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평생 성적, 초등 4학년에 결정된다>는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아마 큰아들이 초등학교 4학년 때였을 거다. 그 시절, 중고 서점인 알라딘에 가서 공부법에 관한 책을 많이도 읽었던 것 같다.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었는데 아이 공부에 대해선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우물에 가서 숭늉을 기다리고 있는 신세였다.
우물에 가 숭늉 찾는다
이 속담처럼 모든 일에는 질서와 차례가 있는 법이다. 순서를 무시하고는 어떤 것도 단숨에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아무리 뜨끈하고 구수한 숭늉을 먹고 싶다 해도 숭늉이 될 누룽지가 솥 밑바닥에 눌어붙어 있지 않으면 안 되고, 그 위에 고슬고슬한 밥이 없으면 안 된다. 당연히 밥을 짓기 위한 쌀과 물, 그리고 밥을 익혀 줄 불, 냄비도 없으면 안 되는 거다. 그러니까 숭늉을 먹으려면 기본 재료부터 갖추어야 하고 알맞은 크기의 냄비와 알맞은 양의 물, 알맞은 온도와 시간이 적절하게 배합되어야 밥이 완성될 수 있고, 그런 다음에야 간절히 원하던 숭늉을 얻을 수 있는 법이라는 거, 이 사실을 나는 조금 늦게 깨달았다.
아직도 선명한, 선생님의 외마디
큰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때, 나는 아들이 학교 공부를 어려워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찌 보면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말씀이 너무 서운하게 들려서 애써 부정하다가 2학년이 되어서야 인정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초등 1학년 공부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담임 선생님께 2학기 방문상담을 하러 갔던 날, 나는 당황스러운 얘길 듣게 되었다. 사실 공부는 학교에 들어가서 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엄마였던지라 아이는 한글 공부도 연산 공부도 거의 시키지 않았었다. 난 그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선생님은 그렇지 않으셨나 보다.
학교 생활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후, 학습에 관하여
“우리 OO이가 조금 느리긴 해도 잘 따라가고 있지요?”
선생님의 긍정적인 답변을 기다리며, 일말의 걱정도 없이 화사하게 웃으며 질문을 던진 나에게
돌아온 선생님의 외마디.
“OO이가요~?”
이 외마디.
이 외마디는 나에게 무슨 말로 들렸던가.
"OO이가 아직 어려서 조금 부족하지만 차차 배워 나가면 됩니다~!!"라고 덧붙여 주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비수같이 날아든 “OO이가요~?”라는 말 뒤에는 내 좁은 소견으론 “설마 그럴 리가 있나요~”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이 외마디는 겉으로 보이는 다정다감하고 모든 아이들에게 평등할 것 같은 그 선생님의 이미지를 단박에 뒤집어 버리기에 충분했다. 공부 잘하는 친구의 엄마는 그 선생님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었고 그 엄마의 영향 탓인지 나 역시도 좋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공부의 기본기가 잡혀 있지 않은 학생을 폄하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선생님이 아이의 시험지를 내 앞에 들이밀면서 공부를 좀 더 하는 게 좋겠다는 진심 어린 말씀을 해주셨기 때문이다.
선생님을 향한 서운함과 약간의 분노
나는 학창 시절부터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가장 좋아했었고 나 또한 선생님이 되고 싶었고 모든 선생님은 위대하고 좋은 분이시라고 생각했었다. 오빠가 중3이었던가 고1이었던 그 무렵, '모든 선생이 좋은 건 아니다, 모든 선생을 믿을 만한 것도 아니다.'라며 밥상머리에서 교사의 허물에 대해 설파했어도 난 절대 그렇지 않다고 선생님들의 자격과 자질을 옹호하고 변호했었다.
