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엘리베이터를 탔다. 어제도 탔고 그제도 탔고 내일도 탈 것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타고 오르는 엘리베이터. 그 안에서 나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생각한다. 그 짧은 시간조차 아깝다고 누가 있든 없든 스마트폰으로 정보를 탐색한다. 그러다 누군가 강아지를 안고 타면 빨리 밖으로 나가자고 발발거리며 코를 씰룩거리는 강아지 모습을 귀엽게 바라본다. 유모차를 탄 6개월 된 아기가 등장하면 ‘아고~ 저 귀여운 발 좀 봐. 한번 만져 보고 싶다. 아이구 근데 이 코로나 시국에 이 아기는 마스크를 못 써서 어떡할까. 이 시국에 출산한 엄마 마음속은 얼마나 걱정스러울까.’하며 혼자 온탕과 냉탕을 넘나든다. 위층에 사시는 할머니를 만나면 주거니 받거니 대화가 끊기질 않는다. 혹시 우리 아이들이 음악을 크게 틀어서 시끄럽지는 않은지 먼저 여쭤 본다. ‘에이~ 그 정도 소리도 안 나고 어떻게 살겠냐’면서 위층 할머니는 밝은 표정으로 그런 건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신다. 두 눈에 웃음기가 늘 배어 있어 무엇이라도 이해해 주실 분인 것처럼 느껴진다. 질문의 바통을 이어받으신 할머니는 내 직업에 대한 궁금증 해소를 시작으로 어쩜 그렇게 아가씨 같은 사람이(나는 최강 동안이다!! 훗) 그만큼 큰 아들을 두었는가와, ‘아들들이 깍듯이 인사를 잘하더라, 밖에서 형이 동생을 잘 챙기더라, 동생도 형을 잘 따르고 우애가 너무 좋더라.’는 말씀을 전해 주신다. 사뭇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4년 전 지금의 X-아파트에 분양을 받아 2년 전에 입주했다. 그로부터 2년 남짓 동안 해소되지 않은 궁금증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건 누가 풀어줄 문제도 아니고 갖지도 않을 만큼 소박한 호기심 따위다. 하지만 난 이 궁금증을 풀고 싶다. 그래서 글로 풀어 본다. 어쩌면 이 글을 쓰면서 알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자, 바로 들어간다. 엘베에서 만난 사람들
우리 X-아파트로 말할 것 같으면 여기는 서울로 가는 간선 도로에서 조금 가까이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분양 당시 서울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았다. 청약하는 날 아침 9시부터 입장이었지만 남편과 내가 도착했던 9시 20분 전에는 이미 파도 행렬이 줄을 지어 있었다. 입장하는 데만도 몇 시간이나 걸렸다. 무료하게 보내는 긴 시간 동안 초면인 사람들은 서로의 주소지를 물어보기도 하고 청약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때 서울 사람들이 많이들 지원했다고 그들이 수근대고 있었다.
대기 줄을 통과한 시점으로부터 2년 후, 16년 동안 꿈에 그리고 1년 간의 기도로 완성된 My First New House로 입성!!
코로나 시국에 이사를 했고 밖에 자유롭게 나갈 수 없는 상황이어서 거의 1년 정도는 이방인 같은 느낌이 들었었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윗집 할머니, 아랫집 부부(두 번 정도 마주침), 옆집 부부(늦깎이 신혼부부), 옆집의 아랫집 사람(두 아들의 엄마)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이웃사촌을 엘베에서 만나 짧은 담소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그들이 내 인접한 이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던 수단은 엘리베이터 버튼밖에 없었다. 28층과 30층을 누르는 순간, 눈을 번쩍 뜨고 "아, OO층 사세요? 저는 몇 호 살아요~!!" 하면서 주소를 알려 주었고 그로부터 다시 마주칠 적이면 오래전부터 이웃이었던 것처럼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위아래 층에 사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 오래된 무의식에 따른 것이었다. 오래전부터 같은 라인에 산다고 해서 특별히 인사를 나눈 경험이 없다. 80~90대 할아버지 빼고는.
그런데 어느 날, 44층 남자를 만나면서 나는 달라졌다.
여태까진 인접한 이웃들에게만 인사를 해 왔고 같은 라인에 살더라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꾸준히 모른 척을 해왔던 내 방식을 바꿔 놓은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바로 ‘인사하는 문화’!! 문화 충격!!
‘인사’하는 행위가 어찌 문화 충격일 수 있는지!! 나에게 먼저 ‘인사’를 하는 이웃들의 행위는 나를 한동안 혼란스럽게 했다. 맨 처음에는 44층, 맨 꼭대기에 사는 나와 비슷한 연배거나 약간 젊은 남자가 매우 자연스러우면서도 크고 또렷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인사하는 모습을 보고 적잖이 놀랐었다. “안녕하세요~!!” “아!! 네~ 안녕하세요~!!”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오랫동안 인사해 온 느낌이었다. '와!! 되게 젠틀한데? 그리고 인사가 몸에 배어 있어!!'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그 후로 나는 엘베를 탈 때, 다른 사람이 탈 때, 엘베를 내릴 때 먼저 인사하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 엘베를 많이 타고 오르내리면서 70% 이상의 사람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나는 어렸을 때 우리 동네에서 아주머니들께 ‘인사 잘하는 혜정이’로 불렸었다. “혜정이는 인사를 참 잘해!! 어찌나 싹싹하게 인사를 잘하는지~!! 아주 이뻐 죽겠어~!! ” 이런 멘트를 귓등으로 들으면서 나는 내심 뿌듯한 마음을 가졌었다. 인사하는 행위만으로도 긍정적인 이미지를 획득한 것이 신기했다. 뒤돌아 보면 학교 선생님들이나 친구들한테도 인사는 나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하이톤의 내 인사를 받는 모두가 웃으며 날 맞이해 주었고 인사는 나의 천성이 되었다.
