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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실

한강 작가의 빛과 실을 따라

by 김혜정



오늘 오후 또 그렇게 햇살이 좋았다.

바람은 가을처럼 시원한데 하늘 중앙에서 내리쬐는 뜨거운 해가 겨울의 온도를 데워주는 그 느낌이 좋았다.

교회 가는 길. 이런 날씨엔 집안에 있는 것은 아깝다. 한낮의 온도가 아깝고 파아란 하늘이 아깝고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 텁텁한 공기 속에 갇혀 있을 내가 아깝다.



둘째는 친구 일곱이랑 롯데시네마에서 영화를 보고 있고

첫째는 소파에 벌렁 누워, 밤에 있을 F1 경기를 낮부터 기다리는 참이다.

남편은 작아지는 살림살이를 복구하기 위해 머나먼 타 지역으로 출강을 나가 있어

첫째에게 호수공원으로 산책을 가자고 꼬드겨 봤지만 실패했다.



그렇다면 나도 그냥 집에서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볼까. 설거지통에 가득 쌓인 그릇들을 말끔히 씻기는 10분 안에 결정이 났다. 서점에 들렀다가 찜질방에 가자.



사실 12월 5일 금요일은 내 생일이었다. 금요일은 내 수업이 늦게 끝나는 날이고 남편은 토요일에 새벽같이 나가야 하는 날이어서 외식하기엔 부담스러웠다. 집에 들어가는 길에 내가 피자를 픽업했고 우리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 시작했다.



둘째가 아빠의 얼굴에 대고 물었다.

"케잌은 사 왔어?"



사슴처럼 놀란 남편이 의자에서 총알같이 벌떡 일어났다. 먹던 피자 조각을 접시에 내려놓고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그럼 그렇지."

미리미리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 덕에 본인만 빼고 나머지 가족은 깔깔거리고 웃었다.



생일 선물은 내가 정했다. (늘 그렇듯이.) 남편한테는 한 달 전에 속옷 세트 선물을 받았고, 아들들에게는 책 선물을 받기로 했다. 꼭 생일에 맞춰서 받지는 않는다. 그즈음에 생각하기 시작하고 내 결정이 끝나면 아이들이 책값을 지불한다. 이번에는 뭘 살까 고민하다가 한강 작가의 작품을 사 보기로 했다.



아직 한강 작가의 작품을 한 권도 읽어보지 않았다. 단지 아껴두는 마음은 아니었다. 약간의 두려움이 있었다. <소년이 온다>는 광주 민주화 운동을, <작별하지 않는다>는 세월호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운 탓이었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그즈음에 MC 김창완이 한강 작가를 인터뷰한 영상을 봤던 것도 선입견을 갖게 한 하나의 동기였다.


김창완이 말했다.
"아, 이거를, 어떻게 이걸, 읽어?"
한강 작가가 웃는 얼굴로 말한다.
"(고개를 저으며) 읽지 마세요. 예. 괴롭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네."
"그 뒤로 가면은, 너무, 어, 너무, 어우 너무 쫌 끔찍해. 어떻게 그런 상상을 할 수가 있어요. 암만 소설가라도 그렇지."
"끔찍하고 불편한 건 사실인데요. 이게 이제, 세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인데, 한 번씩 다시 나와요. 그만큼 중요한 장면이고요."



김창완은 소설을 다 읽었지만, <채식주의자>의 마지막 장면은 너무 끔찍해서 낭독조차 하기가 꺼려진다고 말했다. 이 얘기를 들었을 당시 난 그런 끔찍한 장면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한강 작가에게는 개인적으로 미안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런 소설을 그때는 읽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내 마음엔 끔찍하고 불편한 장면까지 수용할 공간이 한 평 정도 생겼다. 그리고 한강 작가의 문체는 어떤지, 서술 방식이나 시점의 설정은 어떤지도 궁금해졌다.



1시간을 걸려 9권의 책을 구입했다. 책들을 품에 안고 한 권 한 권 읽을 생각을 하니 정서적 포만감이 뇌 안에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찜질방에 <빛과 실>, <채식주의자>를 가져갔다. 그리고 그중에서 <빛과 실>을 먼저 읽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이 요동치는 일은 없었다. 편안했다. 소설을 써 내려가는 동안 한강 작가는 어떤 루틴으로 지냈는지, 어떤 마음이었는지, 소설을 탈고하면 어떤 기분인지, 그다음 계획은 어떻게 정하는지, 소설을 쓰기 전 영감은 어떻게 받는지, 메모는 어떻게 하는지, 어떤 생각이 어떤 작품을 만드는지, 그러한 과정들이 너무나 편안하게 이해되었다. 노벨상 수상작가에 대한 과한 경외감이 들기보다는 오히려 파자마 바지를 입고 화장기 없는 긴 단발머리의 작가가 또박또박 한 음절씩 뱉어내는 모습이 그려져 친숙하고 자연스러웠다. 솔직한 일상의 모습이 좋았다.



