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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돌이표를 마침표로

감정보다는 이성적으로 살아가기

by 김혜정

엄마의 전화였다.

"전화했어? 오빠랑 통화하느라고 전활 못 받았네."


나는 단잠에서 깨어 흐리멍텅한 기분으로 흐리멍텅하게 대답했다.

"어~ 그랬어?"


엄마는 흐리멍텅한 내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말했다.

"잤냐? 이 대낮에?"

"어, 좀 피곤해서. 엄마가 전화 안 받길래 잠깐 누웠다가 잠들었네."


30분만 자고 나면 청명한 눈이 되어 맑은 하늘을 바라볼 수 있겠지 하고 슬쩍 청했던 나의 오후 낮잠은 그렇게 순식간에 끝나고 말았다. 아쉬움이 몰려왔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었으니 어쩔. 태세를 전환할 수밖에. 내가 잠든 시간이 10~15분이니까 남편한테 얘기한 30분 타임리밋을 맞추려면 15~20분 정도 통화하면 된다.


그러나 아주 긴박한 상황이 아니고서 엄마랑 15~20분을 통화한 적이 있던가?


엄마는 생애 최초로 처음 해보는 집 인테리어에 대한 여러 가지 고민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빠에 대한 이러쿵저러쿵한 이야기, 인테리어 업체와 나눈 이야기, 인테리어 추가 사항에 관한 이야기, 오빠가 한 번도 안 온 데다 아직 김치냉장고 액정화면 수리 접수도 안 했다는 이야기, 날씨가 너무 무더워서 더 이상은 일을 하기 어렵다는 이야기 등 늘 반복하는 얘기들 위에 인테리어에 대한 고민들이 얹혔다.


대답을 하고 질문을 하고 다시 대답을 하는 동안 내 마음은 점점 조여들었다. 엄마의 고민거리들에 대한 해답이 나오지 않으면 통화가 끝나지 않을 거라는 생각, 무한히 반복되는 카세트테이프가 이번에도 고장나지 않고 제대로 작동하리라는 생각, 그렇게 되면 내가 제시한 타임리밋을 지키지 못하게 될 거고 나는 또 남편한테 미안해질 거라는 생각, 패턴을 바꾸고 싶지만 패턴을 악착같이 고수하고 있는 사람은 어쩌면 나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맴맴 돌았기 때문이다.


약속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지킬 줄 아는 그 시간이라는 놈은 늘 그렇듯이 재깍재깍 자기의 본분을 지키고 있었다. 시곗바늘은 돌고 돌아 시침을 한 칸 이동시켜 놓았고, 나는 1시간 9분이 되어서야 폰 종료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나는 남편이 컴퓨터 작업 중인 작은아들 방으로 가서 호기롭게 외쳤다.


"자기야~!! 이제 나가자!!"


남편은 주섬주섬 핸드폰을 챙기고 내 뒤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엘베 앞 복도에 나온 남편을 마주 보고 섰다.

"오래 기다렸지. 미안해."

"......."

남편은 말이 없었다. "나가기 싫은 건 아니야?"

"어~ 아니야."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으면서 남편은 아무 감정이 없는 말을 툭 하고 던졌다.

안 그래도 더운 공기가 더 텁텁해졌다.


주말이었는데도 엘베를 탄 다른 사람은 없었다. 엘베는 느리게 느리게 우리를 1층으로 데려다주었다.

밖에 나가니 더운 공기가 무거운 바람을 타고 콧구멍으로 훅 들어왔다. 흐읍. 코를 속으로 막아야 했다. 6시쯤 됐으니 조금은 시원해져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후텁지근했다. 1시간을 기다리게 한 대신 시원한 바람을 몰고 왔다는 어설픈 핑계조차 댈 수 없었다.


남편은 신호등 앞에 서서 물었다.

"왜 엄마 말에 하나하나 모든 걸 해결해 주려고 해?"

"......."

더운 공기가 내 숨을 방해했던 것처럼, 남편의 말 한마디가 내 입술의 문을 막았다. 뇌의 움직임이 둔탁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해결이라...

해결...

그동안의 대화에서 많이 등장했던 단어였다.


'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면서 살아온 사람이다.'

내가 많이 강조했던 말이었다. 저번 4시간의 장시간 토크에서도 했던 말. 그런데도 남편은 아직도 모르는가보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 질문 하나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차라리 남편이

"엄마 얘기 들어주느라 힘들었겠네."라는 문장으로 바꿔서 말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그 이후에 이어진, 장황하고 쓰잘 데 없이 길고 지리멸렬한 대화로 서로의 기분이 좀 더 잡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남편의 질문에 알맞은 나의 생각과 입장과 이유를 속이 시원해질 때까지 답해야 했다.


* 나는 처음엔 엄마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한 게 아니라 들어주려고 한 것이다.

* 엄마가 고민하는 것들 중 해결하고 싶어 하는 것이 있었다.