난 학창 시절부터 선생님들을 좋아하고 잘 따르고 심부름도 잘하는 모범생 축에 속하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선생님들께 차별을 받은 경험이 없었다. 집에서는 무차별한 차별 속에서 나 자신을 지키며 생존하려 노력했지만 밖에 나가면 굳이 생존하려고 발버둥 칠 일은 없었다. 오히려 학교라는 공간은 나를 나름 인정해 주고 이뻐해 주는 공간이었기에 학교를 사랑했다. 노력하면 노력한다고 칭찬을 받았고 심부름을 잘하면 또 다른 심부름이 줄을 이어서 즐거웠다. 중3 때는 담임 선생님이 본인의 집에 어떤 쇼핑백을 갖다 놓으라고 심부름을 시키시는 바람에 버스를 30분이나 타고 약도를 찾아가며 선생님 댁에 물건을 배달한 일도 있었으니, 지금으로 말하자면 교사의 횡포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일을 난 여전히 나를 신뢰해 주셨던 선생님과의 추억거리로 회상한다.
어찌 보면 그래, 내가 공부를 못 하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선생님들의 다양한 면모를 감각적으로 느낄 수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큰아들도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기본적인 지식수준을 갖추고 있었더라면 그 선생님을 향한 서운함과 약간의 분노가 내 마음에 남아있을 리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우리 아들은 선생님의 날카로운 눈매에 딱 걸려서 이미 공부를 못 하는 아이로 낙인찍혀 버린 걸. 슬펐다. 무슨 초등학교 1학년 아이를 낙인찍는 선생님이 있단 말인가. 나보다 나이도 몇 살은 더 들어 보였고 그렇다면 교직 생활도 10년은 훌쩍 넘기신 분인데 여태껏 축적해 온 슬기로운 교사 생활의 지혜가 한낱 공부 실력, 결국 성적에 함몰되어 있다니. 공교육의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었다. 아직 초록 잎도 채 피우지 못한 어리고 연한 새싹을, 그 영혼을 이렇게 단번에 짓밟아버리다니!!
“OO이가요~?” 설마요... 를 미처 덧붙이지 못하고 만 그 반문을 난 여전히 잊을 수 없다.
그래서 인정하기 싫어서 난 그 자리에서 선생님께 지금 이 시기에 공부가 다는 아니지 않느냐, 학교 생활 원만하게 하는 게 더 중요하고 친구들이랑 사이좋게 잘 지내는 게 더 중요하지 않느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선생님이 공부의 기본에 대해 운운할 때 나는 자신이 없어지고 무기력해지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 선생님이 그렇다면 그게 중요한 거지.
성적아 올라가라
연약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서 아마 그날 펑펑 울었던 것 같다. 내 소중한 아들을 성적으로 재단하고 기본이 안 된 아이로 만든 건 선생님이 아니라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해맑은 아들 얼굴을 떠올리자 가슴이 미어졌다. 아... 진작에 공부를 가르쳤어야 하는 건데, 다른 아이들보다 뒤처지게 만든 건 모두 내 탓이로구나. 아이가 무슨 죄가 있어? 공부는 천천히 해도 된다고 굳게 믿었던 엄마, 선생님한테 성적으로 평가받는 일 따위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엄마가 문제지.
반성했다.
그래서 그다음부터 아이의 성적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공부 못하는 아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어서 아들의 인생이 힘들어지지 않게 하려면 성적을 올려야 했다. 단원 평가라도 잘 보게 해 줘야 했다. 아직 한글 맞춤법도 많이 틀리고 책 읽기도 느린 아이였지만 공부에 왕도가 어디 있는가. 필요할 때 얼른 하는 거지. 학교가 끝나면 책도 같이 많이 읽어 줬고 국어 문제집, 수학 문제집도 사다 풀었다. 아이는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마구마구 쑤셔 넣었다. 즐겨 보던 TV도 제한을 걸었고 학습 스케줄도 쫙 표로 만들어서 벽에 붙이고 동그라미를 채워 나갔다. 그때가 공부와의 전쟁이 시작된 시발점이었다. 공부를 싫어하게 만든 원흉은 내 안에 있었다. 바로 ‘욕심’이라는 원흉이.
