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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정 Apr 20. 2024

행복하길 바라요. 숨 쉬는 순간마다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친가 식구들 서른 명 정도가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인 지가.


아마 최근 만남의 장소는 작은 할머니 장례식장이었던 것 같다. 항상 온유하시고 뭐라도 베푸려 하시고 욕심 없이 순수하게 사시면서 곱게곱게 늙으신 작은 할머니는 90대 전후에 치매에 걸리셨고 몇 년 후 요양원에 들어가셨는데 결국은 평생을 함께 산 손주들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하셨다고 했다. 아마 작은 할머니 당신 이름도 기억 상자에서 지워졌을 테지. 작은 할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한 게 모임의 마지막이었으므로 나는 작은 할머니를 가장 그리워할 당숙 가족들이 남몰래 신경 쓰였다. 당숙의 큰아들은 재작년에 성격 좋고 눈이 커다란 색시와 결혼해서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아 잘 살고 있고 키가 훤칠한 둘째 아들도 가수 뺨치게 노래 잘하고 연예인같이 예쁘게 생긴 여자친구와 내년 결혼 예약을 마치고 행복에 겨운데 그럼에도 나는 당숙이 홀로 살아가는 현실에 가슴이 에린 것이다.


나는 코스 요리로 나온 회와 큰 생선과 불고기와 튀김과 가락국수를 대충 먹고, 대각선으로 먼 자리에 등지고 앉은 당숙 앞으로 다가갔다.


"당숙~ 제가 꿈을 꿨는데 당숙이 나왔어요. 젊었을 적 모습으루여~그 동안 잘 지내셨어요?"

"어~그랬어? 그저 그렇게 잘 지내지."


당숙은 짧고 간결하게만 대답을 마쳤다. 예전 같았으면 누가 한 마디 하면 열 마디, 스무 마디를 하시던 양반인데 당숙은 언제부터 갑자기 말의 꽁무니가 짧아진 걸까.




내가 10대 초등학생이었을 때 30대였던 당숙은 말도 많고 웃음도 많고 남 골려먹기도 좋아하는 장난꾸러기였다. 당숙 장난기에 엄마 숙모 고모 같이 깔깔거리다 해 넘어가는 줄도 몰랐을 만큼. 나는 털털하고 분위기를 잘 띄우는 당숙이 좋았다. 그랬던 당숙인데, 당숙의 얼굴에 굵은 주름을 만드는 웃음과 짓궂은 농담은 디로 사라진 건.


생각해 보면, 그 시절엔 당숙 옆에 그만 좀 하라 큰소리로 다그치던 당숙모가 있었다. 그만 좀 하라는 말에는 짜증이 순도 500% 담겨 있었고, 씩씩거리는 어깨 위로 원망이 500% 실려 있었다. 원망과 짜증이 뒤섞여 머리칼 위로 모락모락 김이 피워 올랐다 식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 당숙은 하냥 그 사실을 모르고 었다.


당숙모는 당숙이 너스레 떠는 걸 무척이나 거슬려하고 싫어했다. 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경을 곤두세우고 당숙의 말에 따박따박 반박을 곤 하다. 하지만 보통 사람보다 털털함이 크고 말장난하기를 즐겨하고 사람 좋아하는 당숙은 당숙모의 본심을 그 당시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어른들은 몰랐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두 분은 이질적 소통방식으로 반복되는 싸움을 해 왔다는 것을. 명절 중이었을 거다. 내가 작은할아버지 댁 옥상에 있는 당숙과 당숙모 방에 가 있었던 어느 날, 두 사람은 우리 집에서 투닥투닥 다투었던 그 문제로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당시 초등학생이고 어렸으니 나를 안중에 두지는 않았을 터. 그러나 여전히 나에게 그 순간이 기억나는 이유는 그 입씨름이 보통의 수준을 능가한다는 느낌과 당숙이 당숙모가 화가 난 까닭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당숙모는 당숙을 떠났고 당숙은 그 이후로 술을 더 많이 마셨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얼굴색이 아예 벌그레해졌고, 가끔씩 모일 때면 당숙은 술을 많이 먹고 당숙모 얘길 술 먹은 양보다 훨씬 많이 했다. 그리움이 술잔이 되고 자책감 술을 따랐다. 그리움과 자책은 돌이킬 수 없는 현실에 망부석이 되어 그 시끄러운 노래방에서도 를 붙잡고 당숙모를 부르짖었다.


