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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과 유다가 함께

by 김혜정


나는 크리스천이다. 아주 독실한 크리스천이라고까지 자신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꿈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믿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꿈의 암시 또는 상징성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꿈의 해몽이 맞아떨어진 경험이 많다.

며칠 전 아침에도 정신없이 꿈을 꾸다 알람 소리를 듣고 번쩍 정신이 깨었데 이것도 뭔가 의미심장하다.

이건 기억해야 돼!


‘시로몬’과 ‘유다’가 함께...


내가 꾸는 꿈의 형태는 대체로 6가지로 나뉜다.

1. 현몽 : 꿈속에서 일어났던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꿈으로, 예지몽이라고도 한다.

2. 역몽 : 꿈과 반대되는 현상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꿈이다.

3. 계시몽 : 예지몽과 구분하기가 애매하나, 그야말로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미래에 대한 길을 제시받는 꿈이다. 이런 꿈을 꾸게 되면 인생이 180도로 돌변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4. 자각몽 : 수면자 스스로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지각한 채 꾸는 꿈이다.

5. 실몽 : 예상치도 못한 일들을 꿈꾸고 깨어난 후에도 꿈의 스토리를 기억하는 꿈을 말하는데 좋은 꿈과 나쁜 꿈을 점치는 것이 이에 해당된다.

6. 심몽 : 평소에 마음속의 생각이나 소원하는 일들, 남에게 전해 들은 일, 전에 했던 행동 등이 나타나는 꿈이다.

이 중에서 내가 꾸는 꿈은 계시몽이나 심몽이 많다. 이번에 꾼 꿈은 뭘까. 계시몽에 가까운 것 같다. 시로몬이 뭐지? 유다는 성경 인물인 건 알겠는데...

검색 결과, 시로몬이라는 이름의 인물은 없었다. 그런데 ‘시몬과 유다’로 짝지어진 구절은 여럿 발견되었다. 와, 역시 성경 속 인물이었네. 그들은 예수님의 사도들 중 10번 째, 11번 째 제자로 기록되어 있었다. 마지막 12번 째 제자인 가룟 유다(제사장들에게 은화 30전에 예수를 팔아 넘긴 인물)와는 다른 인물이라는 설명도 있었다. 시몬은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간 것이 인연이 되어 예수를 숭배하게 된 인물이고, 유다는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양식을 구하고자 애굽(이집트) 땅으로 내려갈 때 형제들 가운데서 지도력을 발휘한 인물이라고 했다. 그럼 이 꿈의 의미는 뭘까?


이 꿈은 해몽이 없다. 하나님의 계시를 무속인이 해석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므로 오로지 신앙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일단 유다가 가룟 유다가 아님에 감사했다. 시몬은 예수님의 고행을 도왔고 유다는 힘든 가나안 사람들을 도왔다. 공통점을 뽑아 보자. 둘 다 도왔다는 것이다. 힘든 사람을 도왔다.


꿈 속 주인공은 큰아들이었다. 세 명의 여학생들과 우리 큰아들, 이렇게 네 명이 나에게 수업을 받고 있었다. 처음 보는 조합이었다. 평소 내 수업 방식대로 아이들은 저마다 발표를 했는데 앞의 세 여자 친구들은 자신이 공부한 어려운 내용을 속사포처럼 말로 술술 풀어냈다. 거의 래퍼 조광일 수준이었다. 내용이 복잡하고 어려웠으므로 각자 설명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마지막 순서는 큰아들이었다. 내용을 보니 역시 복잡했다. 신문지에 있는 글씨처럼 빼곡한 글이었는데 선으로라도 그어 주지 않으면 해석조차 안 될 것 같았다. 혹시나 너무 당황했을까 봐 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하겠다고 했다. 포기할까 봐 걱정했는데 안심이 되었다. 그러고선 그 글의 첫머리를 봤는데 바로 ‘시로몬과 유다가 함께~’였다.

이 꿈을 꾸기 전날, 큰아들이 갑자기 에어팟 3세대를 사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세대교체는 왜 그렇게 빠른 건지 그 전 모델도 산 지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몸 달아 사고 나면 반값이 되는 기기를 굳이 그렇게 큰돈 주고 사려고 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기존 거는 중고로 팔겠단다. 그래 그러면 네 손 안에서 한번 해결해 봐라. 모든 과정을 스스로 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무언가 노력해서 원하는 것을 얻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테니까.


그러나 실전에 돌입하자마자 바로 난관에 부딪혔다. 갖고 있던 현금이 자기가 생각했던 액수보다 몇만 원 부족했던 것이다.

난관에 부딪혔을 때 사람의 유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적극적으로 방법을 모색하는 사람과 바로 포기하는 사람.

큰아들은 후자 쪽이었다. 실망감에 패색이 짙어졌다.


남편이 큰아들 방으로 들어가 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눴다.

며칠 전 학교에서 어떤 친구한테 무시 발언을 듣고 왔었다고 한다. 넌 그것도 모르냐는 핀잔이었을 것이다. 내심 속상했던 큰아들은 그 얘기는 숨기고 아이팟 타령만 했다. 내적으로 입은 상처를 외적인 물질로 보상받으려는 심리였던 것이다.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 우리 부부는 아이에게 그런 일은 물질로 채우려 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얘기해 주었다. 가끔 우리 큰아들은 물질욕을 보인다. 갖고 있는 물건인데도 업그레이드하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그건 단순한 물질욕이 아니라 마음속 결핍을 땜빵하려는 심리적 기제인 거라고. 결국 필요한 건 물질이 아니라 심리적 안정감이다. 보상심리다. 결국 큰아들에게 필요한 건 물질이 아니라 위로다. 너는 괜찮은 아이라고, 그 친구 인성이 못 된 거라고 한 바탕 욕을 해 주면 자존감이 회복된다. 자존감은 이렇게 휘청휘청하는 거라서 자주 안부를 물어야 한다. 넘어져 있으면 일으켜 세워 주고 쓰담쓰담 쓰다듬어 주어야 한다. 아직은 말랑말랑한 자아라서 잘 만져 주어야 한다.

