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시간의 토크
지난번 4시간의 토크를 뒤로 한, 남편의 분석적 대화라니! 황당했고 낯설었다.
진화된 건가, 학습된 건가? 아니면 고통인 건가?
4시간의 토크를 했던 날, 한창 얘기 중에 남편은 나에게 말했다.
"자기랑 얘길 하다 보면 내 목이 조여 오는 느낌이 들어."
"목이 조여 오는 느낌이라는 건 어떤 느낌이야?"
"봐봐. 지금도 그렇잖아. 내가 이렇다고 말하면,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게 아니고, 또 그 말을 파고들잖아."
"아, 그랬나?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서, 순전히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그게 갑갑하구나. 자기는."
"어. 나는 스몰 토크를 좋아하는 거 같애. 근데 자기랑 얘기가 진행되면 너무 한 가지를 깊이 파고드는 느낌이고 그러다 보면 서서히 지쳐. 힘든 거 같아."
"그렇구나. 자기는 스몰 토크를 하고 싶었던 거구나. 나는 스몰 토크만 계속할 수는 없는 사람이고. 근데 여태까지 그런 얘길 왜 안 했어?"
"안 했다기보다는... 뭐, 할 생각을 못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 우리가 대화법에 대해서 그동안 얘기한 게 얼마야. 진짜 나는 제대로 소통하고 싶다고 누누이 얘기했고 아마 그런 얘기만 10년은 넘게 했을 텐데. 10년이 뭐야. 신혼 때 빼고 18년, 19년은 맨날 똑같은 말만 반복했을 거야. 근데 이제 알겠어. 왜 우리가 서로 대화하는 게 어려웠었는지."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왔지만,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어떤 일이 있으면 그 일의 근원을 나름대로 파악하려 노력했고, 누군가 나에게 어떤 말을 하면 그 말의 진의가 무엇일지에 대해 생각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아마도 일기를 스스로 쓰기 시작했던 중학교 시절 때부터였던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 선생님과의 소통 창구로 썼던 일기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난 애당초 일기를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5학년 나의 고현자 선생님은 내가 쓰는 일기에다 7줄, 8줄이나 되는 댓글을 날마다 써 주셨고 그 일기장은 나에게 보물이었다. 엄마가 7권이나 되는 나의 귀한 일기장을 버리지만 않았어도 내 보물은 여전히 내 곁에 있을 텐데. 아무튼 일기가 누군가와 마음을 교류할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걸 경험하고 중1이 되었을 그즈음, 나는 <안네의 일기>를 읽었다. 나는 자물쇠와 열쇠가 있는 일기장을 샀고 그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기를 쓰는 것과, 어떤 일이나 말을 곰곰이 생각하는 습관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나에게 저지른 일에 내가 가히 불쾌했다고 치자. 그러면 나는 일기장에 그 일을 고해바친다. 안네에게 키티가 있었던 것처럼, 나에게도 내 일기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일기장을 뭐라고 불렀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아마 창의성이 빵 퍼센트였던 나는 안네처럼 똑같이 키티라고 불렀을 것이다. 아무튼 키티는 내 말을 들어주기는 했지만, 대답을 해 줄 입은 없었기에, 결국 나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는 건 역시 나였다. 그렇게 나는 내가 당한 부당한 일이나 하늘로 날아갈 상콤한 기분을 키티에게 고백했고, 또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나 푸념 따위도 키티에게 늘어놓기 일쑤였다. 그러니까 곰곰이 생각하고 그걸 글로도 쓸 수 있었던 게 다 일기장 덕분이라는 거다.
그러다 보니 키티를 가장한 나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굉장히 자연스러워졌고, 키티를 가장한 나 자신에게 스스로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면서 살아오게 되었다. 조금 중한 일이 있으면 그 문제에 대해서 파고들어 생각했고 그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분석하고 결론을 도출했다. 그리고 그 결론에 따라 행동하도록 나를 종용했고 조금씩 크고 작은 성과를 이루어냈다. 물론 모든 일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닌지라,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후 성적이 떨어지면서 키티와 많이 멀어졌는데, 어쩌면 키티는 너무 어린 상태에 머물러 있고 나는 훌쩍 컸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바쁜 고딩 시절을 지나고 돈 벌어 학비를 대야 했던 대학 생활을 지나고 직업 전선에 뛰어들어 학원 강사 일을 해치우는 동안 키티는 버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고서 다시 키티를 소환하게 된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일이었다.