차분한 걸음걸이, 세심한 몸짓. 느리지만 뾰족한 감각. 그녀는 어떤 인생을 살아온 걸까.

누구에게나 잘 알려진 한 사람을 나는 이제야 만난다. 그리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비로소 궁금하다.




<빛과 실>을 읽으면서 작가와 나 사이에 공유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1. 식물 이야기


<빛과 실>의 후반부는 집안의 정원에서 키우는 식물들에 관한 이야기이자 일기였다. 그녀도 식물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다. 그러나 집안에 수목을 키우고 싶은 소망이 있다. 수목을 키우다 보니 뜻하지 않게 불두화에 응애가 생겼다. 응애를 없애기 위해 약국에서 살충제를 샀다.


나는 오늘 낮에 이 좋은 날씨를 어쩌지 못해 어디를 가면 좋을까 궁리하다가 서울식물원까지 검색했다. 식물을 좋아하는 남편과 어느 휴일에 꼭 한 번 가야지 했다. 엄마의 인테리어 기념으로 남편이 엄마 집으로 작은 식물을 주문해서 보냈다. 우리 집에 있는 몬스테라와 고무나무 두 그루. 엄마는 기뻐했다. 그러나 몬스테라에 뜻하지 않게 응애가 생겼다. 나는 살충제를 주문해 주었다.



2. 네 살의 기억


그녀의 첫 기억은 네 살 무렵부터 살았던 집에서 시작된다. 그 집에도 자그마한 마당이 있었다.


나의 최초의 기억도 네 살에 있었던 일이다. 그때 우리 집에도 자그마한 마당이 있었다. 나는 그 집 대문 앞에 놓인 돌계단에 앉아 강아지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내 옆에 앉은 갈색 강아지를 쓰다듬느라 고개를 옆으로 돌린 나의 머리칼은 등허리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 장면이 내 기억 속엔 없지만 사진이(과거가) 나의 네 살을 기억하게 해 준다. (현재의 나를 만든다.)



3. 끄적이고 싶었던 마음


그녀의 여덟 살에는 이쁜 시를 썼다. 여기저기 끄적여놓았던 시들을 추려 모아 스테이플러로 찍어 시집을 만들고는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졌다. 여덟 살 아이가 사용한 단어 몇 개가 지금의 자신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 주는 金실처럼.


그녀의 경지를 따라갈 수는 없지만 나는 열두 살 때부터 일기를 썼다. 그 한 해에는 일기장 묶음이 여덟 권이나 됐었다. 사소하고 소중한 추억들, 내 생각의 잔재들이 고스란히 묻어 있을 그 일기장을 지금 펼쳐 볼 수 없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다. 그 시절의 단어가 나에게 金실이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내 일기장도 지금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4. 집에게 말을 거는 사람


그녀는 집을 나서면서 자기도 모르게 '금방 올게'라고 말했다. 열다섯 평 대지에 딸린 열 평의 집을 자기 명의로 장만한 첫 집이다. 그래서 더 애틋하다. 애틋한 마음이 곳곳에 서린다.


나도 5년 전에 내 명의로 이 집을 샀다. 처음으로 장만한 집이다. 그래서 애틋하다. 지금은 너무 지저분해져서 미안하지만, 그래도 코로나 때 이 집에 머무는 시간만큼 마음이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때 이 집에게 편지도 썼더랬다. 너를 언젠가 떠날 생각을 하는 나를 본다면 니가 얼마나 슬프겠나 하고.






작가의 시선에 내 마음이 포개어질 때 느껴지는 감정. 그걸 뭐라고 해야 할까. 뭐라고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그런 친숙함과 편안함, 공감을 느꼈다. 그래서 대단한 작가인가 보다 하는 그런 생각도 들고.



<채식주의자>를 읽고 있는데, 다른 책들도 아까운 마음으로 읽을 것 같다. 읽으면서 빨리 읽히는 게 아까운 그런 마음. 다 읽어 버리고 나면 심장이 쿵 하겠지만, 그 여운이 빨리 사라질까 봐 벌써부터 아까운 마음. 그런 마음이다.



올 겨울은 할 일도 많지만, 한강 작가에게 흠뻑 빠져서 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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