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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마더

보다는 굿 이너프 마더

by 김혜정

우리는 늘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관계를 떠난 사람은 단연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겁니다. 물욕이 넘치고 허무함 가득한 속세가 싫어 스스로 유배를 떠난 사람에게도 관계라는 것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사슬이니까요. 아무리 세상이 싫어 절로 들어갔다 해도 절에는 머리를 박박 깎은 스님들이 계시니 또 다른 관계를 맺어야 하구요. 로빈슨 크루소처럼 섬에 표류해서 혼자가 된 사람도 거기서 만나게 되는 식인종들과 불편한 관계를 맺으며 살게 되었듯이,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 저 세상 - 저는 천국으로 떠날 예정입니다만 – 으로 갈 때까지 허구한 날 관계 속에 파묻혀 머리가 파뿌리처럼 허옇게 될 때까지 사람과 부대끼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겁니다.


저는 인간관계, 대인 관계를 많이 중요시하는 사람이긴 한데요. 사실 요즘에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보다는 저 자신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데 시간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며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지금까지 어떤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왔고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었으며 앞으로는 어떤 사람들과 만나고 싶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가? 지나온 시간을 정리하고 앞으로 맞이할 새로운 시간을 어떤 모양으로 만들 것인가. 이러한 질문에 빠지지 않는 것이 ‘사람’이고 ‘관계’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말을 안 하다 뿐이지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맺는 관계 중 가장 원초적인 관계는 누구와의 관계일까요?

네~ 맞습니다. 뭐니뭐니 해도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깊은 관계는 엄마와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모두 엄마의 자궁에서 태어나 자양분을 얻고 세상의 빛을 본 후에도 엄마라는 존재의 영향력 아래서 살아가게 되니까요. 태초부터 지금까지 많은 것들이 변했지만 이것은 불변의 진리인 듯 합니다.




최근에 브런치의 <내 서랍> 中 ‘통계’를 보다가 외부 유입 키워드에 자주 반복되는 구절이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부모에게 주어진 최대의 과업은 자녀에 대한 이해와 양질의 양육이며 지금도 이 땅의 많은 부모는 아이를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는 걸 새삼 더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유입 키워드

공부하기 너무 싫어하는 아이

사춘기 말 안 듣는 아이

0~3세 아이

만 3세 애착 형성

인간관계가 좋은 삶


인간관계에 대해, 특히 아이와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시는 분들이 많으시지요. 부모로서의 역할도 더 잘하고 싶으시고 통제가 안 되거나 할 일을 스스로 하지 않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속상해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지금 이 시기가 너무 중요한 건 알겠는데 ‘도대체 나보고 더 이상 어떻게 더 잘 라고!!’ 푸념을 하면서도 새벽마다 더 좋은 방법을 찾고 계시는 부모님들. 아마 많이 성찰하고 연구하시는 부모님이실 거예요. 지금 많이 힘들지만 그래도 더 소중한 것을 지키려고 고군분투하는 중이실 거예요.


우리 모두 나를 낳아 주신 엄마와 원초적인 관계를 맺었듯이, 우리의 자녀들도 엄마인 ‘나’와 원초적인 관계를 맺었습니다. 내가 선택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듯이, 우리 자녀들도 엄마인 ‘나’를 삶의 뿌리이자 근원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죠.


우리 대다수 최고의 부모, 완벽한 부모를 가질 수 없어 결핍을 경험했고 그러한 결핍 덕분에 더 노력하고 성장해 왔 것처럼, 우리 자녀들도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은 그런 경험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부모를 바라보며 100%의 존경심을 가질 수 없고 때로는 답답하고 때로는 이해를 못 하겠고 미워하는 마음 때문에 자책하게 되고 심지어는 부모와의 인연을 끊고 싶은 마음에 괴로움을 느끼는 중년이 있듯이, 우리의 어린 자녀들도 지금 자신의 부모를 100% 존경하지 않고 있고 때로는 답답해하고 때로는 원망하며 때로는 짜증 나 하고 있는 거예요. 시간이 흘러가면 다를 것 같으신가요?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느낀 것처럼 우리 자녀들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살아갈 겁니다. 물론 정말 인자하고 자상하고 여유로운 품을 가지신 분들도 분명 있지만 그런 분들은 예외로 하겠습니다. 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완벽하지 않으니까요.