* 엄마와의 대화는 늘 1시간은 걸린다.

* 나는 중간에 전화를 끊는 걸 잘하지 못한다.

* 그건 일종의 거절이라고 생각한다.

* 내가 정말 바쁜 상황이 아니라면 나는 먼저 전화를 끊지 않는다.

* 이번에도 그랬다. 엄마가 나한테 말하려고 하는 게 있다면 들어줘야 하지 않겠나.

* 만약 오늘 안 들어주고 지나간다 해도 앞으로 언제든 또 그래야 할 날이 올 텐데.

* 어쩌면 이건 일종의 숙제가 아닐까. 마음에 쌓여 있는 숙제.

* 나도 왜 이런 의무감을 갖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고도


+ 나는 어렸을 때부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면서 살아왔다. + 그래서 나의 감정에 귀를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 그렇게 감정을 꾹꾹 누르면서 사느라 내 감정에 접촉을 잘하지 못했다.

+ 이제는 내 감정을 알아차리고 또 알아주면서 살려고 노력한다.


는 얘기를 덧붙여 하느라 우리는 집 앞 공원을 열두 바퀴를 돌았다.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마음을 터놓을 사람이 없었다. 그때부터 집안 분위기가 극도로 나빠졌고 부정적인 감정이 눈덩이처럼 커져갔지만, 그냥 안으로 삭혀야 했다. 나는 감정을 세밀하게 느끼는 아이였는데, 그걸 알아주고 이해해 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아마 그때부터 나는 살아남기 위해 내 감정을 나 자신과 공유했던 것 같다. 일기를 쓰면서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리고 약한 감정으로 세상을 사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채찍질하면서 나를 혹독하게 단련시키기 시작했다.


나에게 닥친 일은 스스로 해결하자. 느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

감정보다는 이성을 중심으로 살아가자. 감정을 앞세우면 나약해지고 말 것이다.


감정이 약해빠지면 무너질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한 건 엄마였다. 엄마는 너무 감정적이고, 아빠는 이성적이었다. 둘이 말로 싸우면 늘 지는 건 엄마였다. 아빠는 싸울 때는 부르르 떨었지만, 싸움이 끝나고 나면 그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신경을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어찌 보면 태평했고, 뒤끝이 없는 듯했고, 더 중요한 건 나를 힘들게 하지 않았다는 거였다. 하지만 엄마는 싸울 때마다 sos를 쳤고, 하소연을 했고, 뒷담화를 했고,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했고, 감정을 추스르지도 못했다. 나약한 엄마는 자꾸만 비틀거렸다.


이런 엄마와 아빠의 극단적인 성향 중에서 나는 엄마의 성향을 버리기로 했다. 물론 아빠의 성향이 마음에 드는 거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엄마처럼 살다가는 홧병이 대물림될 수 있겠다는 생각, 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평생을 속 끓이며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차라리 좀 더 냉정하고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게 살기는 편할 것이다. 그리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고, 내가 나 자신을 보호하는 방패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살다 보니 그렇게만 살 수는 없었다. 감정이 훅 치고 올라왔다. 트라우마 기억이 옆에서 훅, 괴로운 기억이 안에서 훅훅 튀어올랐다. 그럴 때마다 는 속으로 소스라치게 놀랐다.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르는 건, 그건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세상은 올곧은 정신만 붙잡고 살아가기도, 하나의 성향만 갖고 살아가기도 어려운 곳이었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면서 마음의 평정을 지킨다는 건 아무나 하는 일은 아니었다.


내 안에서 울리는 내 목소리를 분간하는 것도 그랬다. 어떤 목소리가 "잘하고 있어, 괜찮아." 라고 말해 주면, 이에 질세라 어느새 나타난 다른 목소리가 외쳤다. "너 왜 그랬어~. 다르게 할 순 없었어? 좀 더 잘할 수는 없었냐?"

"이성적으로 판단하자. 그게 최선이야.""어떻게 사람이 이성적으로만 살 수 있니. 마음이 다치잖아. 나도 상처받는다고."

내가 모르는 동안에도 내 생각과 마음은 팽팽하게 맞섰다.


엄마와의 대화에서도 그랬다. 엄마의 고민과 하소연을 들어주는 건, 꼭 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고, 이제는 조금씩 거리를 두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제는 그만 두고 싶은데, 너무 지쳤는데, 그런데도 단호하게 거절할 수는 없었다. 왜일까.




남편은 내 말이 의도치 않게 길어지는 데 당혹감을 느끼는 듯했다. 좀 짜증도 나는 것 같았다. 잘 듣다가도 이해가 안 가는 지점에서 말을 끊었다. "아니 근데~~" 하면서 깊이 따지고 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목소릴 높여 화내는 투로 말하기도 했다. 남편과 나 사이에서 논박이 오고 갔고 남편은 유난히 내 말을 파고들었다. 나의 주종목인 "분석적 대화"를 마음먹고 시도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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