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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돌이표를 마침표로

소주제 완결

by 김혜정

내 방식을 인정하고 나니 심플해졌다.

따지고 드는 습관은 가히 분석적일 수는 있었지만, 상대방을 피곤하게 하고

공격적으로 들리는 말투는 나를 보호할 수는 있었지만, 상대방을 궁지에 몰아넣게 한다는 걸 비로소 인정하니 그제야 상대방이 보였다.




뒤돌아 보면 따지고 드는 거나 공격적으로 말하는 건 내 오래된 습관이었다. 어떤 상황이나 누군가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방어기제였다. 나는 연약했지만 그 연약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스스로 어떤 궁지에 몰리지 않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발뒤꿈치로 땅을 밀어내며 버티고 서 있었다. 나를 안전하게 잡아주고 지탱해 줄 누군가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나는 혼자 서서 버텨야 했다.


세상이 살기 어렵다고 느끼면서 혼자 서서 버티는 건 무지막지하게 외로운 일이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고 의지하고 싶었다. 결혼을 한 것도 남편이라는 존재에게 기대고 싶고 의지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남편은 그런 대상이 되어주지 못했고 그래서 나는 더 외로웠다. 친정 식구들도 시댁 식구들도 그 어떤 누구도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결혼 생활 19년을 포함한 내 인생이 그랬다.


하지만 결혼 19년을 꽉 채우고 나서 나는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대학원에 다니면서 심리를 배우고 상담을 배웠다.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갔고 일하랴 공부하랴 자식들 키우랴 너무 바빴다. 2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 시간 안에 내가 배운 것과 깨달은 것을 글로 담아둘 시간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 2년은 나에게 큰 선물을 남겼다.


내가 받은 선물은 이것이다. 나는 좀 더 차분해졌고 좀 더 천천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조금 천천히 말하기 위해 뜸을 들이다 보니 말하기 전에 이 말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들릴까를 생각할 여유를 갖게 되었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대화를 할 때는 그럴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또, 내가 내 감정을 알아차리게 되었고, 내가 느낀 순간의 감정을 말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그 뜨겁거나 차가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 무턱대고 윽박지르거나 공격하거나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분노의 이면에 똬리를 틀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두려움'이라는 걸 상담심리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되고 나선 두려움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사람들이 큰 소리로 화를 내고 분노하는 건 무언가가 두렵기 때문이다. 내가 내 마음속의 감정의 형태를 제대로 알고 나니 이제는 감정을 어느 정도는 다스릴 줄도 알게 되었다. 왜 그렇게 난 감정에 무디었던 걸까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 부정적인 감정을 처리하는 방식을 배우거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그저 꾹꾹 눌러서 참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깨달음도 어찌 보면 늦었지만 늦으면 어떠랴. 이제 나를 더 이해했으니 다행이지.


그래서 나는 대화를 하는 중에 올라오는 감정도 스스로 알아차리게 되었고, 남편과 산책을 하면서도 여러 가지 감정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남편도 나처럼 감정을 꾹꾹 억누르고 살아왔던 사람이라 내가 이렇게 표현하는 과정에서 그 말하는 방식을 배워갔다. 나는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부드러운 말투로 "자기 생각은 어때? 자기감정은 어때?"하고 물어봐 주었고, 남편도 2년 전쯤엔 잘 표현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자기가 먼저 자기감정을 아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신사가 되었다.


우리는 점점 다양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과거의 상처와 아픔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털어놓게 되었고, 미래에 대한 걱정에 대해서도 서슴없이 솔직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각자 자기의 어머니에 대해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도 진정성 있는 대화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전에 이런 진지하고 깊은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과 비교해 보면 이건 세상이 뒤집힐 일과 맞먹는 거였다. 나는 새로운 세상을 살게 되었다. 작은 일에도 감탄을 잘하는 편이긴 했지만, 이제는 남편이 겪고 있는 일에 대해서도, 남편의 기쁨과 걱정과 두려움에 대해서도 장단을 맞춰 춤추는 와이프가 되었다.


이제는 대화가 쳇바퀴를 돌지 않고, 수박 겉핥기를 하지 않는다. 대화의 초점은 안에 있고 우리는 그 초점에 집중할 줄 안다. 그런데 대화가 진심으로 이루어지니, 단지 대화만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남편은 좋아하는 여자 연예인을 보며 기쁨을 감추지 않게 되었고, 영상을 보면서 우리 아들들 앞에서도 춤을 추게 되었다. 가족을 위해 먹을 음식을 만들어 주고 아들들의 마음을 물어봐 주는 친절하고 자상한 아빠가 되었다. 물론 마음이야 예전부터 있었겠지마는, 지금은 그 마음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사람은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성격도 변할 수 있고, 성품도 변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런 믿음처럼 나도 많이 변했고 남편도 많이 변했다. 특히 남편은 말이 정말 많아졌다. 우리 아들들은 자주 놀란다. 아빠가 이렇게 말이 많았냐면서.^^




우리에게 일어난 변화 가운 데 가장 중요했던 건 '대화의 방식'이었다. 일방적인 대화가 아닌 쌍방의 대화. 내가 던지면 당신이 받고 다시 나에게 돌려주는 그런 순환적인 대화. 그런 대화가 가능해질 수 있었던 건 '감정의 알아차림'이었고 그 감정을 다룰 줄 아는 힘이었다. 그리고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까지가 중요했다. 이게 이미 잘 되는 사람은 어려서부터 감정을 주제로 하는 대화를 편안하게 해 본 경험이 있는 자일 것이다.


대화가 사실과 정보만을 가지고 이루어진다면 그건 온전한 대화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 위에 혹은 아래에 깔려 있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 그것을 편안하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온전한 대화가 되는 것이 아닐까.


지금은 내 마음이 안정을 찾았고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 것 같은 편안함을 느낀다. 그래서 감사하다. 그동안 자신을 찾으려고 애써 온 나 자신에게도 고맙고 함께 노력해 준 남편에게도 고맙다.


인생을 살면서 단 한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자기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다. 특히 나에겐 그렇다. 나를 진심으로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나는 지금 더 바랄 게 없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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