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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정 Dec 07. 2022

꿈의 암시

2021. 6. 2. 수. 오전 9시 48분     


아침 7시 45분 알람을 바로 끄고 재차 꿈으로 직행했다.

8시 5분까지 장장 20분에 걸친 꿈이었다.

화들짝 놀라 깬 후 천천히 꿈 내용을 복기하면서 꿈암시와 메시지를 남겨 본다.


<꿈>     

엄마와 함께 어느 숙소로 들어간다. 우리 아이들은 없고 엄마랑 나 단 둘이다. 아마도 거기서 쉬려고 들어간 것 같고 일종의 여행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바로 다음 장면, 어떤 엄마와 아이 둘이 나온다. 아이들은 7살, 5살 정도 되는 아이들로 천진난만하고 개구진 성격이었는데 나는 그 아이들을 보자마자 뭔가를 사 줘야겠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이전부터 사 주려던 모양이었다. 그들이 위층으로 먼저 올라가고 나는 곧바로 따라 올라가려고 하는데 거실 쇼파에 덩그러니 엄마가 남아 있는 모습이 눈에 걸린다. 엄마는 어딜 가냐고 나에게 묻는다. 쇼파에 편안히 깊게 누워 있는 자세가 아닌, 엉덩이만 살짝 걸친 불안한 모습이다.


금방 뭐만 사다 주고 온다고 엄마에게 말하고 황급히 가려는데 엄마는 혼자 여기 어떻게 있느냐며 새롭고 낯선 공간을 두려워한다. 그보다 여기까지 와서 혼자 있게 되는 것이 외로움의 긴 터널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 같다. 나도 순간 그 마음을 캐치하지만 금방 올 거라고 안심시키며 계단을 올라간다.

계단을 올라가서 문을 열어 제끼는 순간 당황스러운 공간이 나온다. 거기는 찜질방 같은 곳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빈틈없이 질서도 없이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누워서 쉬기도 하고 씻기도 하고 떠들기도 한다. 목욕탕처럼 진공 같은 공간에서 왁자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사람들 몸을 밟지 않으려 노력하며 다음 문으로 향한다.


또 다른 공간이 나온다. 더 넓은 공간. 더 많은 사람들. 첫 번째 공간에는 여자와 아이들만 있었으나 두 번째 공간에는 남녀가 섞여 있고 더 정신이 없는 곳이었다. 그곳을 지나 세 번째 공간은 첫 번째, 두 번째에 이어 다시 아래로 내려가는 하강 내리막길의 새로운 공간이었는데 거기는 계단식이었다. 잘 생각은 안 나지만 그곳은 한 방향을 바라보고 누울 수 있는 다소 정리되고 질서가 있는 공간으로 첫 번째, 두 번째 공간과는 달리 자신의 자리를 찜할 수 있는 곳이었다. 다른 사람의 공간으로 자리를 옮기려면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의식이 필요했다. 나도 그 곳에서 잠시 누워 있고 싶었으나 마땅한 자리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다시 돌아서 두 번째 공간을 지나 첫 번째 공간으로 향했다.


그동안 선물을 사 주려던 기억은 온데간데 없어졌고 두 아이와 그 아이들의 엄마도 어디론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엄마에게 돌아가야지 하면서도 몸은 잠시나마 쉬고 싶었다. 첫 번째 공간에서 푹 퍼져서 찜질을 하고 싶었다. 그러고 잠깐 앉았는데 그때 깜짝 놀라 잠이 깼다.         

  



<꿈의 해석> - 나의 해석일 뿐이지만 꿈은 내 심연의 정신세계를 반영하는 것인 만큼 어느 정도의 신빙성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이 꿈은 크게 두 가지를 반영한다.

