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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

누구나 평범할 권리가 있다

by 김혜정


박완서 작가님의 <자전거 도둑>을 읽고 수업을 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중1 국어 교과서에 단골로 실리는 단편이기도 하지만 내가 수업하는 논술 초6 커리큘럼에도 실려 있어 해마다 읽고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이 한 권의 책에는 6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아이들에게 그중 가장 인상 깊은 단편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아이들은 주로 <자전거 도둑>과 <달걀은 달걀로 갚으렴>을 꼽는다.


이 이야기들이 지향하는 바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잃지 말아야 할 것들'이다. 1979년에 어른을 위한 동화로 출간된 이 책은 물질문명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진정 지녀야 할 가치는 무엇인지 묻고 있다. 이미 44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바라본 풍경이지만 뭐 하나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빈부의 격차는 더 벌어졌고 도시는 더 화려해졌으며 물질에 대한 추앙도 더욱 높아져만 갔다. 권력에 대한 욕심은 계급 간의 갈등을 더 부추겼고 인간 내면의 부도덕성과 비양심적 행태는 날마다 신문의 1면을 장식한다. 아름답고 순수한 마음과 자연의 진리는 어느새 어둠의 뒷골목으로 자꾸만 사라져가고 있는 듯하다. 씁쓸한 일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나라의 아동과 청소년의 행복지수는 어느 정도일까?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이 분석한 '2023년 아동행복지수 보고서'에 따르면 응답자 86.9%인 1940명의 행복지수가 '하'인 것으로 집계되었다. 경제적 지표는 위로 향하고 있지만 우리 아이들의 행복은 아래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아이들은 밤늦게까지 학원에 내몰리고 새벽까지 숙제와 씨름을 한다. 입시 경쟁에서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부모님과 아이들은 2인 3각으로 발을 묶고 영치기영차 힘겹게 달리고 있지만 정작 아이들은 수면권을 보장받지 못한 채 피로를 호소하고 운동 부족으로 우울감에도 쉽게 빠진다. 이는 아이들의 자유로울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다.


아이들의 생활이 이렇게 지속이 되면 어떤 심리를 갖게 될까?

아이들도 잘하고 싶어 한다. 무엇이든 잘하고 싶다. 공부도 잘하고 싶고 운동도 잘하고 싶고 인간관계도 잘 유지하고 싶다. 무엇이든 간에 잘하고 싶어진다. 왜냐하면 이것은 본인의 욕구이기에 앞서 부모님의 욕구라는 것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많은 아이들은 부모님의 욕구를 채우지 못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좌절감을 느낀다. 부모님은 자녀가 스스로 위축되거나 자신 없어하는 모습을 보일 때 아이가 자신감이 부족하거나 욕심이 없어서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런 모습은 부모님이 만드는 경우가 허다하다. 부모의 지나친 기대와 관심, 간섭이 아이들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 공부든 학교 생활이든 교우관계든 학원 생활이든 모든 면에서 대부분의 부모님은 좋은 결과를 기대한다. 특히 성적에 대해 높은 기대를 갖는 부모의 자녀는 지나치게 자신을 비하하거나 부정적인 자아상을 갖고 있다. 분명 똑똑하고 능력이 좋은 아이인데도 새로운 것을 대하거나 해야 할 때, "저는 잘 못해요. 해 본 적이 없어요. 잘할 자신이 없어요."라고 부정적인 말부터 꺼낸다.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질 수 없다는 핑계를 먼저 내놓고 보는 식이다. 이런 아이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심리적인 억압 속에 억눌린 자아가 보이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들이 힘들어하는 것은 공부나 학업 생활만이 아니다. 아이들은 갈등에 대한 합리적인 해결법을 모른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많은 타인들과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된다. 그런데 가정에서 갈등을 적절히 해결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시대가 많이 바뀌어 30~40대의 젊은 부모들도 많이 바뀌었겠지 싶지만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갈등을 지혜롭게 해소하는 방법은 잘 모르는 것 같다. 부부간에도 원활한 소통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고 60~70대 어르신들처럼 제각각 자신의 방식대로 각자도생의 삶을 사는 부부들도 많다. 나에겐 이게 하나의 question이다. 부부 간 소통의 부재, 혹은 독선적 나르시시스트인 부모의 존재. 부모가 건강해야 부모를 바라보며 성장하는 아이들도 건강하다. 아이들의 마음이 건강해야 미래 사회도 밝아지기 마련인데 내가 보기엔 아직 먼 것 같다. 부모에게서 갈등을 지혜롭게 푸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실제로 친구 관계에서 생기는 갈등을 풀지 못하고 지나간다. 요즘 아이들이 쉽게 손절(절교)을 하고 어제의 친구를 오늘 배신하는 것이나 자기만 돋보이기 위해 친구들을 희생양으로 만들고 왕따를 일삼는 행위도 가정에서의 소통의 부재나 나르시시스트인 부모를 가진 데 이유가 있다. 타인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고 익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건 자기 자신과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포기하거나 외면하는 아이들도 많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열등감 속에서 허우적거리거나 혹은 지나친 우월감으로 타인과 자신을 구별짓고 자기를 고립시킨다.


