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젬 위에 누워 안마를 받고 있던 남편은 안마가 끝나면, 며칠 전 보고 왔던 분양 아파트에 대해 조금 더 의논을 해보자고 운을 띄웠다. 3년 후에 옆동네에 6900세대가 들어올 예정이고, 우리는 그중 가장 먼저 분양을 시작한 한 아파트 모델 하우스를 며칠 전 둘러보고 온 참이었다.
남편은 안마를 끝내고 화장실을 한 바퀴 다녀온 뒤 식탁 앞에 앉았다. 나는 생각날 때만 적는 가계부용 일반 줄노트를 안방 방바닥에서 들고 나와 식탁 위에 펼쳐놓고 숫자들을 나열하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부터 이게 우리한테 현실성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자고. 그러니까, 계약금 10% 중에서 1000만 원은 지금 있는 걸로 충당하고 나머지 6천만 원은 우리가 대출을 받아야 되는 상황이지. 그다음엔 중도금이 7천만 원씩... 그러면 7천만 원을 6번 내야 되고, 나머지 잔금 30%는 나중에 들어갈 때..."
아파트 분양가는 34평에 6억 7천에서 7억이었다. 분양가 상한제가 적용돼서 그나마 7억을 훨씬 웃돌지는 않는 상황이라지만, 5년 전에 31평을 4억에 분양받은 우리에게 7억이라는 숫자는 감각되지 않는 수였다. 그럼에도 그 7억이라는 감각되지 않는 숫자를 내 것으로 만들어 보자는 투지가 솟아오른 것은 여태껏 우리에게 빚이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4억이었던 우리집도 갑작스러운 부동산 호황에 비행기를 타고 9억까지 치솟았고 그게 내 돈은 아니지만 누군가 수익을 실현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에 부풀어 오르는 대리만족을 느꼈던 나였다. 물론 부동산 안정화 정책에 의해 지금은 그 거품이 확 사그라들었지만 말이다.
대출은 늘 우리와 함께 했고 대출 덕분에 내집을 장만했으며 대출할 용기 덕분에 나름의 수익도 창출한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의 우리집도 나쁘지 않지만 옆동네에 들어올 어마어마한 인프라를 생각하면 이건 또 하나의 기회가 아닐까 하는 기대감이 자꾸 나를 유혹했다. 그래서 대출금을 줄이기 위해 이 집을 팔고 전세로 갔다가 입주 시기에 들어가는 방략을 남편에게 이야기했었다.
이곳에 아파트 대단지가 분양될 거라는 정보를 전해 준 소식통은 남편이었다. 그때 남편은 운전을 하면서 "이 쪽이 엄청 개발되겠어~."라고 흘리듯 말했었다. 나는 그 말을 흘리지 않고 귀에 담았다. 악착같이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고 쏠쏠한 정보들을 주워 모았다. 청약통장도 들여다보니 2만 원이 부족했다. 곧바로 남편한테 얘기하고 최소금액보다 조금 더 채워 넣었다. 그러고선 그 아파트 청약은 어떨지 의견을 구했다. 남편은 "알아서 해~."라고 했다. 헐, 알아서 하라고? 오케이. 나의 레이더는 바쁘게 돌아갔다. 시간에 촉각이 곤두섰다.
아파트 정보나 향후 시세 및 전망, 지하철 개통 등 교통 인프라, 전세로 머물 아파트의 시세 등 알아볼 것들이 많았다. 나의 여유 시간은 빡빡하게 쓰였다.
그런데 남편은 다음 날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생각해 봤는데, 나는 글루 옮기는 건 좀 싫어."
싫다고? 갑자기? 괜찮다며, 알아서 하라며!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아니 그러면 처음부터 생각을 좀 더 해보겠다고 하든지, 반대 의사를 표현하든지 해야지 내가 한참 알아본 건 뭐가 돼? 뭐가 싫은 건데?"
"그냥 그 상황에 맞춰서 뭔가를 더 힘들게 해야 되고 대출이자 갚느라 쪼들리는 것도 싫고..."
하... 그 생각은 처음부터 할 수는 없었나? 내 말을 너무 건성으로 들은 건 아닌가? 나는 좀 서운했다. 내가 행동파라는 걸 아직 모르는 건가? 나는 서운함을 털어놓았다. 상대방이 내놓은 결론 자판기가 너무 느리게 작동한 것과 너무 일방적이었던 것에 대해서. 상의를 원했을 때는 나 몰라라 뒷짐을 지고 있다가 갑자기 툭 치고 펀치를 날리다니, 좀 무례한 거 아닌가. 서운함은 약간의 분노로까지 변질되었다.