중3 아들의 뒤늦은 항변
중3인 큰아들하고는 여전히 공부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한다. 하고 또 하고 다람쥐 쳇바퀴 도는 소리지만 천만 번째 하고 있다. 그런데 큰아들이 몇 주 전에 이런 얘길 꺼냈다.
“엄마, 내가 왜 공부를 싫어하게 됐는지 알어?”
“어. 너 초2 때 수학 문제집 풀다가 집중 안 하고 버릇없이 굴어서 엄마한테 자로 맞았잖아. 그래서 그렇지~?”
“아냐. 엄마가 사용한 방법이 마음에 안 들어서 싫어하게 된 거야. 엄마가 나 어릴 때 공부 안 하면 TV를 못 보게 했잖아. 내가 그때 좋아했던 게 뽀로론가? 뽀로로랑 타요, 코코몽, 슈퍼윙스, 미니특공대, 아이쿠, 곤, 포켓몬스터, 암튼 재밌는 거 엄청 많았는데 엄마가 공부를 해야 TV 볼 수 있게 해 줬거든.”
“아, 진짜? 마음대로 TV를 못봐서 공부를 싫어하게 됐다고?그럼 만약에 맘대로 TV를 보게 했으면 공부를 했을까?”
“그럼!! 했겠지~~!! 엄마가 룰을 그렇게 정했으니까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했지만 그것 때문에 공부하기가 너무 싫었어. 시간이 엄청 느리게 가니까. 그리구 엄마는 게임도 못하게 했잖아. 딴 애들은 다 하는데 게임도 못하게 해서 지금 나만 못해~ 컴퓨터 조작키도 찾으려면 한참 헤매서 아예 할 수가 없어.”
“그치. 엄마가 판단할 때 넌 중독성이 큰 편이었어서 TV 보는 시간도 줄이고 게임도 제대로 못하게 했지. 어렸을 때 TV를 좀 많이 봤냐? 그리구 게임은 안 해도 큰 지장은 없잖아~?”
“나두 게임은 굳이 막 하고 싶진 않아. 근데 그때부터 게임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은 들지. 친구들하고 같이 해봤자 나는 상대가 안 돼서 재미가 없어.”
“야, 그래도 게임 대신 차라리 노래 듣고 랩 하고 운동하고 그런 게 너한테 훨~씬 좋은 거야. 정신 건강에도 좋고. 게임에 중독돼 봐라. 더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 참을성도 없어지고 폭력적으로 변하고. 넌 인성 하나는 좋잖아. 야!! 엄마 덕분인 줄 알어!!”
“치..”
우리의 대화는 언제나 기승전-엄마 승리로 끝난다. 옆에서 보고 있던 둘째 아들이 던진 한 마디. “엄만 절대 지지 않아~!!” 아빠랑 얘기해도 형이랑 얘기해도 늘 엄마가 이기는 대화는 둘째가 보기에 품위가 없을 거지만 엄마의 성격을 건드려 봤자 좋을 거 없다는 건 둘째가 제일 잘 안다. 그래서 절대 엄마를 건드리는 법이 없다.
조건부 공부는 무엇을 망가뜨리는가
아무튼 큰아들의 말을 듣고 ‘조건부 공부’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했던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물론 공부를 싫어했던 원인이 아들의 말대로 '조건부 공부'에 있었던 게 맞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하지만 본인이 자로 한 번 맞은 것보다는 엄마의 룰을 지키는 게 더 고역이었고 공부가 수단이 되는 것에 문제가 있었다니 그게 맞는 말이겠지 싶은 거다.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실천하면서 습관까지도 만들자는 게 내 최종 목표였지만 그런 건 다 허사였다. 속 빈 강정이요, 앙꼬 없는 찐빵이었으니 말이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내 방식이 맞다고, '공부는 습관이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아이 공부 습관 만드는 일에만 몰두했으니..
