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수요일, 밤 10시 30분 정각이 되면 어김없이 <나는 솔로>가 시작되지만 학부모님의 상담 전화로 시청이 잠시 딜레이 되고 20분 정도 앞부분을 놓쳤다. 아쉬운 마음 가득 안고 침대 위에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안방 TV에 시선을 꽂기 시작. 오늘도 인기녀 옥순은 바쁘다. 근데 에이~ 영호 저러면 안 되지~ 말발만 세다고 좋은 게 아니야, 사람은 진심이 중요한 거지. 오~ 우유부단할 줄 알았던 정숙이 영호의 (본심 아닌 듯한) 어장 관리 행동을 단도직입적으로 지적해 주네. 캬~
흐뭇하게, 통쾌하게, 행복하게 유일한 본방 사수를 실천 중이었는데 말이다. 갑자기 “에엥~~~~!!”하는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TV에서 난 소린가, 우리 집에서 난 소린가. <나는 솔로>에서도 가끔 사이렌 소리가 나므로 순간 헷갈렸지만 사이렌이 나올 타이밍은 아니었다. 우리 집임을 확신하고 방문을 열고 나가 보려고 하는데 작은아들이 놀란 걸음으로 성큼성큼 와 있었다. 큰아들도 공부하다 말고 나와 있고 남편은 마스크를 끼고 허둥지둥하고 있다.
“사이렌 울린 거야?” 느긋하게 묻는 내 물음에 남편은 “그렇게 안일하게 있을 때가 아니야~” 하면서 빠른 동작으로 엘리베이터를 호출한다. 그리고 아들들에게 얼른 나오라고 하고선 먼저 부랴부랴 나간다. 내가 생각할 땐 분명 오작동이었다. 왜냐~!! 만약 진짜 불이 난 거였다면 이미 울린 사이렌과 경보음이 중간에 멈추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편은 “그렇게 안일하게~ ”라는 말을 남기고 나간 뒤였지만 나는 차분하게 창밖의 위아래를 먼저 살펴보았다. 29층에서 머리를 밖으로 쑥 빼고 쳐다보는 건 심장과 맞바꿔야 할 일인지라 기린만큼은 못되고 거북이 목만큼만 내밀어 위아래를 훑었지만 어디에도 연기가 나는 곳이 없었다. 아들들은 아빠의 '안일하게 있을 때가 아니라'는 말과 엄마의 “이건 경보기 오작동이야, 괜찮아, 별일 없어~ 관리 사무소에 사람이 없는 시간이라 방송은 못 해주나?”라는 말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면서 밖으로 나가지는 않고 이미 쓴 마스크도 벗지 않은 채 그냥 서 있었다. 만에 하나 문제가 있다면 곧장 튀어 나가려는 전투태세를 갖춘 듯.
작은아들은 거북이목으로 창밖을 보고 있는 내 옆에 바짝 와서 “엄마, 뒤로 나와 봐~” 하더니 거북이 목보다 긴, 새끼 기린 목을 빼고는 위아래를 쳐다본다. 마찬가지로 아무 이상은 못 찾은 것 같았지만 마음 한켠은 불안해 보였다.
잠시 후 남편이 돌아왔다. 난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남편도 아무 말 안 했다. “가끔 오작동할 때가 있어~.” 나는 간단히만 언급했다. 그러자 곧 안내 방송이 나왔다. “잠시 사이렌과 경보 시스템의 오작동이 있었습니다.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하는 합성음성 안내 방송. 한밤중이었지만 그래도 안내 방송으로 주민들의, 특히 아이들의 불안을 잠재우고 마음의 평안을 허락해 주니 고마웠다.
남편과 큰아들은 큰아들 방으로 같이 들어가고 나는 나보다 덩치가 커진 작은아들의 어깨를 안아주며 “많이 놀랬지~. 깜짝 놀랬어? 순간 죽는 건가 보다 하고 생각했어?” 했다.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이고 날 마주 보자마자 “엄마, 이제 TV 소리 더 줄여~!! 사이렌 소리도 제대로 못 듣고!! 이제 안방 문도 무조건 열어 놔~!!” 하며 잔소리를 퍼부었던 건 엄청 놀랐다는 방증이니까 내가 느낀 것보다 이 아이는 더 많이 놀랐겠다 싶었다.
내 말에 아들은 뜸도 안 들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금세 눈물로 가득 찼다. 작은아들은 그제서야 마스크를 벗어 놓고 슬픔과 걱정과 안도가 범벅된 얼굴로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짧은 울음을 토해냈다. “엄마 침대로 같이 가자.”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 주려고 아들 옆에 꼭 붙어 앉아서 온몸을 꽉 안아주었다.
