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초등 3학년을 가르치고 있다. 작은아들보다 두 살밖에 안 어린데도 왜 그렇게 애기애기한지, 속사포같이 쏟아내는 이야기들에 내 눈과 귀는 잠시도 쉴 틈이 없다.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조용한 아이든 목소리 큰 아이든 누가 질세라 연거푸 선생님을 불러대면 나는 발언의 기회를 공평히 주되 먼저 선생님을 부른 아이에게 주도권을 순서대로 부여한다.
그런데 어제는 한 녀석이 뿔이 나 있었다. 이미 다른 친구에게 대충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녀석이 나중에 들어와 뾰루퉁하고 앉아 있었어도 일단은 아는 척을 안 했다. 독서퀴즈와 글쓰기 해 온 걸 먼저 내고 집에서 읽은 책 리스트에 도장을 찍어주는 것이 수업 첫 순서였으므로 일단은 아이들의 성화에 먼저 퀴즈의 정답을 맞혀 보고 틀린 문제는 아이들끼리 책을 뒤져가며 찾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글쓰기 발표까지 마친 후 스스로 워크북을 풀고 있으라 해 놓고 이례적으로 뿔난 녀석을 데리고 대기실 방으로 들어갔다.
“OO아, 쌤이 얘기를 듣긴 했어~. OO이가 A 엄마한테 혼나고 와서 지금 속상하지? 왜 혼나게 된 거야? 무슨 일 있었어, 얘기해 봐~. OO이가 기분이 나쁘고 화가 나 있으면 수업을 재밌게 할 수가 없잖아, 그치. 그니까 얘기해서 풀고 기분 좋게 수업할 수 있게 쌤이 도와줄 거야.”
“어~ 밥 먹는데 제가 유튜브 보지 말라고 했는데도 A가 자꾸 봤어요.”
“그랬어? 너 혼자 보고 싶었구나~.”
“네.”
“근데 A가 자꾸 봐서 어떻게 했어. 때렸어?”
“네.”
“아이구, 엄청 세게 때렸어? 살살 밀 듯이 때렸어?”
“조금 살살 때렸어요.” (이때부터 OO이의 눈물은 폭포수처럼 떨어졌다.)
“그래서 A가 바로 엄마한테 가서 이른 거야? 그래서 OO이가 혼나고 속상했겠네?”
“네.” (계속 줄줄 흐르는 눈물)
“그러면 그러고 나서 A랑 화해했어?” (A는 아무렇지도 않게 개구진 행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화해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아니요.”
“화해할 시간이 없었구나.”
“네.”
“OO이는 OO이가 잘못했다고는 생각해? A도 잘못이 있다고 생각해?”
“네. 제가 때린 건 잘못했다고 생각해요. 근데 A도 잘못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 때린 건 약하든 세든 폭력이 되는 거니까 OO이가 욱해서 친 건 잘못한 게 맞지. 그리고 A도 바로 엄마한테 일러서 OO이가 사과할 기회도 안 준 건 조금 잘못한 거지. 그치?”
“네.”
“그래. 실수를 할 수도 있고 잘못을 할 수도 있는 거야. 근데 사과는 잘못한 일이 있을 때 곧바로 하지 않으면 나쁜 감정이 풍선처럼 커져. 그래서 얼른 사과하고 화해해서 퐁 터트려야 다시 웃으면서 볼 수 있어. 우리 A 불러서 서로 사과하고 바로 풀어 버리자. 너, 꿍 하고 속으로 담아 두는 편이야, 아니면 금세 풀고 친하게 지내는 편이야?”
“금세 풀고 친하게 지내는 편이에요.”
“그래!! 그럼 A 부른다.”
“네!!”
OO이의 눈물은 어느새 쏙 들어가 흔적조차 없어져 버렸고 (마스크는 축축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렇게 순수한 아이를 품 안에 쏙 넣고 등을 어루만져 주면서 꽈악 안아 주었다. 퍽퍽퍽 등도 퍽퍽하게 쳐주고 위아래로 쓸어내린 후에 A를 불러서 또 가만가만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도와주었다. 둘은 서로 사과했고 고사리 같은 손을 마주 잡아 흔들며 악수했다. (물론 내가 시켜서)
내가 20년 간을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면서 얻은 스킬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능력’이다. 어쩌면 유년 시절, 엄마가 나한테 말하지 않아도 될 사소한 일들까지 죄다 털어놓았을 때부터 인간의 복잡다단한 감정을 학습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고등학생 때에도 나는 친구들의 고민을 많이 들어주었고 괴로운 감정에 공감했다.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 후에도 자연스레 상담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수업의 필요충분 조건이 되었다. 아이들이 원해서 따로 상담 시간을 정한 적도 있었고 수업의 일정 시간 내에 고민을 들어주는 경우도 많았다. 아이들의 말투와 행동, 표정을 보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기 때문에 내 쪽에서 먼저 묻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OO이 같은 경우도 그렇다. 정서가 안정되어야 2시간을 온전하게 흡수하고 방출할 수 있는 건데 그런 꿀꿀한 기분으로 어떻게 버틸 수 있었겠는가. 결국 OO이는 방을 나오는 즉시 원래 캐릭터인 개구쟁이로 돌아왔고 누구보다 열심히 수업에 집중해 주었다.
감정이 편안하고 정서가 안정되어야 학습에도 효과가 있다는 건 이미 너무 알려진 정설이다. 그래서 난 수업 초반에 모두의 감정 상태를 눈치껏 확인하고 가볍게 근황을 이야기한 후에 본격적인 수업에 들어간다. 그래야 서로 충만한 feel과 감성을 장착한 채, 깊이 있는 공부로 들어갈 수 있으니까 말이다.
아무리 어린아이들의 세계라 해도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감정 때문에 속상한 일들이 연발한다. 오래된 친구들일수록 그 감정의 골도 깊다. 어른들만 감정이 상하는 게 아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아이들 중에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아이들을 많이 본다. 그때그때 불편하고 억울한 감정을 해소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일이 많으면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게 된다. 내가 보기엔 엄마가 그 억울한 감정을 공감하거나 이해해 주지 않고 그냥 “니가 잘못한 거니까 억울해하지 마.”하고 넘어가거나 “니가 뭘 잘했다고 울어. 왜 그렇게 나쁜 짓을 했어!”하고 행동만을 비난하는 경우에 아이들이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 행동은 행동이고 감정은 감정이다. 잘못된 행동은 진심으로 사과하도록 하되, 아이의 속상한 감정도 읽어주고 안아주어야 한다. 그래야 아이의 마음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
OO이가 어리고 아직 나보다 키가 작아서 오랜만에 아이를 안아주고 위로해 준 날이었다. 다른 학생들 중엔 나보다 작은 아이가 없어서 안아줄 수가 없는데 초 3학년 친구들은 아직 몇 년은 안아 줄 날이 남아 있는 것 같다. 서울에 있는 기숙형 고등학교로 진학한 내 8년 제자는 키가 181cm 됐다고 연락이 왔는데 아마도 OO이도 181cm가 될 때까지 나와 함께 하지 않을까 싶다. 수업에 진심인 아이들과 나 자신이 찐으로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