부모는 늘 최선을 다해서 잘 키우려고 노력했고 아들딸, 첫째 둘째 구별 없이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해 주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의 입장에서는 그 노력을 반 푼어치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아이들이 폭풍 성장하는 그 과정에는, 그 순간순간 아이들 마음속엔 엄마의 자리보다 다른 자리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0~3세 사이에는 부모는 손과 발이 닳을 정도로 헌신하며 아이를 보살피고 키우지만 아이의 기억에는 그 순간이 남아있을 리 없고, 자기중심적인 청소년기에도 부모는 많은 부분을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정성을 다하지만 자신의 입장만이 크고 선명하게 각인되는 청소년기에는 부모의 마음 씀씀이를 다 품어줄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서 청소년기 자녀들과의 관계에 대해 말해 보고자 합니다. 청소년기 아이는 이 세상에 적응하고 잘 살아남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집중합니다. 많은 경험을 하고 이제 좀 시야가 넓어진 어른들과 이제 막 사회로 진출하는 아이들의 입장은 분명 다른데 어른은 착각하는 경우가 많지요.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아이도 엇비슷하게 생각하고 판단할 거라 믿고 자신과 동일시합니다. 그럴수록 관계는 삐그덕거리게 되는데 어른들은 아이들이 정신적으로도 많이 성숙했다고 판단해 버리고 많은 짐을 자녀에게 떠넘기기 시작합니다. 아직 준비가 안 된 자녀는 떠넘겨진 짐을 얼떨결에 받아 안지만 아직 그 짐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그렇게 청소년기에 아이는 보이지 않는 불화의 씨앗을 품게 되고 이 씨앗을 가슴속에 묻어두기만 한 아이는 평생에 걸쳐 그 씨앗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게 됩니다. 불화의 씨앗이 맑고 깨끗한 물을 만나면 건강한 싹을 틔우겠지만 만약 물도 햇볕도 공급받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메말라 간 씨앗이라면 그건 마음의 병이 되고 우울이 되고 큰 화가 됩니다.


《엄마가 늘 여기 있을게》 저자인 대상관계이론 전문가 권경인 교수님 말씀에 의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맨 처음 만난 대상과의 관계로부터 자아가 형성됩니다. 즉 부모, 그중에서도 엄마와의 관계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죠. 엄마에게 적극적인 돌봄을 받은 아이는 안정적인 정서를 갖고 살아가게 되고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한 아이는 불안한 정서, 혹은 회피적 성향을 갖게 된다는 그 애착 관계 이론도 이 대상관계이론과 연결됩니다. 대상관계이론은 현재의 인간관계가 과거에 형성된 인간관계에서 영향을 받는다는 이론입니다.


관계형성 욕구가 가장 근본적인 인간의 욕구이다. 심지어 인간을 움직이는 가장 근본적인 추동이다.
ㅡ 마이클 클레어 Michael Clair
우리는 '과거의 모체' 속에서 살고 있다. 사람은 양탄자처럼 짜인 과거와 현재의 관계 속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ㅡ 스티븐 미첼 Stephen Mitchell


아이는 부모의 말을 먹고 자라기 때문에 어렸을 적에 반복적으로 들은 메시지가 어떤 내용이냐에 따라 건강한 자아가 형성될 수도 있고 건강하지 못한 자아가 형성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일관성 있고 긍정적이고 좋은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나는 성질이 못 됐고 자기 관리를 못하고 늘 허점 많고 부족한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죠. 그만큼 부모가 어떤 메시지를 주느냐는 자녀의 인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강조되고 반복되는 소리는 강아지를 불안하게 해요." 라고 했던 개박사 강형욱 반려견 훈련사의 말처럼, 사람도 그렇습니다. 강조되고 반복되는 메시지는 아이를 불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말과 행동, 표정 등 언어와 비언어에 녹아 있는 메시지는 아이의 심리적 구조를 형성해서 강력한 자기 표상이 됩니다.