여기서 잠깐) 흥미로운 대학 생활부터 해서 다사다난한 연애와 그중 한 놈과의 결혼과 출산을 하기까지 나의 파란만장한 일기는 가슴에 묻어 두었다. 일기란 게 꼭 글로써만 존재해야 하는 게 아니다. 젊은 청춘의 시절은 나의 기억 세포에 오롯이 남아 있다. 기억 세포 중에서도 특히나 아주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세포는 연애 세포란 놈인데, 나는 여전히 20대의 연애 세포를 간직하고 있다는 말씀!을 잠깐 남긴다.
아무튼!
나는 서른한 살에 아이를 낳고서 정말 대화할 사람이 필요했다. 아니, 아이를 낳기 전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작은 스프링 노트에 아이와 대화하는 일기를 썼다. 9개월을 썼고 초음파 사진을 붙였다. 둘째 아들 때도 그랬다. 임신 일기에 내 마음과 다짐과 내 몸상태와 희망찬 미래를 썼다. 그간 입체로 변한 초음파 사진도 붙였다. 다행히 아무도 임신 일기를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30대 중후반이 되었을 때 나는 나의 새로운 인생 2막을 준비하기 위해 일기를 썼고 나 자신과 대화했다. 그 과정에 남편은 없었다. 부모도 없었고, 진정 나를 이해해 주는 친구도 없었다. 오직 나 자신만이 나를 이해해 주었고 그래서 나는 나를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오롯이 혼자 하는 대화가 10년 동안 지속되었다.
나에게 전화를 거는 사람들은 거의 다 자기 문제를 호소했고,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그들의 속상한 마음을 겉으로나마 위로해 주고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제대로 짚어서 해결책까지 제안해 주면 나의 임무는 끝이 났다. 특히 문제를 해결할 때 필요한 건 분석력이었다. 앞뒤 맥락을 잘 파악하고 상대의 의도를 꿰뚫어 볼 줄 아는 능력이 필요했다. 나는 어느 정도 그런 것을 잘 해내고 있는 것 같았다. 돈도 안 받고 해 주는 '위로 N 문제 해결 서비스'는 나의 효능감을 고취시켜 주었고 스스로 존재감을 느끼게 해 주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신념 또한 점점 커져갔다. 이렇게 10년을 보낸 후 나는 한 가지 큰 사건을 겪게 되고 내 인생의 트라우마를 남기게 된다. 타인의 사생활을 침해할 수 없어 자세히 쓸 수는 없지만, 이 문제는 내 인생 최대의 위기였고 한편으로는 내가 살아온 방식의 반전을 꾀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래서 나는 결론을 내리기로 한다.
먼저 나부터 살자.
트라우마를 겪고 나자 일기를 쓸 수 없었다. 나 자신과 대화를 할 수도, 그 누구와 대화를 할 수도 없게 되었다. 나는 침잠했고 엎드려졌다. 트라우마 기억이 솟아오르면 까무러치게 두려워지고 얼굴에 경련이 일어났다. 좋은 감정들이 달아났고 평소처럼 다시 돌아오게 하는 데는 노력이 필요했다. 사람이 꺼려졌고 나 스스로 물러났다.
그 무렵은 코로나 시국이었다. 마침 찾아온 코로나는 나를 철저히 혼자로 지내게 해 주었고 나는 혼자가 편했다. 사람을 만나면 하이톤으로 인사하던 밝은 나는 어두운 그림자로 돌아섰다. 그래도 좋았다. 어둠이어도 마음만 편할 수 있다면.
그렇게 코로나 시국 중 브런치를 만났고 내면의 아이도 만났다. 나의 내면을 알고 싶고 복잡성을 띠고 있는 나의 성격을 해부하고 싶어 상담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했다. 대학원에서 공부하는 동안 많은 것들을 깨달았고 집단 상담 경험을 하면서 내가 내 감정에 접촉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 감정을 억제하고 차단해야 내가 살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더욱더 이성을 갈구하고 있었다.
심리치료에 있어서 내담자의 마음 상태를 잘 이해하려면 제대로 분석하는 것도 중요했기 때문에 나는 더 집요하게 굴었다. 남편과 대화할 때도 자꾸 남편의 마음에 대해 질문을 했고 상태를 점검하려 했다. 그 행동의 의미는 무엇인지, 그 말에 담긴 마음은 무엇일지 따져 물었다. 따지는 말투로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남편이 불쾌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남편은 조여 오는 느낌을 받고 있다고 했다. 내 머리는 순간 띵 했다. 내가 내담자를 대하듯, 남편을 대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4시간의 토크를 한 날은 내가 전문 상담사님께 상담을 받기로 한 바로 이틀 전이었다. 나는 남편과의 대화법에 대해 이야기를 할 거라고 얘기했고, 그 주제로 얼마간 대화를 나누고 있던 참이었다. 남편은 내가 이 주제로 상담을 받겠다는 말을 듣고서야 본심을 털어놓았다. 반은 반가웠고, 반은 떨떠름했다. 함구하고 있던 입을 이제야 열다니, 이건 무슨 의미로 받아들여야 해?