스스로 원해서 하는 공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서로 마찰력만 키워갔다. 마찰은 속으로 점점 거세지다가 초6학년 때 공부를 강조했던 선생님을 만나면서 강력하게 폭발을 일으켰고 그 후로 1년 반 동안 화려한 불꽃을 선물하다가 피시식거리며 타 없어져 버렸다. 사춘기는 다행히 순항으로 막을 내리고 나는 조건부 공부의 폐단을 자각하며 더 이상은 공부를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공부의 중요성, 진정한 공부라는 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데 있다는 걸 자주 이야기해 준다. 큰아들은 다른 건 다 자신 있는데 공부만은 한계가 있다고 늘 힘주어 말한다. 그걸 지켜보는 부모로서 마음은 아프지만 언젠가 그 생각은 자신의 오판이었음을 깨닫는 날이 오리라 믿는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려는 격이지만 아직은 희망이 남아 있으니 괜찮다
공부를 좋아하게 하려면?
공부가 싫은 아이를 위해 어떻게 하면 공부를 좋아하게 만들 수 있을까, 어떤 방법이 우리 아들한테 맞는 걸까를 고민한 기간은 약 3년 정도였던 것 같다. 초등 고학년이 되어 과목별 내용에 난이도가 올라가고 이해력은 속도를 내지 못하는 것이 너무 걱정이 되었었다. 그래서 영수 학원도 계속 돌렸고 끊임없이 적응하기를 종용했다. 지금은 누구나 이 정도의 공부는 해야 한다고, 기본을 갖추고 습관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누누이 강조를 했었다. 그러나 아이는 아무 생각도 목표도 계획도 전망도 없었다. 그저 빈 가방만 요란히 들고 다녔을 뿐이었다.
'초등 4학년 때 미래가 결정되고 평생 성적이 결정된다'는 말. 난 그렇지 않다고 본다. 성적으로만 보자면 초등 4학년이면 이미 늦었다.그전에 공부에 대한 흥미도 자신감도 느껴 보고 인정도 받아보아야 한다. 4학년이 시작점이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공부는 더 일찍 좋아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그 시기는 초등 4학년이 아니라 6~7살 때이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공부를 좋아하는 아이가 되어야 꾸준히 좋아할 수 있다. 밥을 지으려면 재료도 필요하고 알맞은 온도와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공부에도 아이에게 알맞은 공부의 재료와 강약과 속도가 필요한 것이다. 이른바 <골디락스 조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 아이에게 맞는 골디락스 조건
시중에 아무리 많은 책이 있고 매스컴에서 아무리 저명한 전문가 강연이 흘러나와도 부모는 남의 기준을 절대시 하면 안 된다. 내 아이에게 맞는 골디락스 조건이 무엇인지 스스로 파악해야 한다. 아이마다 언어 이해력이 다르고 수용 능력이 다르고 사고와 표현 능력이 다른데 어떻게 일률적으로 교육할 수 있겠는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부모는 아이의 능력과 수준, 속도와 인내심 등을 고려해서 내 아이만을 위한 맞춤식 교육으로 들어가야 한다.
가장 중요한 건 읽기 능력이다. 읽기 능력이 모든 공부의 원천이자 핵심 역량이다. 사실 어렸을 때는 이것만을 위해 시간을 쏟아부어도 아깝지 않다. 물론 모든 아이가 책이나 텍스트를 좋아하는 게 아니므로 부모의 세심한 노력과 끈기가 있어야 읽기 능력, 즉 문해력과 독해력을 키울 수 있다.