그런데 만약 부모가 아이의 행동 중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어서 그걸 고치려고 악을 쓰거나 아이의 행동을 간섭하고 제지한다면, 그건 그 아이의 행동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아이의 모습에서 발견한 데서 기인한 것입니다. 아이는 자신의 부족한 점을 영락없이 닮아있습니다. 그런 자신의 마음에 안 드는 모습을 아이에게서 보게 되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죠. 실제로 화가 나는 대상은 아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던 건데 불똥은 아이에게 튀게 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행동은 잘 모르죠. 자기를 객관화하는 것은 매우 고차원적인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잘 보지 못하기 때문에 거울처럼 비치는 아이의 행동을 보면서 자신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걸 빨리 캐치하면 잘못된 혹은 왜곡된 자신을 빨리 바로잡을 수 있지만 계속 캐치하지 못하게 되면 자신의 잘못을 아이에게 덮어 씌우고 결국 아이만 닦달하게 됩니다. 아이는 닦달하는 엄마의 말과 행동 때문에 스스로 잘할 수 있는 일이었음에도 잘 처리하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엄마의 호통 앞에서 주눅이 들고 그것이 반복되는 패턴으로 고정되면 자신의 잘못, 자신의 부족한 모습으로 비하하게 됩니다. 결국 강조되고 반복되는 소리는 아이를 불안하게 하고 좌절하게 하는 것입니다.




제 기억 속에도 이런 일이 있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것만도 열 손가락을 꼽을 수 있을 것 같군요. 다 나열하고 싶지만 벌써 3000자가 넘어서 한 가지만 말해야겠습니다. 저는 둘째한테는 거의 그러지 않았는데 첫째 아들에게선 저의 부족한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많은 부분 닮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화가 났습니다. 재촉하고 다그치고 야단치고.. 많이 혼내고 벌주고 뒤돌아서는 울고 울면서 일기 쓰고 그랬던 것 같아요.


저는 이해력이 좋은 편이 아닙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면 한 번에 잘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부모님께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지요. 전교에서 1~2등 하고 아이큐가 당시 153으로 전교 1등이었던 오빠에 비하면 저는 이해력이 형편없는 완전 무식쟁이였어요. 그래서 집에서는 완전 똥멍청이 취급을 받았습니다. 밖에 나가면 그래도 인정받는 아이였는데 집에서는 늘 차별받는 아이였어요. 같은 영화를 봐도 오빠는 이해를 척척 잘했는데 저는 이해를 온전히 하지 못했고 학교 수업을 받아도 오빠는 척척 알아듣고 고난이도 문제도 술술 풀었지만 저는 수업 때 이해 못 한 문제를 물어봤다가 오빠한테 꿀밤을 맞은 아픈 기억이 있어요. 저는 그게 어찌나 자존심이 상하던지 니가 잘난 건 알겠는데, 왜 너까지 날 무시하느냐고 속으로 엄청 욕하고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모르는 문제를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께 진심어린 칭찬과 인정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늘 인정 욕구를 채우려고 하는 자존감이 낮은 아이였어요. 제가 낮은 자존감을 갖고 있었다는 걸 발견한 건 더 훗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였지요. 닫는 건 일순간일 수 있지만 깨닫기까지는 참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지금은 자존감을 아주 많이 높여 놓긴 했지만 우리 첫째 아들이 어렸을 땐 아직 자존감이 낮은 상태였어요. 그래서 첫째 아들이 뭔가를 이해하지 못하면 저는 처음엔 천천히 나긋나긋하게 설명해 주었지만 나중엔 화가 났었어요. 속으로, 이해력이 낮으면 안 된다고, 그러면 남들한테 무시받을지도 모른다고 두려움에 떨면서 항변하고 있었던 거지요. 그런 저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아이는 엄마의 호통에 주눅이 들었고 더 자신이 없어졌고 엄마의 말이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을 미워하게 되었어요. (아마도 미워했을 겁니다.) 이유도 잘 모른 채 자신을 미워했을 아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안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지난 2년 간 아이와 과거 이야기를 많이 하면서 사과도 하고 마음을 풀었답니다. 필요하다면 앞으로도 더 많이 사과할 예정이에요. 아이가 과거의 기억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되면 그때마다요.