나는 이 날 남편과의 4시간 토크를 통해 남편이 나의 분석적 대화에 지긋지긋함을 느끼고 있다는 걸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리고 특히 남편을 대상으로 하는 분석적 대화가 대화를 무너뜨리는 결정타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4시간의 토크 끝에, 그런 류의 대화를 하지 않기로 합의해 주었다.
오래전부터 습관처럼 이루어졌던 나 혼자만의 대화가 타인을 그릇된 방식으로 이해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타인은 나의 소크라테스식 질문법에 몹시 피곤했고 거북해 하고 있었다. 아무리 나에게 가치로운 대화법이라 할지라도 타인에게 무익하고 목을 조여 오는 고통이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다. 남편은 깊이 생각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라 자꾸 방파제를 쌓고 있는데도 나는 조금이라도 생각할 수 있도록 그 방파제를 허물려고 애썼다. 그래야 쌍방향 소통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일찍이 존경받던 고대 소크라테스의 질문법은 오히려 일방적인 대화를 만들었고 남편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나는 남편을 학생의 위치로, 내담자의 위치로 놓고 자꾸 입을 열라고 재촉했던 것이다.
남편과의 적절한 소통이 그나마 가능해졌던 것도 코로나 시국이었다. 나는 남편과 산책했고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했다. 깊은 대화라 해봤자 일상적인 일과 그에 대한 판단 나부랭이를 늘어놓는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남편은 딱딱 대답하지도 않았고, 딱딱 반응을 해주지도 않았다. 대화는 겉돌았고 나만 혼자 떠들다가 나 혼자 기분 나빠지는 일이 반복됐다. 대화를 마칠 때면 언짢아졌고, 집에 들어오면 찝찝했다. 나는 남편이 자신의 생각을 꺼내는 걸 어려워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잘 이끌어주면 남편도 유창하게 자기 생각을 잘 말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은 어렸을 적부터 지나치게 폐쇄적인 가정 환경에서 살아왔고 중학교 때 상경해서 자취를 하면서 학교를 다녔는데 그런 삶이 그에겐 지옥같았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늘 혼자였고, 말할 상대가 없이 철저히 고립되었다고 했다. 내가 남편을 만났던 학원이라는 직장에서도 남편의 입이 뻥긋하는 일은 전달 사항을 말할 때밖에 없었다. 워낙 말이 없었고 말을 조리있게 할 줄 몰랐다. "자기 생각은 어때?" 하고 물었을 때 곧바로 대답하는 일은 최근 3~4년 안에 이루어진 쾌거였다. 내가 18~19년 동안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굽히지 않고 꾸준히 질문한 쾌거.
이것이 남편의 생각에 대해 질문을 많이 던져왔던 이유라면 이유다. 남편도 꿀먹은 벙어리가 약간 유창한 연금술사로 변모하기까지 나의 노력에 영향을 받았다는 걸 인정했다. 물론 내가 먼저 "내 노력이 가상했다."고 우쭐댔지만, 남편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적 사실이었으니.
하지만 이 날 알고 보니, 남편은 자기에게 던지는 질문에 불쾌함을 느끼고 있었다. 결론을 도출하고자 하는 내 방식을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남편의 말에서 '지긋지긋함'이 느껴졌다. 남편은 분석적 대화가 꼭 나쁘지만은 않다고 말했지만, 본인이 원하는 방식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혼자만 즐거운 대화도 의미 없지만, 자기만의 방식으로 대화하는 건 오히려 폭력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그동안 대답하지 못해서 우물쭈물하면 나는 속이 터져라 묻고 상대방의 답까지도 도출해 주려 노력했지만, 그래서 남편이 먼저 자기 얘기도 꺼낼 줄 아는 사람이 되었지만, 분석적 대화라는 것이 종국에는 너와 나의 좁혀지지 않는 간극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적 사실도 인정해야 했다. 아무리 노력이 가상해도 무의미한 건 무의미할 뿐이었다. 나는 나로부터 물러나야 했고, 내 방식을 고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