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에 누워서 <빵굽는 타자기>를 허공에 들고, 미국의 대문호 작가인 폴 오스터가 갑판 위에서 보냈던 젊은 날의 초상을 묘사한 부분을 읽고 있다. 내 옆에는 작은 아들이 30분 넘게 갖가지 모양의 타자기를 두드리는 영상을 보면서 동시에 침대 옆에 있는 서랍장 위의 레트로 진짜 타자기를 손으로 치고 있다. 타자기를 칠 때 나는 소리가 너무 좋다면서 타자 치는 유튜버를 구독한다. 침대 아래 바닥에는 큰아들이 누워서 핸드폰으로 고양이 영상을 이것저것 보다가 나에게 와서 너무 귀엽지 않냐고 묻는다. "나는 고양이는 별로 안 좋아해, 아주 작은 새끼 고양이만 빼고."라고 대답한다. 아까 바베큐 파티를 할 때 왔던 치즈가 귀엽다고 하더니 고양이 삼매경에 빠졌나 보다. 키우자고 하는 건 아니겠지. 주방에서는 남편이 이쁜 보라색 고무장갑을 끼고 금방 우리 모두가 먹은 라면 냄비와 그릇들을 부시럭거리며 설거지하고 있다. 남편의 노동을 즐겁게 해 주려는 듯, 어떤 여가수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자기야, 그 노래 부르는 가수는 누구야?"하고 내가 묻는다. 남편은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답해 준다. "테일러 스위프트" "응~ 그럼 그 노래 제목은 뭐야?" "올 투 웰"
나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켜고 테일러 스위프트를 찾아본다. 피아노를 치면서 부르는 라이브곡을 튼다. 노래가 좋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테일러 스위프트라는 가수는 배우처럼 이쁘다. 수많은 관객들에게 둘러싸여서 테일러 스위프트는 푸른 바다 위에서 순항하듯 듣기 좋은 음색으로 노래를 부드럽게 뽑아낸다. 기분이 좋아진다. 남편이 설거지하면서 말하길, 그렇게 편안하게 노래 부르기 위해 테일러 스위프트는 러닝머신 위에서 달리면서 열창하는 연습을 한다고 한다.
나도 헐떡거리지 않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걸 떠올린다. <빵굽는 타자기>를 쓴 폴 오스터도 이 책에서, 젊은 날 닥치는 대로 글을 썼다고 했다. 나도 너무 닥치고만 있지 말고, 닥치는 대로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그런데도 일상에 치여서, 가만히 앉아닥치는 대로 쓰지 못하는 시간만 쌓여가는 형국이란.
밤이 늦어 온통 사방이 깜깜해졌지만 비가 그쳐 있어 아이들과 남편이 밤산책을 나간다고 한다. 같이 가자고 나를 설득하지만, 나는 글을 쓰고 싶다면서 혼자 있길 원한다. 10분 지났을 뿐인데 그새 들어온다. 좀 더 길게 다녀오지 못하고 이렇게 빨리 들어오는 건 남자들끼리여서 그런가. 내가 나갔다면 3배는 오래 있었을 텐데. 심심한 남편이 갑자기 티비를 틀자 이 아름다운 공간이 소음으로 가득 찬다. 무심하게 한 마디를 던진다. "역시 시끄러우니까 글이 안 써지네." 남편이 쿡 하고 웃더니, "그럼 티비 꺼줄까?" 한다. "아니, 괜찮아."라고 대답하지만, 친절하게도 남편이 티비를 끄고 타자기가 놓여 있는 테이블 아래쪽에 있는 라디오를 틀어준다. 발라드곡이 나온다. 분위기가 이렇게 달라지다니. 우리 네 식구가 원룸 펜션에서 이 밤 시간에 이렇게 낭만적이고 고즈넉한 적이 있었던가. 펜션은 여기저기 많이 다녀봤지만, 여기는 참 좋다.
남편의 휴무 여부가 늦게 나온 관계로 어렵게 잡은 펜션이었지만 침대가 하나밖에 없다는 걸림돌만 빼면 유럽 풍의 인테리어와 창 밖으로 바로 바다가 보이는 풍경으로 마음에 설렘이 가득 들어찬다. 미적 감각이 없는 나에게 이 펜션의 곳곳은 하나하나 영화 속 장면이고 크고 작은 소품들은 살아 움직이는 것만 같다. 오래됐지만 타닥타닥 하고 움직이는 타자기가 과거를 말해주고, 침대 헤드 천장 가까이 터놓은 깊은 창문 선반 위에 있는 소품들과 트럼펫이 살아 숨 쉰다. 남편 키보다 키가 작은 화장실 문은 어서 들어오라고 열려 있고, 좁은 화장실의 천장은 유리창으로 뚫려 있어 낮에는 태양광을 흠뻑 받아 준다. 좁은 화장실 공간에서 손님들의 편의를 위해 변기를 직각이 아닌 사선으로 설치해 놓은 것은 주인 분의 엄청나게 세심한 배려다.
화장실과 침실을 가르는 벽에는 진녹색의 페인트가 거칠게 칠해져 있고 그 반대편 벽에는 십자수로 수놓은, 인상주의 그림으로 보이는 작품이 큰 액자에 담겨있다. 벽에 달린 조명과 벽 조명, 협탁 위에 놓인 조명이 모두 다 소품인 듯, 우리가 머무는 이 작은 공간을 각자의 위치에서 은은하게 비추어 준다. 역시인테리어의 완성은 조명이다.
이 펜션 밖 마당에는 초록 잔디가 넓게 펼쳐져 있고 아기자기한 소품들도 즐비한데 가수 에일리가 뮤직비디오를 찍었다더니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이 밤이 지나고 내일 아침이 되면 비가 완전히 그쳐서 초록 잔디를 명랑하게 밟을 수 있기를. 신의 은총으로 햇살이 한 줌 내려와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깊은 이 밤, 발코니 창문을 굳게 닫았는데도 파도 소리가 거칠게 들려온다. 쓰아와아아 크아와아아 촤아와아아 촤아아아...
바닷소리 밤바다 소리, 바람에 부딪히는 나뭇잎 소리, 끼룩거리는 갈매기 소리 들으면서 일주일 간 더 여기서 머물러 본다면 어떨까. 혹시 갑자기 막 작가되고 그런 건 아니겠지?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