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음 작가님의 책을 읽다가
천성적으로 겁이 많은 나는 사람 사이 기후 차이에 예민한 편이었다. 내가 그러기를 원하여 사람들은 나의 민감도를 잘 몰랐다. 나는 신경질적이라는 걸 감추려고 해맑은 바보인 척을 했다. 어차피 내가 가진 신경질적 성향이란 화를 미친 듯이 내는 형태가 아니었다. 신경질 부리지 않으려는 노력이 과해 히스테리가 솟으므로 모든 과부하가 내부로 파고들었다. (중략)
그 때문에 내가 일상적으로 행하는 말이나 행동들에는 늘 우산 같은 장치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웃음이거나 웃음을 유발하는 개그, 농담이었다. 나는 우리 모두가 전혀 웃지 않게 될까 봐 많은 이들을 먼저 웃긴 후에야 안심하는 사람이었다. 웃음을 뿌린다는 이유로 나의 뉘앙스는 건강해 보였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를 가능케 하는 것은 조바심과 초조함이었고, 나는 이따금 자신을 연료로 태우는 사람 특유의 피로감을 느꼈다. 그러니까 인파에 몸을 던지다가도 또 거기서 도망쳐 빗속을 택하게 되는 것이었다.
빗속에서 깨달은 바는 다시 희망이었다. 비로 말하자면, 창문으로 흘깃거릴 땐 몇 시간 내내 세찬 것 같아도 실은 그렇지 않았다. 어떤 비든 몇십 분의 집중 상태와 몇 분의 소강상태가 반복되었다. 그러다 보면 마지막에는 반드시 해가 떴다. 그렇다면 비가 내포하는 미래 자체가 햇살이라 봐도 좋을 것이었다. 그런 점이 인간관계와도 닮아 있었다. 어떤 사이 얼마만큼의 갈등이든 잠깐씩 햇살이 비치거나 물살이 희미해지는 순간이 존재했다. 그 사실을 수용하거나 외면하다 보면, 버티거나 보내주다 보면, 시간이 흐른 후 마지막은 어쨌든 맑음이었다.
물론 살다 보면 비가 그치듯 홀가분하게 완료되지 않는 관계들도 있었다. 사람이 만든 장마에 갇힐 때면 내가 두 다리로 달려 그 속을 벗어나면 되었다. 도망이란 넓은 의미에서 러닝이기도 하니까, 잽싸게 속력을 올려도 괜찮았다. 안전한 곳에서 옷을 말린 후에는 비를 맞은 적 없는 것처럼 산뜻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맞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