니 선뜻 하지 못하는 내게도 통화는 고충이라면 고충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처럼 한 15분 정도 만에 대화를 마친 데 이어 대화의 끝에 엄마도 지금 산책하러 나가 보라고 운동도 거들었으니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었다.

아들들이 나오는 시간까지 밖에서 기다릴까 하다가 물도 마실 겸 아이들을 보러 집으로 잠깐 올라갔다. 작은 아들은 밥을 다 먹었고 첫째 아들은 우물우물 씹고 있었다. 막 나갈 채비를 마친 둘째 아들은 엄마가 다시 나간다는 말에 그럼 같이 나가자고 했다. 다시 나가니 또다시 상쾌했다. 아침의 상쾌함을 여러 번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자전거를 타고 통학하는 둘째 아들은 내 주위를 빙빙 돌기도 하고 속도를 맞춰 천천히 가기도 하면서 엄마의 배웅을 받는 이 시간을 너무 좋아했다. 얼마간 같이 걸어가 주다가 둘째 아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뽁 하고 각자 소리 내는 입술 인사를 하고서 뒷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바라보다가 다시 천천히 걸어왔다.

아침엔 이렇게 깔끔하게 정돈돼 있구나.


이제는 큰아들이 나올 시간. 아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반대 방향으로 뒤로 걷다가 아들이 나온 걸 발견했다. 소리 나지 않게 살금살금 뛰어서 “우왕!!”하고 점프하며 아들의 어깨를 붙잡았다. 큰아들은 큰소리로 기겁하며 놀랐고 나는 깔깔거렸다. 등교를 같이 하는 바로 앞 동 사는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같이 기다려 주었는데 혹시나 친구가 늦게 나오게 돼서 혼자 가는 상황이 생길까 봐, 그러면 내가 속상해할까 봐 마음이 쓰였는지 엄마는 기다리지 말고 먼저 들어가라고 했다. 괜찮다고 말하는데 큰아들의 절친이 나왔다. 큰아들의 절친은 나를 보자마자 화들짝 놀랐다. 내가 “야야, 빨리빨리 나와야지~!! 어제는 얘가 늦고, 오늘은 니가 늦고!!” 하는 너스레에 벙글벙글 웃으며 “압~넵넵” 하고 고1 같지 않은 고1이 순진무구하게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나란히 걷는 아들들의 뒷모습을 또 바라보며 이렇게 아침에 일어나니까 흐뭇한 일들이 많구나 가슴이 벅찼다.


그리고 다시 산책을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에어팟을 가지러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별거 아닌 이런 일상을 쓰기 위해 노트북 앞에 앉았고 어쩌다 보니 시간이 많이 흘렀다. 글을 수정해야 하지만 오늘은 그냥 그대로, 그런 날도 있는 거지. 하얀 백조들 사이에 있는 검은 백조 같은 그런 글도 어차피 다 한 종류다. 꼭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는 없다.


이제 곧 에어팟을 끼고 동네 산책을 나갈 거고 그다음에 도서관에 가서 ‘심리전공’ 책을 읽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자기소개서를 써야 한다. 어제까지가 접수 마감이라 급하게 지원해 봤다. 이곳이 나에게 맞을지, 꼭 필요한 것인지,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 붙을지 떨어질지 아무것도 모르지만 일단은 도전해 본다. 그런데 면접 시간이 안 맞으면 면접을 못 볼 수도 있다. 인생은 앞을 알 수 없기에 재미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 불확실성을 즐길 수밖에. 오늘의 아침 산책은 무척 훌륭했지만 내일도 그럴 수 있는지,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 그것 역시 불확실하다. 그래서 인생은 늘 미완성이다. 죽을 때까지 미완성. 그 미완성을 즐기는 내가 되자.


나의 산책길^^ 옆 단지이지만 늘 언제고 내 것인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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