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한 지인의 시모께서 돌아가셨다. 지인의 얼굴도 너무 보고 싶고 큰아들, 작은아들도 내 지인의 아들을 보고 싶어하여 그곳에 가는 길목에 약간을 에둘러 문경을 찍고 넘어갔다. 내 지인은 큰아들 유치원 친구의 엄마.
경북으로 이사간 지 4년이 됐지만 그간 만난 횟수는 고작 두 번이었다. 서로 시간 맞추기도 힘들거니와 200km라는 물리적 거리를 쉽게 넘나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보자, 보자, 말로는 올해 꼭 보자 했건만 쉽게 일을 빼거나 주일 봉사를 거를 수도 없어(지인은 거의 온종일 봉사를 하므로)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는데 이렇게 조사가 생기니 단숨에 그 거리를 압축하여 마음부터 달려가게 되었다. 반가운 마음과 슬픈 마음을 반반 섞어 서로 웃으며 다독여 주니 그간 숨었던 정이 불쑥 도드라졌다.
내일은 2시까지만 집에 도착하면 되기에 내려온 김에 아들들과 문경에서 하룻밤을 자기로 하였다. 낮에 문경새재 초입에 잠깐 들러 철철 넘치는 계곡물소리 듣고 길 위에 돗자리를 깔고 누운 많은 사람들을 보니 20년 전 남자친구였던 지금의 남편과 이곳에 왔던 기억이 돋아났다. 아득하고도 선명한 과거의 추억 덕분에, 찜통 같은 더위와 습한 체취가 청명하고 맑은 하늘에 씻긴 듯 날아올랐다.
지금은 숙소에서 쉬다가 아들들과 밤산책을 다녀왔다. 내일 오전엔 잠시 산책 삼아 새재 초입을 다녀올 생각이다.
오늘은 아들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 날이다.
아들 둘이 없었다면 선뜻 200킬로미터를 넘는 길을 내달리지 못했을 거였다. 장거리 운전은 운전 경력 22년 차인 나에게 아직도 부담이었는데 지인의 가족을 만나 위로하고 싶은 강렬한 마음과 내 아들 둘의 존재가 원동력이 되었다. 새로운 도전이 되었다.
아들들을 키우는 것이 힘들었고 그건 누구에게나 진짜 힘든 일이라고, 그래서 인정하고 위로해 줘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품어왔다. 그런 생각으로 아들을 키우는 새내기 엄마들에게 아주 작은 공감과 위로라도 건네고 싶었다. 그런데 그건 뒤집어보면 나 자신을 향한 인정과 위로였다. 남에게 하는 말이 곧 나에게 던지는 말이었다. 물론 힘든 부분이 있다.
난 자식을 키워본 사람만이 진정한 어른이라고 말해 왔다. 그만큼 고생해 보고 힘들어 봐야 어른인 거라는 뜻이었다. (물론 자식에게 큰 사랑을 받아봐야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는 거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내가 두 아들을 키운 게 아니라 두 아들이 나를 키우고 있었다. 아들들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용기를 냈고 아들들이 보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말한 것을 실천했다. "실패하더라도 포기하지는 말라, 불평불만하지 말고 늘 감사하라, 욕망만 가지기보다는 생각한 것을 실천하라, 약속한 것을 꼭 지키라"고 내 입으로 꺼낸 말들은 내가 먼저 지켜야 했다. 아들들은 지키지 못하더라도 나는 지켜나가야 했다. 그래야 아들들이 보고 따라할 수 있다는 걸 믿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난 돌덩이처럼 강해졌다. 쉽게 깨지지 않는 단단한 돌이 되었다. 아직 큰 바위가 되려면 멀었지만 우리 아들들이 다 커서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아빠가 돼 있으면 그때쯤은 바위가 되어 있지 않을까.
내가 아들 둘을 낳아 키워보지 않았다면, 어쩌면 난 여전히 너무 연약한 가지처럼 툭툭 부러지고 땅에 떨어져 누군가의 발길에 채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 낮은 자존감을 키운 건 8할이 내 두 아들이었다.
오늘 5시간 반을 드라이브하면서 정말 많은 노래를 듣고 크게 합창하며 행복감을 느꼈지만 그중 <돌덩이>를 아들들에게 바치고 싶다.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나게 해 주는 두 아들을 위해. 엄마의 시시껄렁한 말들 다 들어주고 눈 아프고 발 아프다며 투정하는 엄마를 위해 말없이 어깨를 주물러 주고 등을 두드려준 나의 다정한 아들들을 위하여.
이렇게 열일곱, 열셋이 되었다고 벌써부터 든든해질 줄은 몰랐다. 집에선 아직도 챙겨줄 것 투성이인 아들들이지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