나의 행태를 보며 아이들은 뭐하러 다른 곳으로 갈 필요가 있느냐고 했다. 지금 여기도 좋다고 했다. 대출도 아직 다 안 갚았으면서 무리하게 비싼 집으로 가는 것은 부담이지 않냐고 했다. 내년이면 대학 생활을 시작할 큰아들의 말이 귀에 와서 박혔다. 본인의 등록금도 부담이 될 텐데 하면서 우리의 가계 상황을 걱정하는 큰아들 말이 어쩌면 나보다 더 현실적이었다.
그러게. 왜 갑자기 그렇게 꽂혔을까? 우리 아파트도 남들이 부러워하고 산책할 때마다 최상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최고의 아파트고, 이제는 편하게 조금씩 대출금만 갚아나가면 될 텐데. 왤까? 왜일까? 왜 넘의 아파트에 욕심이 생겼을까? 이건 분명 욕심이 맞는데. 살짝 혼란스러웠다. 내 욕심은 어디로부터 왔을까.
남편의 거절 멘트에 당혹했던 나는 그래, 내 욕심이 맞았다고 실토했다. 내가 무리한 생각을 혼자 했다고 했다. 대장 아파트와 인프라를 향유하고 싶었던 건 내 내면의 취약함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내 욕심은 나의 취약함으로부터 왔다. 그리고 상의를 할 때는 조금 더 진지하게 받아주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남편은 자기는 생각을 정리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같다고 했다. 화해는 미지근했고 내 입안은 텁텁쌉쓰름했다.
나는 분양 아파트에 대한 생각을 거두었다. 부부가 합의하지 않은 일에 대해 혼자 궁리할 필요가 없어졌으므로. 당연지사. 하지만 훗날 분양받을 일이 있을지 모르니 모델 하우스만은 같이 구경을 가보자고 했다. 남편은 그러겠노라고 했고, 우리는 모델 하우스를 구경하고 왔다. 그 시점을 전후로 남편은 분양 정보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여기 역에 어떤 지하철이 들어오고, 단지의 총 세대가 어떻고, 분양가가 어떻고, 내가 이미 다 했던 말들을 도로 나에게 뱉고 있었다. "그건 내가 이미 해줬던 말이잖아." "그래, 그러니깐."
뭐가 그러니깐이야. 내가 말할 땐 제대로 안 듣고 혼자 알아보니까 정보가 신선하게 느껴졌나 보지?
김이 팍팍 새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집 쿠쿠 밥통도 지금 추에서 김새서 밥맛이 없구만, 당신의 말도 밥맛이 없구려. 자꾸만 뒷북을 치는 남편에게 부아가 났다. 남편은 어느새 긍정적으로 검토를 하고 있었다. 왜 그럴까. 왜 남편은 자꾸 손바닥을 뒤집는 걸까. 또다시 혼란스러웠다. 남편은 내 생각대로 한 번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3년 후 입주 시기에는 그곳이 이 지역에서 으뜸가는 곳이 될 것은 자명하고 분양가 상한제의 반동으로 가격도 상승하리라 기대하는 것이 나 혼자만의 무리한 생각은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자는 취지로 세라젬에 누워 나에게 상의를 제안한 것이었다.
나열한 숫자는 분양 아파트 옵션 및 확장비, 취등록세, 이사 시 부동산비 등이었다. 양도세는 남편 말과 다르게 낼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우리가 모르는 건 중도금을 일부만 대출받을 수 있느냐 하는 거였다. 집을 팔고 전세를 사는 동안 중도금을 처리하고 중도금을 낼 수 없는 시점부터 대출을 받을 수 있나. 이게 불가능할 것을 감안해서 중도금 전체를 대출받는다면 이자만 2000만 원이었다. 이것저것 비용이 이자 포함 5000만 원에 가깝다면 이건 무리다. 고로 우리에게 가능한 방법은 집 팔고 임시 전세 살기, 중도금 일부만 대출받기였다. 우리는 이게 가능한지 알아보기로 했다.