첫째는 엄마에 대한 책임감과 부담감이다. 엄마는 현재 외롭고 고립된 상태에 빠져 있다. 낯선 공간에 홀로 남겨져 있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두려워하고 있다. 아무런 계획도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텅 빈 공간에서 아마 tv를 보는 일밖에 다른 할 것은 없어 보인다. 내가 데려간 공간이었다. 다른 곳과는 차단되어 있어서 누구를 만날 수도 없고 함부로 나갈 수도 없다. 나가면 길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은 엄마의 의지도 물론 있겠지만 나의 권유도 한몫했기 때문에 스스로 책임감을 갖는다. 그래서 편히 쉬게 하고 싶었으나 나는 개인적인 일과 다른 할 일에 대한 부담감에 엄마를 챙겨야 한다는 압박감까지 더해져 더욱 피곤함을 느낀다.


현재 엄마는 일을 그만두려고 한다. 몸이 힘들고 아프다는 이유다. 이제 쉴 때가 되긴 했다. 아니 이미 많이 지났다. 하지만 일을 그만두고 곧 혼자가 되면 텅 빈 집안은 엄마의 고립된 공간이 된다. 물론 집안일이 엄마를 기다릴 것이다. 그러나 집안일은 엄마를 더욱 힘들게 할 뿐이고 외로운 마음을 달래 줄 대상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tv만 볼뿐이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밖에 다닐 수는 있다는 것이다. 이걸 위로 삼아야 할까. 전부터 엄마한테 말했듯이 백수 상태가 되어서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종교를 갖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일단 내가 주일 봉사를 그만두었으니 엄마를 모시고 교회 다녀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둘째, 엄마를 두고 내가 혼자 돌아다닌 이야기. 엄마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부분은 엄마를 두고 다녔던 시간에도 나는 아주 행복하고 편안한 상태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제 내 상태에 대해 얘기해 보겠지만 엄마를 돌보지 못했던 시간에도 나 자신조차 스스로 쉴 곳을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내 필요에 의해 개인적인 시간을 갖고 해야 할 일을 우선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 아무리 사방팔방 돌아다닌다고 해도 큰 소득이 없을뿐더러 쫓기는 마음 남은 채, 결국 엄마를 돌보는 일에 대한 책임감과 죄책감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엄마를 일부러 피해서 돌아다닌 것은 아니지만 내가 바쁘다고 해서 엄마를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엄마를 편안하게 인도해 주는 것이 우선이고 그래야 나도 편하게 잠시나마 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내가 돌아다닌 공간과 시간을 생각해 보자. 나는 선물을 사러 갔으나 그 어떤 곳에도 선물은 없었다. 사람들이 무척 많이 있었고 어질러져 있는 혼돈의 세계였다. 이 혼돈의 세계는 바로 이 세상을 의미한다. 이 세상은 무질서의 공간, 즉 엔트로피의 법칙이 존재하는 곳이다. 무질서에서 오히려 편안함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다. 내 목적은 선물을 사는 것이었지만 돌아다니는 시간 동안 그 목적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만다. 내가 만났던 선물을 줘야 할 대상도 어디론가 사라졌고 눈앞에서 사라진 그들은 나에게 처음부터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인 듯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 그들은 내가 이 세상에서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인 것이다. 가벼운 인연은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것인데 그들에게 선물을 주어야 한다고, 뭔가 부담을 갖고 있는 것도 실은 소용없는 일이라는 말이 된다. 오히려 나는 소중한 사람, 엄마에게 선물을 주려고 노력하지 않았음이 밝혀지는 대목이다. 이것은 확대하면 엄마를 비롯한 나의 가족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선물이 없었다고 했다. 그것은 뭘까. 선물은 외부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선물은 외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는 것~!! 내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는 것이 바로 선물이다. 꼭 돈을 지불해야만, 물질적인 것이어야만 선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건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내가 자꾸 남에게 물질적인 것으로 보답을 하려고 하거나 돈으로 대가를 치르려고 할 때가 있는데 이에 대한 증이다.