‘책을 읽으면서 내용을 이해하고 분석하고 자기 생각을 이끌어 내는 것’, 이게 공부의 근본이다. (사실 논술 수업과 같은 방식이다.) 책 읽기가 제대로 되어 있는 아이는 공부를 수월하게 받아들일 준비를 마친 아이인 것이다. 외국어도 어렸을 때 배우면 훨씬 수월하고 몸에 배는 것처럼, 책 읽기도 몸에 배게 만들어 주면 그다음엔 그다지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나도 책을 안 읽어 준 것은 아니지만 돌이켜 보면 큰아들이 6살 때 나는 ‘논술 교실’을 창업하기 위해 분주했다. 아이한테 아마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을 것이다. 36개월 안에 엄마와의 애착을 공고히 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몰랐던 엄마는 22개월에 아들을 억지로 어린이집으로 몰아넣었고 (이 때도 집에 있는 게 힘들어 단기로 학원 강사를 하게 되면서 그랬다. ㅜㅜ) 6~7살 때의 책 읽기가 학령기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걸 몰랐던 엄마는 자신의 일에신경 쓰느라 아들과의 책 탐색 시간을 놓치고 그저 놀거나 TV 보는 데만 열중하도록 방치하고 말았다. 이것저것 창의적인 활동을 할 수 있게 나름 신경 쓰긴 했지만 6~7세 때의 책 읽기가 중요하다는 걸 강하게 인지했더라면초2학년이 되어서야 제대로 읽고 공부하기를 시작하면서 아이와 씨름을 시작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중요한 건 가장 알맞은 때를 잘 선택하는 것이다. 모든 일이 때가 있다고 하는데 공부도 중고등학교 때만 몰빵하는 게 결코 아니다.
이렇게 읽어 주시라.
6~7살 때가 언어 이해력이 증폭되고 뇌가 발달되는 시기이니 만큼 지금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6~7세의 자녀를 둔 부모님들은 정말 책 읽기에 진심이시기를 바란다. 진심을 다해 읽어주고 최대한 대화를 많이 하면서 읽으셔야 한다. 책 내용에 관해서도 열린 대화를 나누고 아이의 생각을 백분 수용해 주셔야 한다. 말도 안 되는 말이라도 아이의 생각을 절대 비난하지 마시라. 엄마의 고정관념을 주입하시지도 말고 설명도 너무 많이 하지 마시라. 아이의 상상력이 빛을 발하도록 그냥 아이의 말을 들어 주시라. 그래야 아이는 엄마의 공감을 얻고 자신의 생각에 지지를 받으며 무한으로 책을 사랑할 수 있다. 생각이 자랄 수 있다. 시간이 없다고 핑계 대지 마시라. 시간은 만드는 것!! 아이를 위해 매일매일 책을 읽어 주시라. 종류별로 다양하게!! 도서관도 함께 자주 다니시고 놀이터로 이용하시라. 책도 많이많이 사주시고 서점에 가서도 직접 고르게 하시라. 이 시기엔 부모를 능가할 선생님은 없다. 부모가 직접 책 읽기를 실천해 주시길 바란다. 그리고 학원이나 공부방, 방문 수업을 하게 되더라도 초등 3학년 때까지는 꼭 읽어 주시길 바란다. 그게 정서적 안정과 공부의 밑거름이 된다.
이것이 나의 간절한 바람이요, 공부를 싫어하게 될 아이를 양산하지 않을 최선의 방법이다.
p.s 지금 시대에는 공부만이 살 길이 아니고 재능도 선천적인 게 아니다. 재능도 자기가 만들어 나가면 되는 거고 공부가 아니라도 할 일은 쌔고 쌨다.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거다. 그럼에도 공부를 좋아하게끔 도와 줄 필요가 있는 것은 12년이라는 의무 교육 기간을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보내게 하기 위함이다. 알아듣지 못해 괴로운 시간이 아니라 자꾸 들려서 지식이 확장되고 연결되는, 그래서 뭔가 성취감이 있는 시간으로 채워 가길 바라는 마음 뿐이다. 공부 자존감도 인생을 살아갈 원동력이 된다. 그러니 아이가 수렁에 빠지지 않도록 미리 잡아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