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것은
스토아철학의 관점에서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것은 문제 자체가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한 그들의 판단이다.” 우리는 침묵 속에서 가만히 자리에 앉아 심오하면서 동시에 너무나도 명백한 2000년 전의 생각을 받아들인다.
스토아학파는 우리의 감정이 이성적 사고의 산물이라고 믿는다. 감정은 해변에 밀려드는 파도처럼 우리에게 밀려오는 것이 아니다. 감정이 드는 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고전 연구자 A.A. 롱은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보통 아무 이유 없이 화가 나거나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 자신이 나쁜 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내 것이어야 할 성취를 다른 사람이 가져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느낀다.” 우리 생각과 행동의 책임이 우리에게 있듯 우리 감정에 대한 책임도 우리에게 있다. 감정은 우리가 내리는 판단의 결과이며, 이 판단은 틀린 경우가 많다. 스토아학파는 그런 판단이 실제 경험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꽉 막힌 도로를 상상해 보자. 앞뒤로 서 있는 차에 각각 운전자가 앉아 있다. 한 명은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서 화를 내며 운전대를 두드리고 욕을 한다. 다른 한 명은 차분하게 앉아서 NPR(미국의 라디오 공영 방송)을 들으며 얼마 전 맛있게 먹었던 로브스터 라비올리를 떠올린다. 화를 내는 운전자는 부정확하다. 이 운전자가 부정확한 것은 2 더하기 2가 3이라는 말이 부정확한 것과 같다. 삶이 지금과 다르길 바라는 것은 이성의 지독한 실패를 보여준다.
틀린 감정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살펴보자. 먼저 외부 사건(스토아식 표현으로는 “인상”)에 대한 반사 반응(“前 감정” 또는 “최초 정념”이라 불린다)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발가락을 찧으면 소리를 지른다. 도로가 막히면 욕을 한다. 자연스럽다. 어쨌거나 우리는 결국 인간이다. 이 최초의 충격은 감정이 아니라 당황했을 때 얼굴이 빨개지는 것과 같은 반사 반응이다. 이러한 반응은 우리가 그것에 “동의”할 때에만 감정이 된다고, 스토아학파는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반응에 동의함으로써 반사 반응을 정념의 지위에 올려놓는다.
이 모든 과정은 순식간에, 눈 깜짝할 사이에 발생하지만 이 중 그 무엇도 우리의 허락 없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이 부정적인 최초의 정념을 존중하고 증폭시키기를 선택할 때마다 우리는 불행하기를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스토아철학은 묻는다. 도대체 왜 그러고 싶어 하는가?
ㅡ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written by 에릭 와이너 / 에픽테토스처럼 역경에 대처하는 법, p.409~411 일부 발췌
기차 타고 철학자들을 만나러 가는 에릭 와이너(저자), 이 책 속엔 우리가 들어봤던 많은 철학자들의 사유와 저자의 독특한 의식이 담겨 있다.이 책은 작년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사실 지금 위 페이지를 읽고 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귀해서 꼭꼭 씹으며 읽었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간식처럼 간헐적으로 씹어먹다 보니까 언제 어떻게 먹었는지도 무엇을 먹고 소화했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냥, 현재 내가 읽고 있는 이 페이지에만 집중할 뿐이다. 한꺼번에 완독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 해도 이 책은 좋다. 이렇게 간식처럼 씹어먹기에 너무 좋은 책이다. 이런 책을 소설처럼 후딱 읽어버리는 것은 오히려 배설에 불과할 뿐이다. 이건 연중 내내 먹고 또 먹고, 이것저것 돌려 먹는, 내가 좋아하는 메뉴로 구성된 간식처럼 먹을 때마다 침샘을 자극하고 다양한 맛을 느끼게 하는 간헐독(間歇讀, 내가 지금 만든 말)에 적합한 책이다.
신기한 건 심심해서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 그 페이지에서 말하는 철학적 사유가 현재의 내 상황이나 심경과 너무나 비슷해서 흠칫 두둠칫하고 놀랄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철학은 언제나 즐겁다.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타로와도 같다. 내가 생각할 때 40대 중반부터 친구로 삼아야 할 대상이 있다면 그건 바로 철학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고대의 철학자들ㆍ19세기의 철학자들과의 만남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면 나는 이 책의 처음으로 돌아가 이 책을 받아 든 최초의 설렘으로 한 문장씩 또 되새김질하게 될 것이다. 희한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문장들도 많을 것이고 짬뽕되었던 철학자들의 삶과 가치관이 자연스럽게 정렬되는 느낌도 일어날 것이다. 그럴 거라는 기대가 확신이 된다.