그 이후로 세월은 흐르고 흘러 당숙도 나이를 많이 먹고 작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그리움도 자책도 그림자조차 없어졌다. 가끔 난 말이 없어진 당숙 얼굴을 생각한다. 큰아들 결혼식에서 엄마 자리에 앉았던, 그리고 우리 가족들과도 너무 반갑게 인사하고 안부를 물었던 당숙모도 생각한다. 당숙의 아들들은 너무나 행복하게 잘 살고 있지만 그래도 당숙과 당숙모가 여전히 투닥거리면서 같이 늙어가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돈 잘 버는 사촌동생이 불러서 간 삿뽀로 일식집에서, 사촌동생의 딸이 돌잡이로 5만 원짜리 지폐를 집고 모두가 손뼉 치며 즐거워하는 그 시간에 나는 당숙의 옛날을 생각했고 지금의 당숙을 걱정했다.




그리고 나는 삼촌의 옆에 가 앉았고 얼굴이 벌게진 삼촌의  삶을 귀에 담아 들었다.

"혜정이 너니까 얘기하는데~"

삼촌도 지금은 힘겹게 살고 있지만, 다행인 건 언제든지 삶의 한 자락을 주루룩 풀어헤쳐 보여 줄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거였다. 삼촌은 '지금, 여기'에 만족하고 행복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주어진 현실에 감사할 줄 아는 어른이었다.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감정을 조카와 공유할 수 있는  그만큼 진실한 사람.


서로가 사는 얘기를 공중에 뿌리느라 왁자해진 홀을 이제 떠나자고 친척들이 우루루 일어났다. "가는 분위긴가 본데?" 삼촌은 하던 말의 허리를 끊고 엄마 아빠 모시고 삼촌네를 오라고 신신당부하였다. 그리고 밖에 나가서 우리 엄마 등에 대고 "형수님, 형님이랑 우리집으로 꼭 한번 오세요. 제가 갈 수가 없으니까요." 하는데, 삼촌의 등도 울고 엄마의 등도 울고 있었다. 숙모가 잘 가시라고 인사하러 와서는 우는 엄마를 보고 "형님, 왜 울어~~~."하면서 엄마를 끌어안고 같이 울었고, 고모도 다가와 "언니가 울어서 다들 울잖아."하면서 같이 울었다. 아빠의 완고한 성격 때문에 많은 사람이 울었다. 가는 차에서부터 아빠와 삼촌 간의 관계를 얘기했던 엄마는 돌아오는 차에서 아빠의 마음을 말로써 돌릴 사람은 너 뿐이라고 했다. 많은 사연이 퇴적물처럼 쌓여 가슴 고랑이 깊이 패인 것을 내가 메울 수 있을까. 아빤 너무 긴 세월을 그렇게 살아왔고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데, 내가 그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을까.

 

같은 공간에 모인 우리 친척들, 삼촌 숙모 고모 고모부 당숙 당고모 사촌ㆍ육촌 동생들..

같은 세상에서 과거로부터 지금까지의 삶의 여정에 서로 다른 궤적을 그리며 살아가지만,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갈 수도 없고 같은 크기의 행복을 누릴 수도 없다는 건 당연하지만 가끔은 슬픈 일이 된다. 


앞으로도 각자 자신의 인생에 여러 무늬를 만들며 살아가겠지만, 부디 아름답고 고운 무늬를 만들어 나가길, 그리고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길, 슬프기보다 행복한 날들이 훨씬 더 많길 기도하고 기도한다.


행복하길 바랍니다. 우리 친척 모든 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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