“우리 아들, 많이 놀랬구나~. 이게 생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무서웠어? 에이구~.” 아들은 자신의 심정을 얘기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냥 별 거 아닌 일이었다고 치부하고 넘겼다가는 아들의 마음속에 트라우마가 생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 아이의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뿐 아니라 앞으로 생길지도 모를 일에 대한 대처법도 진지하게 얘기해 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혹시라도 혼자 있는 상황에서 사이렌이 울린다면 얼마나 당황하고 불안하겠는가. 그러면 그 순간부터는 그토록 즐겨하고 편안해하던 혼자만의 시간이 지옥과 불구덩이 같은 공간으로 변할 터. 즐거움의 기억이 악몽으로 바뀌는 해괴한 일이 일어나는 건 일순간인 것이다. 엘리베이터에 갇혔던 경험이 있는 아이들이 한동안 엘리베이터를 거부하는 것처럼. 우리 큰아들이 5살 때 겪었던 일처럼.
난 작은아들을 품에 안고 조용조용히 얘기해 주었다. “사이렌 오작동은 가끔씩 일어나는 일이야. 아마 어떤 술 취한 아저씨가 지나가다가 실수로 경보기를 눌렀을 거야. 사람들은 의도치 않게 실수를 하니까 말이야. (아들은 경보기 위치가 어디였는지 생각했다. 아파트 복도에 있다고 했다.) 전에 살던 아파트에서도 몇 번 오작동이 있었어. (우린 6번 이사를 했다. 전세를 전전하다 이집은 2년 전에 처음으로 장만한 내집이다. 앞으로 오래오래 살 집이니 불안이 생기면 안 된다!!) 하지만 이 집에서 사이렌이 울리면 불안하고 두려움이 클 수 있어. 층수가 높으니까.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겁을 먼저 먹고 벌벌 떨면 이성적으로 판단이 안 돼. 그러니까 차분하게 판단하고 먼저 상황을 살펴야 돼. 의사 선생님들도 사람들이 크게 다쳐서 왔을 때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벌벌 떨면 대응을 할 수가 없잖아. 옛말에 ‘호랑이한테 물려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했던 말이 그냥 있는 말이 아니야. 정신을 차리면 판단을 잘할 수 있어. 창밖을 봤는데 잘 모르겠고 불안하다 싶으면 핸드폰을 갖고 계단으로 내려가. 29층이라 힘들긴 해도 평소에 계단 운동도 해봤으니까 충분히 가능해. 그치? 1층 가서 상황을 보고 아무 일이 없는 게 확인되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올라가는 거야.” 이렇게 말이다.
아들은 속으로 진정이 되었는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엄마의 본방 남은 분량 사수에 함께 해 주었다.
속이 깊고 감성이 풍부한 딸 같은 우리 작은아들,
이제 엄마보다 키도 커지고 체격도 손발 사이즈도 훨씬 커서 곧 엄마를 보호해 줄 것 같지만 아직은 엄마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어린 아들임을, 섬세한 관심과 사랑이 많이 필요한 아이임을 깨닫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재난이나 사고를 당해도 두려움에 압도되지 않는 길은 담대하고 침착한 마음가짐을 갖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거라는 걸 꾸준히 얘기해 주려고 한다. 물론 아무 일이 없길 바라지만.
살다 보면 예기치 않은 일들이 일어난다. 모든 일을 예측할 수도 없고 좋은 일만 일어날 수도 없고 말이다.
대부분은 닥쳤을 때 생각하고 판단하게 되긴 하지만 집에 혼자 있던 아이가 위급한 일을 당한다면 어떡할 것인가. 스스로 해결하든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든 해결할 방법을 찾아 행동할 수밖에 없지 않나. 그러니 낯선 상황이라 해도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행동하게 하고, 최선의 방법을 찾아 대처하도록 도와 주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다. 무엇보다 부모가 평소에 침착한 행동을 보여주면 더 좋고 말이다.
평소에 엄마 말대로만 살아가는 아이, 엄마가 재단한 상황에서 살아가는 아이는 오히려 위기 상황에서 처하면 올바른 대처법을 몰라서 더 위험할 수 있다. 그러니 평소에 무조건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도록 하지 말고 스스로 판단하고 소신 있게 행동하는 아이가 될 수 있도록 지지해 주는 게 어떨까. 작은 해프닝이었지만 그걸 소재삼아 글을 쓰다 보니 세월호 사건에 희생된 아이들까지도 생각이 난다.
그냥 그대로 있으면 된다는 어른들 말을 믿었지만 지금이 마지막 순간이라는 걸 직감하고 "엄마 아빠, 사랑해요~ 미안해요~" 문자를 남기며 눈물 훔쳤을 단원고 아이들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