억눌렸던 자존감과 자기 비하 의식은 아이 양육 과정 전체에서 자꾸 튀어나오게 됩니다. 그것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약점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죠. 좀처럼 드러내려 하지 않고 꽁꽁 숨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약점을 극복하지 못한 스스로에게 화가 나고 이제 많이 성장해서 나의 약점을 꼬집어 내는 자녀한테도 화가 나고 어렸을 때 맺혔던 한이 중년기에 다다라서 폭발하는 것이죠.


다행히도 저는 몇 년 전쯤 깨달았어요. 아이에 대한 태도가 결국은 나에 대한 태도였다는 것을요. 물론 물을 다 엎질러 놓은 후에야 다시 걸레로 물을 흡수해 그릇에 짜담으려는 뒤늦은 수습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깨달음 자체에도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요. 깨달았으니 생각을 고칠 수 있었고 생각을 바꾼 덕분에 행동을 수정할 수 있었으니까요.


이해력이 부족한 건 사실이에요. 아직도 저는 이해력이 부족합니다. 우리 큰아들도 저를 닮아 이해력이 부족한 편이에요. 하지만 이제는 그게 화가 나지는 않아요. 모르면 모르는 대로 넘어가기도 하고 어려운 얘기보다는 조금 더 즐겁고 재미난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아이가 뭘 몰라서 당황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할까 봐 이제는 노심초사하지는 않아요. 마음에 있는 거품을 뺐더니 오히려 맑아지더라고요. 아이 마음도 맑고 건강하니 주변 친구들도 아이의 순수한 마음을 좋아해 주고 유독 월등한 운동 실력을 고맙게도 다들 칭찬해 줍니다.




어제 고1 큰아들이 집에 오자마자 이런저런 학교 생활을 얘기하더니 “엄마, 근데 엄마가 좋아할 만한 희소식이 있어.” 합니다. “뭔데?” 했더니 “내가 우리 반 탁구 1:多(전원) 배틀에서 최종 1등 했어.” 합니다. 공부는 아니어도 운동으로는 1등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우리 아들을 위해 “오!! 진짜? 여기서 박수 한 번 크게 치고 갑니다~~!!”하면서 박수를 짜자작 쳐 주었습니다. 내 구령에 고1 아들도 덩달아 박수를 치고 우리 둘이는 통쾌하게 웃었습니다.


고1 같지 않은 순수하고 맑은 아들에게 높은 이해력보다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은 학평 모의고사가 있는 날이고 아들은 꽤 긴 시간을 어려운 문제들과 씨름하다 돌아오겠지요. 그리고 많이 힘들었다고 하소연할 겁니다. 그런 아들에게 필요한 건 뭘까요? “야, 공부도 안 했으면서 힘들긴 뭐가 힘들어. 그러니까 평소에 공부 좀 하랬지?!!” 일까요?

no no~~ 당연히 아닙니다. 아들에게 필요한 건 위로와 공감입니다. 다 큰 아들에게도 정서적 위로와 안정감이 필요합니다. 저는 오늘 아들에게 이렇게 말할 겁니다.


“아들아, 아침 8시까지 학교 가서 4시 반까지 어려운 문제 읽고 해석도 하고 나름대로 맞는 답 고르느라 고생 많았다. 힘들었지? 좀 푹 쉬어라~.” 그리고 꼭 안아 줄 겁니다. 아들은 여전히 안아주는 걸 무척 좋아합니다. 아직 성숙하지 못해서 그럴지는 모르지만 괜찮습니다. 어차피 여자친구 생기면 안아주지도 못하게 될 테니까요.


충분히 사랑하고 충분히 안아주고 충분히 보듬어 주는 것. 아이가 스스로 부모를 떠나 독립하고자 할 때까지 해야 할 부모의 역할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인생의 자양분이니까요. 돈도 안 드는데 우리 아끼지 맙시다!!!



맨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나의 큰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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