아무튼 그 꿈은 이 일이 있고 나서 꾼 꿈이었다. 내가 아이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뜻일까? 단순히? 남편에게 꿈 이야기를 하다가 불현듯 생각이 났다. 꿈의 의미가. 이건 단순히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고 위로해 주는 것으로 끝나는 방법이 아니었다. 시몬과 유다까지 나왔고 이번 주일은 오랜만에 내가 교회를 가기로 한 날이었다. 그렇구나!! 아이도 교회로 인도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교회 불출석은 물론 가정예배도 2년 간 두세 번밖에 안 드렸더니 아이가 얼마 전에 자기는 이제 무교로 바꾸겠다고 선포했다. 교회 친구도 다른 교회로 옮겼고 중등부에 아이들도 거의 없어서 가는 것이 어색하기 때문이었다. 그 마음은 이해가 됐기에 별 말은 붙이지 않았었는데 교회에 가야 하는 이유를 찾았다.


내 무너진 자존감을 세웠던 곳이 바로 교회였다는 것, 아이도 부모의 말보다는 선한 영향력이 있는 성경책에 의지해야 한다는 깨달음이었다. 내가 몇 년 전 아이들한테 했던 말이 있다. “엄마는 너희들한테 유산을 물려줄 건데 그건 돈이 아니야. 돈은 스스로 벌어서 써야 돼. 그래야 자립할 수 있는 거거든. 엄만 정신적 유산을 남겨주고 싶어. 그게 바로 신앙이야. 신앙을 가지면 마음에 평정이 찾아오고 매사에 감사하고 겸손할 수 있거든. 돈만 많은 사람은 욕심이 커져서 오히려 불행해질 수 있어. 돈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이 훨씬 중요하다. 그리고 엄마아빠한테보다 훨씬 더 큰 사랑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야. 우리는 사랑으로 살아가거든. 그러니까 교회 열심히 다니자.”


물론 우리 부부의 사랑이 어찌 하나님의 사랑보다 작겠냐마는 30대 들어서 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진짜 크다는 걸 체험했었다. 그건 내 마음과 신과의 영적인 교통이었는데 사랑으로 충만해지는 느낌이었다. 든든한 내 편이었고 영원한 내 편이었다. 그래서 나는 진실로 아이들에게 이런 충만감을 느끼게 해 주고 싶다. 나는 너무 나약한 인간이라 퍼주고 퍼줘도 아이들은 늘 목말라할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20대 중반에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읽은 이후 꿈의 세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두꺼운 책을 한 권 읽고 나니 어떤 식으로 해석하는가를 대충은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기억에 남는 꿈이 있으면 나름대로 해석해서 일기에다 쓰기도 했고 남의 꿈을 해석해 주기도 했다. 뭐 정확히 맞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냥 재미였다. 그런데 신기한 건 내 해석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꿈에 대해서도 아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인간적으로는 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지만 신앙적으로는 아무래도 널 끌어줘야 할 것 같다고.




어제 부활절이라서 교회에 갔다.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큰아들 교회 선생님께 문자가 왔다. 부활절이라서 계란을 전해주려 하는데 큰아들을 만날 수 있겠냐고. 중간고사 대비로 학원에 가 있을 거라고 답문자를 드리면서 최근에 친한 교회 친구도 교회를 옮겨서 어색한 마음에 더 못 가는 거 같아 죄송하다고 덧붙였다. 뜻밖의 답문자가 왔다. 그 친구가 엄마를 잃고 아빠, 형이랑 다른 교회를 다니고 있다고. 마음에 큰 도끼가 내리 꽂혔다. 목사님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다시 살아나시는 장면을 설파하고 계신데 그 친구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억장이 무너졌다. 눈물이 흘러 천장의 샹들리에를 바라봤다. 참을 수 없는 콧물까지 마스크 안을 가득 채우도록 내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다.


하.. 이렇게 부활절 날 이런 소식을 듣다니.. 그 친구의 얼굴이 눈물 사이로 흔들렸고 얼굴도 모르는 그 친구의 형과 아버지도 보였다. 하.. 우리에게 신앙이 없다면 이렇게 아픈 일을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집에 오다가 턱을 못 보고 넘어져 무릎에서 피가 났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었다.


나는 아들의 길잡이가 돼 주어야 할 것만 생각했다. 하지만 아들 말고도 더 많은 사람을 붙잡아 주어야 할 것 같다. 아들도 이제 다른 사람을 붙잡아 주고 위로해 주어야 할 사람이 되었다. 시로몬과 유다처럼 예수님의 제자로서 남을 도왔듯 서로가 서로를 품어 주어야 한다. 유튜버로서 활동하고 있는 그 친구, 평소에 자기 신념이 강했던 친구라서 앞으로도 잘 해내겠지만 그래도 믿음의 동역자는 필요하지 않겠나. 집에 와서 큰아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퉁퉁 부은 눈에서 또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아들이 말하길,


아, 그래서 그랬구나. 인스타에다가 얼마 전에 "엄마 보고 싶다."고 썼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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