여기까진 합의가 되는 분위기였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엎치락뒤치락했지만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니까. 충분히 생각은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집에 이사를 오고 그래도 지금 자산이 많이 늘어난 것은 당신의 성실함 덕분이라고 치하했다. 남편의 고생이 없었다면 어디 다른 아파트를 넘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실 지금 우리의 경제적 상황은 예전만 같지 못하고 뻑뻑하고 힘들어졌다. 그래서 돈 얘기는 예민하다. 미래는 불확실하고 그 불확실성에서 오는 불안감은 우리를 압도한다. 그런 불안 때문에 어쩌면 나는 다른 대상에 화살을 던져보고 싶었던 것이다. 화살을 던져 놓으면 다시 그 화살을 줍기 위해 열심히 뛰어야 하고 그렇게 뛰는 동안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달리기 실력도 향상되고 활 쏘는 실력도 같이 성장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승부수를 띄워 놓고 더 빡세게 일해서 일말의 달콤한 열매를 수확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현재의 상황은 크게 바꿀 수 없지만 불확실한 그러나 내 마음속에서는 확실한 성공의 미래는 내가 거머쥘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을 단단히 하고 있었다. 착각은 나에게는 기대요, 희망이다. 눈에 뻔히 보이는 성공 신화다.
하지만 우리에겐 1.5억이 없다. 그 돈이 없어서 그림의 떡으로만 감상해야 한다. 남편도 혀를 찼다. 1.5억만 있었다면 이렇게 재고 계산할 일은 아니었을 텐데. 돈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했다.
중도금의 일부를 대출해 준다는 건 생각하면 할수록 불가능한 일인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아예 중도금 전체 대출을 기준점으로 다시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도 열심히 이자내면서 그래도 이렇게 모은 거 아니냐는 내 말에 남편은 갑자기 발끈했다.
"그게 얼마나 힘든지 알기나 해?"
헉. 갑작스러운 전개였다. 남편이 그동안 얼마나 힘든 걸 참고 감내해 왔는지 속사포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돈을 한창 잘 벌었을 때조차 자기는 정신적으로 너무, 아니 제일 힘들었다고 했다. 남편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그때는 아이들이 한창 클 무렵이었고 나는 남편이 돈만 벌기보다 가정에 충실한 남편이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남편의 월급 통장에 앞자리가 바뀌었을 때도 기쁨의 환호를 보내주지 않았고, 그보다는 집안일을 분담하지 않는 남편을 원망했다. 대화를 하지 않는 부부는 부부가 아니라고 설파했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각자도생으로, 각자 살아가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우울의 언저리에 있었고 남편과의 심리적 거리도 가장 먼 상태였다. 그런 나에게 월급 앞자리가 무슨 대수였겠는가.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은 서로 이만큼 큰 차이가 있었다. 남편은 돈 잘 버는 자기를 칭찬하고 인정해 주길 원했지만, 나는 경제적 풍요보다는 마음의 풍요가 더 중요했다. 그때를 회상하며 남편은 울먹였고 나는 사과했다. 그래, 나도 정신적으로 힘들었지만 당신 역시 많이 힘들었구나. 그때의 당신을 이해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 내가 너무 내 입장만 봤었지.
남편의 하소연을 듣고 더 이상은 분양 아파트 청약을 진행할 수는 없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앞으로 대출 이자를 갚기 위해 꾸역꾸역 일하고 생활비에 쪼들리며 살고 싶지 않다는 진심이 다시 한번 불거져 나왔다. 그래, 맞다. 누군가에겐 활쏘기가 열정을 불태울지는 몰라도 누군가는 화살 때문에 손이 찢기고 맘이 찢기는 고통을 당하리라. 남편은 활을 잡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럼 왜 안 하겠다고 하던 걸 다시 하겠다고 한 거야?"
"자기가 거기로 가면 더 행복할 것 같다고 하니까, 맞춰 주려고 한 거지."
그래. 그랬구나. 어쩌면 본인도 알아보는 도중에 욕심이 샘솟았을지 그건 모르겠지만, 내 행복을 위한 거였다고 하니, 그래 믿자. 내 행복을 위하는 당신을!
손바닥은 두 번 뒤집혀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고, 미래의 대장 아파트 부락은 우리에게서 멀어졌지만, 그동안 나눈 대화의 굴곡과 타협과 화해의 과정은 의미가 있었다. 넘의 아파트는 멀어졌지만 당신의 마음은 나에게 더 가까워졌으니까. 당신의 실룩거림은 진실한 울림이었고 나는 그 진심을 뒤늦게나마 이해하고 위로해 줄 수 있었으니까.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다. 우리 남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