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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정 Jan 16. 2024

부모가 상처를 주면 자녀 가슴에는 큰 구멍이 생긴다

그러면 그 구멍을 메우려고 평생을 노력해야 하지

2024. 1. 9. 화. 오후 12시 33분     


나의 방식으로 나를 만나러 간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무시를 당했던 경험이 많았다고 기억한다. 무언가를 하려고 해도 ‘너’보다는 ‘오빠’가, 무언가를 해도 ‘너’보다는 ‘오빠’가, 늘 오빠가 나보다 우선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우수한 두뇌와 높은 학업 성적으로 학교 선생님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예비 서울대생의 반열에 올라있는 오빠를 나는 지켜보며 자랐다. 오빠는 늘 반장이었고 인싸였고 과학경진대회나 수학경시대회의 입상자였으며, 보이스카웃의 늠름한 일원이자 육성회장의 아들로 학교 안팎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그런 오빠를 두고 있어서 나는 자랑스러웠고 한편으로는 오빠를 동경했다. 그렇게 오빠가 미친 존재감을 드러내며 성장했지만 그 존재 옆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졌다. 가끔은 너무 작아져서 눈이 오면 눈 속으로 파묻혀 버리고 말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엄마는 그런 오빠를 가족 중 일 순위로 자리매김하였고 모든 것이 오빠 위주로 돌아갔다. 내가 먹으려고 했던 하나 남은 바나나는 오빠를 위해 빼앗겼고 오빠가 성적표를 받은 날은 짜장면을 먹으러 갔다. 오빠는 거실에 앉아 tv를 보았지만 나는 싱크대 앞에서 설거지를 했다. 물론 똑똑한 오빠가 그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나이가 들고 성인이 되어 갈수록 오빠도 그렇게 편애당하는 것을 마뜩잖아했기 때문이다. 오빠는 자기에게 쏟아지는 부모님의 수위 높은 기대감과 그에 동반되는 실망감을 오롯이 감당해야 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 제목처럼, 오빠의 부자유한 삶의 무게를 짐작해 보면서 차라리 잘난 오빠로 인해 두껍고 뻣뻣한 열등감을 가졌던 내 삶의 무게가 훨씬 가벼웠을 거라는 사실이 지나고 나니 보였다.



오빠가 잘 다니던 한국 oooo공사를 때려치우고 바둑학원을 열고자 했을 때, 집안에 폭풍이 일었다. 아빠의 험악 무도한 반대가 시작되었다. 오빠는 새벽에 나에게 전화를 걸어 혀가 꼬부라지는 소리로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을 주절거렸다. 오빠는 술에 만취해 회사에 들어가서 회사 전화로 나에게 전화를 걸었던 걸 기억하지 못했다. 아빠의 간섭과 반대, 지나친 기대감이 오빠를 얼마나 힘들게 했을지 나는 감히 상상할 수 없다. 아빠는 오빠의 의사를 꺾기 위해서 성인이 된 아들을 두 시간 동안이나 무릎 꿇렸고 결국 당신 뜻대로 바둑의 길은 무산되었다. 끔찍한 과거다. 오빠의 인생 여정에 대해(나의 직업이나 인생에 대해서도) 진정한 대화는 나눠본 적 없지만, 오빠가 부모에게 받은 상처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오빠는 아빠에 대해 바리케이드를 쳤다. 아버지의 존재로서 가족들을 보살피고 책임을 지려고 하기보다 자식을 성공시켜 자식에게 의지하고자 하는 아빠,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모두 법이라서 아무런 대꾸 없이 절대복종을 요구했던 아빠를 오빠는 마음으로부터 거부했다. 예의범절을 비롯한 철저한 유교질서를 거스르지 못해 오빠는 아빠를 행동으로 저지하지 못했지만, 나는 나 나름대로 아빠에게 더 이상 복종할 수 없다고 4장의 편지를 썼다. 엄마 말에 의하면 아빠는 그 편지를 장롱 속에 넣어 두고 읽고 또읽고 했다고 한다. 그런 후에 아빠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송곳같던 성격이 조금씩 누그러져갔다.



성장 과정에서 오빠의 존재감으로 인해 나는 상대적으로 무시를 당하며 살았고 지금도 가끔은 엄마의 언행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을 일이 생기만, 오빠의 굴곡진 삶을 돌아보면 오빠를 위로해 주고 싶어진다. 아무 죄도 없이, 단지 좋은 두뇌를 타고났고 그 덕에 잘난 아들에 기대어 호강하고 싶어 했던 부모의 기대를 온몸으로 받아야 했던 오빠의 삶은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고행이었다. 오빠가 너무 개인주의적인 것이 참 정 없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지만,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제는 이해한다. 오빠도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여리고 나약한 자기 마음을 지키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쳤던 것뿐이라는 것을.      



내가 무시를 받았던 것은 사실 누군가의 고의였던 것은 아닐 것이다. 각자의 상황과 형편이 있고 또 그 당시의 생각이 나와 달랐기 때문일 거였다. 엄마도 나를 무시하려고 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당시 혹은 요즘도 짧은 생각에 갇혀 있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아빠가 날 무시한 적이 없었던 것은 생각해 보면 기대한 것이 없어서였다. 기대를 많이 할수록 자신의 기대를 충족해 줄 무언가를 바라게 되는 법인데 아빠는 나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를 무시했던 사람은 나에게 일말의 기대를 품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아니면 나를 동경하거나 부러워했던 사람일 수도.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언제나 타인에게 거는 기대가 있고 또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그 뒤로 따라오는 절망이나 실망감을 느낀다. 이게 다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무언가를 선망하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는지.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누군가를 선망하고 실망을 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거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반대로 누군가 나를 선망의 대상으로 삼고 나에게 실망을 하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이고. 그렇게 생각하면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 나를 무시했다는 사실조차 고마워진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타인을 무시할 필요는 없다. 이건 그저 연약한 내가 나를 지킬 방어기제인 거니까 말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2%는 부족해야 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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