스토아철학의 핵심 교리는 한 마디로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고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여라.”라는 데 있다.
이 문장을 보니 미국의 신학자이자 목사였던 라인홀드 니부어(1892~1971)의 이 기도문이 떠오른다.
평온의 기도
주여,
제게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을 주시옵고
제가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그리고 제게 그 둘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하루하루 살게 하시고
순간순간 누리게 하시며
고통을 평화에 이르는 길로 받아들이게 하시옵소서.
2000년을 사이에 두고 스토아철학자들과 라인홀드 니부어가 흐르는 강물처럼 이어져 있는 듯하다.
스토아철학은 초기, 중기, 후기, 세 시기로 나뉜다. 기원전 3세기 초반부터 시작된 초기에는 스토아학파의 창시자인 제논이, 1세기 로마 제국 시대에 해당하는 후기에는 노예 출신이었던 에픽테토스, 네로 황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 그리고 로마의 오현제 중 마지막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이 활동했다.
스토아학파는 “자연에 순응하는 삶”을 권고했는데 그 자연이라는 것의 의미는 우주질서의 순리와 같은 인간의 ‘이성’ 혹은 ‘이성적 생활’을 내포한다. 이성적으로 사는 삶, 곧 도덕적으로 사는 것이 행복과 자유를 얻는 방법이라고 보았다. 덕행이 행복에 이르는 길인 것이다. 냉정한 판단으로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면 내면의 평화가 유지된다.
그러나 보통의 인간에게는 떼어버릴 수 없는 비이성적인 부분인 정념(情念)이 있다. 전쟁과 패배, 불행과 고통과 같은 무질서로 점철된 인간세계에서 인간은 육체적인 욕구와 충동, 부정적인 정념의 파도에 휩쓸리곤 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에만 순응하며 살 수가 없다. 정념이 이성을 뚫고 나올 때 정념을 다스리지 못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 인간은 괴물처럼 변한다. 헐크가 된다.
이성이 감정을 통제하는 것인가, 감정이 이성을 좌우하는 것인가
이성과 감정, 어느 것이 우선이냐는 질문에는 지금 확답을 하지 못하겠다. 경우의 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기 싫어하는 아들에게는 감정을 먼저 만져주어야 하고 공부를 좋아하고 즐기는 아들에게는 이성을 건드려주어야 한다. 감정적인 사람에게는 감정적인 언어를 써 줘야 하고 이성적인 사람에게는 이성적으로 대화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가끔은 이성과 감정을 알맞게 버무려주기도 해야 한다. 물론 어떤 상황을 놓고 판가름하거나 해석할 때는 이성적으로 분석해서 옳은 결정을 내리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바꿀 수 있거나 결정할 수 일이라면 이성적 사고를 이용해서 최대한 긍정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 좋다. 정신적 건강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
스토아철학에서는 인간은 보편적으로 이성이나 감정(정념)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본다. 이는 불행이나 부정적인 감정도 우리가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얻어지는 결과라는 말이다. 핵심을 말하자면, 부정적인 감정에 압도당하지 말라는 뜻이다. 부정적인 정념을 앞세우거나 그것에 치우치면 우리의 정신은 마구 흐트러지고 더 깊은 불행의 늪에 빠져 스스로 자폭하게 된다. 흔히 우울감을 느끼거나 마음이 몹시 불안하고 찝찝할 때도 그것은 자신이 그런 감정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난 지금 불안한 상태야 라고 자신에게 생각을 주입한 이상 불안의 바다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어지게 된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유일한 것은 바로 두려움 그 자체”라는 말로 스토아 사상의 정수를 드러내는 유명한 말을 남겼고 (p.398) 말년을 맞이한 제논은 “배가 난파됐을 때 난 정말 좋은 항해를 했어.”라는 말로써 고난을 딛고 더 강해지고 성장할 수 있음을 역설했다고 전해진다. (p.401)
감정을 이성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루에도 열두 번 우린 넘어지고 쓰러질 때가 있으니 말이다. 어떤 때는 감정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지만, 아무리 떼어내려 해도 탱탱볼처럼 튕겨와 내 눈탱이를 밤탱이로 만들도 한다. 그것도 내 감정이니 그래 수용하자!! 하고 다짐해도 어느새 감정은 나의 마음을 쉐이크처럼 쉑쉑한다. 나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하지만 스토아철학을 이해한다면 우리의 머릿속에 스위치가 있다고 생각하자. 긍정의 스위치와 부정의 스위치가 있다. 버튼을 누르면 선택된 감정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자, 그럼 이제 어떤 버튼을 누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