그러나 학원 강사를 하면서부터 인사의 본질은 서서히 사라져 갔다. 원장님은 강사들을 경쟁 구도에 몰아넣었고 갈수록 강사들의 웃음기도 옅어졌다. 다들 수업에만 열심이었고 다들 이기기 위한 싸움에 출전한 듯했다. 내가 원하는 사회는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원장님 밑에 부장님, 부장님 밑에 과장님이라는 직급이라는 것이 있는 계급 사회에서 나만 혼자 발랄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조직 문화에 스며들면서 나도 인사를 건성으로 하게 되었다. 만나고 헤어질 때만 나누는 ‘인사’는 그 본질인 생명성을 잃고 그저 허공에 흩어지는 형식적인 구호에 그치고 말았다. 그 후 결혼을 하고 전셋집을 전전하면서 나는 인사할 일이 없어졌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모르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인사를 하지 않았다. 먼저 인사를 건넸다가 무시당할까 봐 두려워서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예전 20대에 만났던 스토커에 의해 남겨진 트라우마(지금은 zero)로 내가 먼저 장벽을 만든 거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X-아파트에 오게 되면서 그동안 나는 진정성 있는
‘인사’가 고팠다는 걸 찌릿찌릿 전기가 통하는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이웃과 함께 어울리며 살기를 소망했던 것이다. 닫힌 공간, 닫힌 마음, 서로 경쟁하듯 부를 비교하고 성적을 비교하고 결과를 저울질하는 것은 지겨워졌다. 그런 모임도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좁은 공간에 모여 앉아 남의 뒷담화를 하고 자식들 자랑만을 일삼는 건 소름 돋는 일이었다. 그래서 난 과감히 그런 모임에서 벗어났고 나와 생각이 비슷하고 소통이 되는 사람들이 있는 세계를 지향하기 시작했다.
우리 X-아파트 사람들도 어느 정도 나에게 소통의 활로를 열어주는 느낌을 선사했다. 속 깊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지만 그래도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얼굴을 한 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혈색이 도는 걸 느꼈다.
며칠 전 어떤 키 큰 미모의 여인이 타고 있는 엘베를 같이 탑승했다. 물론 인사를 먼저 건넸고 그녀도 나에게 인사해 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4살 정도의 여자 꼬마 아이가 젊은 부모와 함께 우리의 엘베를 탔다. 그 부모와 그 여인은 서로 알고 있는 사이였는지 반갑게 인사하며 어쩌고 저쩌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여인이 아이에 대해 무언가를 물었는데 젊은 아빠가, "아~~ 우리 아이는 다 좋은데 갑자기 소리를 질러서~ 하하하!!" 하고 웃는 순간
"꺅~~"하고 4살 꼬마 아이가 아이유의 3단 고음의 최고음으로 소릴 질러 아빠의 말을 증명해 주었다!!
난 너무 놀라서 “앗!! 깜짝이야!!”를 내뱉었고 곧바로 미안함을 쭈그리며 “히야~~ 소프라노네~~~!!”하고 엄지척을 치켜세웠다. 아이만 빼고 다들 칼칼칼!!!^^ 하고 시원하게 웃었다. 1층에 당도해서 나를 남겨 두고 모두가 떠날 때 또 따뜻한 음성으로 서로의 발걸음과 건강을 기원하며 "가세요~~^^" 하고 인사를 나누었던!! 바로 이곳이 happy house다!!
서울 사람들이 많이 이사를 와서 이렇게 인사를 자연스럽게 나누는 분위기가 형성된 걸까? 내가 지난 8년 간 살던 동네는 10분 거리의 구시가지인데 거기랑 여기의 온도는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걸까? 새로 입주한 아파트여서 서로가 다 처음 만나니까 더 친근함을 느끼는 걸까? 아니면...
44층 남자가 인사하는 예의를 몸소 선보임으로써 너도나도 인사를 주고받게 된 걸까?
난 모르겠다. 근데 이렇게 믿고 싶다. 여기가 새 아파트여서 그런 것도 아니고 서울 사람들이 많이 와서 그런 것도 아니고 정답은 '44층 남자'가 뿌리고 거둔 나비 효과 덕분이라고!!
한 사람이 따뜻한 마음으로 행한 사소한 일들은 나비 효과(나비效果 / Butterfly Effect)를 일으켜 더 따뜻한 세상을 만든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어느 한 곳에서 일어난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뉴욕에 태풍을 일으킬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인사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먼저 행하는 것이 어려운 일일 순 있지만 이렇게 나비 효과만 일어난다면 아무리 남이 쌩까는 한이 있더라도 즐거울 수 있다. 왜냐하면 나비의 날갯짓은 주변의 누군가를 의식해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 자유롭게 날기 위한 최소한의 움직임인 것이다.
나는 오늘 이 시간 '인사'의 미덕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인사 권하는 사회' 속에 살기를, 나비 효과를 일으키는 44층 남자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