이는 비교와 경쟁이 난무하는 사회 구조 탓도 크다. 부모도 그런 사회에서 살아왔고 지금도 크게 변한 건 없다. 성적으로 아이의 가치를 평가하는 시스템 안에서는 그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저 아이는 원래 공부를 잘하고, 나는 원래 못 했다는 아이, 쟤는 노력하는 거에 비해 성적이 늘 잘 나오고 나는 밤새서 공부해도 이게 최선이라는 아이들의 푸념을 들으면 가슴이 아프다. 각자의 재능과 강점이 있으니 잘하는 걸 더 열심히 해 보라고 조언하면서도, 고등학교 가면 지금보다 공부할 분량이 훨씬 많고 어려우니 문해력부터 키우는 게 중요하다는 말로 가끔 마무리할 때 나도 참 그렇다. 사회의 평가 기준이 높을수록 아이들 자존감 더더 낮아지고 '나는 행복하다'고 떳떳하게 외치는 아이들도 점점 사라져 간다. 사회적 욕구에서 겨나가 게임에 중독되고 핸드폰에 중독되고 미디어에 중독되고 자기 자신은 점차 잃어간다. 나는 누구이고,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 스스로 꺼내 쓰는 일기장이 아니라 논술쌤이 꺼내 주는 원고지에 털어놓는다. 오늘도 힘들었지만 내일도 힘들 거라고 한다. 학교 수행평가도 많고 학원이 많을수록 숙제도 많아서. 늘 시간에 쫓기는 아이들은 숙제할 시간이 없다. 곧 시험인 아이들은 마음 쉴 곳이 없다. 옛사람들이 사회 시스템으로 만들어 놓은 학교라는 구조 안에서 아이들은 수많은 구성품이 되고 제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 오늘도 이리저리 자기 몸을 돌려 가며 큰 틀에 맞추어 본다. 이쪽이 아니라 저쪽인가, 내가 문젠가 저 틀이 문젠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삶은 다양한 것인데 말이다. 인간 개개인은 고유하다. 고유한 사람들이 다채로운 꿈을 제각각 펼쳐 나가며 자기만의 성장을 이루는 것이 인생이다. 누군가와 비교하며 열등감을 느끼고 위와 아래를 재며 자신의 위치를 가늠하는 것은 못난 행위다. 너무 잘하려고만 애쓰고 높은 결과만 바라는 것은 불행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평범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부모는 자녀들에게 평범할 권리를 가르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평범함의 중요성을 말하는 어른은 많지 않아 보인다. 자, 지금 가슴에 손을 얹고 자문해 보라. 나는 무엇이든 못하는 일이 없고 뭐든 잘했으며 실수하지 않고 특별하고 우수한 사람이기만 했는지. 내가 신은 아니지만 100% 자신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 우리는 누구나 평범하고 실수를 했으며 좌절도 하고 자기 자신에게 실망도 했다. 어떤 사람은 실패를 통해 크게 성장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우리 아이들도 알아야 한다. 누구든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것을. 그리고 평범한 것이 가장 행복한 거라는 것을. 물론 평범했던 사람이 자기 분야를 갈고닦으면 특별해지는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겪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건 나중 일이다.


그래서 나는 수업 시간에 이 얘기를 많이 한다. 자기 자신에게 너무 과도한 잣대를 들이밀지 말라고. 실수해도 괜찮고 좀 못해도 괜찮다고. 완벽함을 추구하지 말라고. 중요한 건 오늘 내가 좋아하는 일을 했는지와 오늘 행복한 시간을 보냈는지에 있다. 오늘을 행복하게 보낸 사람은 내일도 행복할 줄 아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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