자, 그다음 혼돈의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보자. 혼돈의 세계는 3단계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간은 각기 다른 독립적인 공간이었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몸이 지나칠 정도로 퍼져서 남을 의식하지 않고 휴식을 취한다는 면에서 공통점이 있었다. 소설의 구성으로 보자면 옴니버스식 구성이라고 할까. 첫 번째는 여자들과 아이들만, 두 번째는 혼성으로, 세 번째는 약간의 질서와 품위가 있는 곳으로 각각 특색이 있었다. 이것을 어떻게 분석할까 하는 이 순간, 이런 생각이 든다. 지금 내 나이를 기준으로 또는 내 인생을 기준으로 볼 때, 첫 번째 공간은 지금의 40대, 두 번째는 50대, 세 번째는 60대와 그 이후를 의미한다.


30대까지는 육아와 직업의 생활을 열심히 하느라 주변을 돌아볼 새가 없이 지나갔다.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게 시간은 흘러갔고 참으로 분주했다. 물론 친구도 만나고 가족도 만나고 일도 하고 놀러도 다니고 그렇게 즐겁고 바쁘게 살았지만 주변을 둘러볼 시간은 없었던 것 같다.


40대가 되어서는 서서히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시간도 많이 가졌고 내가 읽고 싶은 책도 읽기 시작했다. 주변의 친한 사람들과도 깊게 교제하는 시간을 가지고 그러는 사이에 사실 부모님에게는 소홀했다. 지금 내 나이는 딱 40대의 한가운데. 45세의 6월, 딱 중간이다. 40대에 들어서서는 여자들하고만 엄청 가깝게 지냈다. 그동안 즐거운 일도 많았지만 그만큼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여자들하고만 지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남자들은 잘 알지 못할 것이다. 지금은 딱 그만두었다. 편안해졌다. 얽매임이 없어서 자유롭고 내 시간을 이렇게 오롯이 가질 수 있음이 얼마나 행복한가. 이제 나는 습작을 통해 작가로 거듭날 것이다. 오케이~~!! 암튼 40대는 지금까지는 여자들과 아이들이 있는 공간에서 주로 지냈다. 앞으로 남은 40대 후반까지도 여자들과 아이들과 주로 지내게 될 것이다.


5년이 지나고 50대가 되면 생활에 변화가 온다. 혼성이다. 와~ 이것은 어떤 영역일까. 아직 내가 겪지 않은 일이라 무척 기대가 되는데 아마도 큰 변화가 올 것 같다. 물론 나는 논술 일은 계속할 것 같긴 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요즘 드는 생각이 논술보다도 다른 일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 든다는 것이다. 사업을 하고 싶다. 어떤 아이템이 좋을지는 고민 중이다. 제2의 직업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나이가 들면 직업 때문에 고민을 하게 될 것이다. 지금 문득, 그때 여행을 많이 하고 그 경험으로 글을 쓰면 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케~ 55세면 10년 후, 큰아들은 25세, 작은아들은 21세, 모두 성인이다. 그러면 마음 편하게 여행을 갈 수 있겠다. 영어 회화도 매일 꾸준히 연습해서 자유롭게 배낭여행을 다녀야겠다. 남편도 그때 1년 정도 시간을 낼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와~ 근데 우리 아들들하고 같이 다니면 더 대박이다. 1인 2천만 원 정도는 있어야 하니 4명이면 8천만 원이다. 돈에 맞추어 기간은 정하자. 암튼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 그러고 곧 죽어도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한 평생도 순식간인데 그 정도는 살아주자.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많은 인연을 맺게 되고 또 내가 55세에는 사업을 시작할 거니까 아주 인맥이 넓어질 것이다. 작가의 삶이 될 수도 있고 사업가로서의 삶이 될 수도 있다. 5년 후면 일단 빚은 다 갚았을 테니까 자본금은 있다고 가정하자. 미리 정해 놓을 필요는 없다. 10년 후면 강산이 바뀌기 때문. 암튼 그래서 50대는 많은 사람들과 새로 만나고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자, 이제 대망의 60대. 와~ 쓰는 동안에도 60대는 뭐라고 했었는지 까먹었다. 다시 찾아보니 질서와 품위가 있는 시기이다. 왓뜨~~!! 좋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 고모, 숙모, 당숙모들~ 이모 등등 가족들 중에도 60대가 많다. 주변에는 권사님이 60대이시다. 가족들은 60대 초반, 권사님은 아마 60대 중후반인 것 같은데.. 이보다 더 많은 표본이 필요하지만 60대는 각양각색인 것 같다. 60대는 저마다 자신의 지위에서 안정을 취하며 즐기는 인생을 사는 시기이다. 물론 40~50대에 준비를 해 놓지 않은 사람들은 불행하고 괴로운 시간을 보낼 것이고 미리 농사를 잘 지어 놓은 사람들은 안락한 삶을 영위하기 시작할 것이다. 나는 당근 후자이고 싶다. 그래서 열심히 농사를 짓고 있지 않은가. 물론 좋은 운도 따라주고 있고 이 때문에 매사에 감사한 마음이지만 성실함과 정직이 가장 중요한 삶의 가치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다시 꿈의 장면으로 돌아가 보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양보를 요구한다. 자리를 바꿔서 자기가 거기를 차지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보인다.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썩 내키지는 않지만 자리를 양보하고 다른 앞자리로 이동한다. 다행히 남은 자리는 있었던 것 같다. 양보받은 사람은 자신의 욕구를 충족했지만 양보를 해 준 사람은 얼떨떨해했다. 물론 이동한 다른 자리가 그에게 더 좋은 자리였을 수도 있다. 스크린 가까운 곳으로 갔기 때문이다. 정확히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앞자리로 갈수록 좀 더 편안한 것인 것 같았다. 60대에는 계층이 전보다 뚜렷해진다. 남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도 일종의 욕심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도전과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의 자리를 넘겨주는 사람은 두 유형이 있겠지만 억지로 넘겨주었다면 그 이후 변수가 중요해질 것이고 흔쾌히 넘겨준 사람이라면 여유가 있는 사람일 것이다. 넘겨주지 않고 거절한 사람이라면 아집이 있고 양보할 줄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타인에 대한 마음의 자세는 그 사람이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삶이 여유롭고 넉넉한 사람일수록 타인에게 관대할 수 있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므로 40~50대에는 많은 경험을 쌓으면서 후덕한 인품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고 60대가 되면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베푸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교양이 있고 남을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꿈에서 다시 돌아오는 길에 첫 번째 칸에 다시 머물렀다. 첫 번째 칸은 여자들과 아이들만 있는 공간이었는데 그것은 우리 아들들이 결혼하고 그 이후에 손주들과 함께 하는 삶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여자들, 즉 친구들과 여생을 함께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엄마에게 돌아갈 생각을 한다. 엄마와 나는 27살 차이니까 내 나이 60대에 엄마는 80대 후반이거나 90대가 된다. 외할머니도 현재 90대이시니 엄마도 그때까지 살아계시지 않을까.




이 많은 여정을 경험하는 앞으로의 30년의 세월을 꿈이 암시해 주고 있었다. 꿈의 해석이 정확한 건 아니지만 난 꿈을 소중히 여긴다. 꿈은 내 생각과 고민을 반영하는 한편 미래를 암시하고 조심할 부분도 경고해 주기 때문이다.


이 꿈은 인생의 후반전을 상상해 보게도 했지만 엄마의 존재와 고독감에 주목하게 했다. 내 삶의 중심에는 나 자신이 있다 해도 외로움의 바다에서 나를 기다릴 엄마를 조금 더 신경 써 줄 것을 경고했다. 기다리다 지치게 하지 말고 시간을 내어 함께 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엄마의 인생이 외롭지 않도록, 더 이상 기다림의 연속이 되지 않도록. 시간은 영원하지 않고 엄마는 내가 죽을 때까지 기다려 줄 수 없으니까.


ㅡ 작년 6월의 꿈. 책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A4 용지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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