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과 아름다움의 온도와 시차
여름을 맞는다.
누군가의 손을 여전히 붙잡고 있거나 놓은 내 친구들처럼
어떤 것은 변하고 어떤 것은 그대로인 채 여름을 난다.
하지 못한 말과 할 수 없는 말
해선 안 될 말과 해야 할 말은
어느 날 인물이 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인물이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한 말은 무얼까 고민하다
말보다 다른 것을 요하는 시간과 마주한 뒤
멈춰 서는 때가 있다.(...)
이들 모두 어디에서 온 걸까.
그리고 이제 어디로 가고 싶을까.
김애란 작가의 말 중에서
� 타인으로부터 느끼는 온도 차, 시차 때문에 가슴에 결로(結露)와 얼룩이 생기는 이야기_소설가 김애란
� 제37회 이상문학상 수상작 「침묵의 미래」,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 슬픔과 아름다움의 온도와 시차
� 독서See너지
▶ 음악 :
나를 떠나가는 것들_1호 & 25호 (싱어게인, 원곡 최백호)
엄마가 딸에게_양희은 & 악동뮤지션
8월의 크리스마스_한석규 (8월의 크리스마스 OST)
계절을 느끼기도 전에 사계절이 얼렁뚱땅, 뭉뚱그려 지나간다. 벌써 입동도 지났다. 때이른 첫눈도 내렸다. 예측할 수 없는 온도차가 마치 사람들 사이에 오고가는 계절 같다. 오고 있는가 하면, 가고 없고, 돌아보면 말없이 지나간 것 투성이. 새롭게 채워지고, 다시 지나가기를 반복하다 이내 무뎌지고, 무감각해진다. 그렇게 우리는 어른이 되어 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왔다.
<바깥은 여름> 김애란, 풍경의 쓸모
나를 떠나가는 것들_1호 & 25호 (싱어게인, 원곡 최백호)
어른이란 몸에 그런 그을음이
많은 사람인지도 모르겠구나.
그 검댕이 자기 내부에 자신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암호를 남긴.
상대가 한 말이 아닌,
하지 않은 말에 대해
의문과 경외를 동시에 갖는.
<바깥은 여름> 김애란
우리는 “가뿐하게 요약하고 판정”하며 “타인을 가장 쉬운 방식으로 이해”해온 시간들을 떠올리며 아연해질 수밖에 없으리라.(...)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곳의 이야기를 우리의 언어로 들었을 때 느끼게 되는 친밀감과 반가움, 김애란은 등장 이후 줄곧 우리에게 그 각별한 체험을 선사했다. 이곳이 비록 언제든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가파른 절벽 위라고 하더라도, 그 언어가 화자(話者)가 한 사람밖에 남지 않은 소수언어처럼 타인에게 가닿는 게 불가능하게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 막막한 상황을 껴안은 채 써내려간 일곱 편의 단편이 『바깥은 여름』 안에 담겨 있다.
<바깥은 여름> 출판사 서평 중에서
'가뿐하게 요약하고 판정하며 타인을 가장 쉬운 방식으로 이해'한다는 출판사 서평이 저릿하면서도 공감이 간다. 시차와 온도차란 나와 타인, 그리고 그들의 사연을 외면하려는 나와 손을 내밀어 보려는 내면의 나 사이, 이해와 오해만큼의 차이다.
나는 나무에 그려지고 돌에 새겨지며 태어났다.
내 첫 이름은 ‘오해’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들 필요에 의해
나를 점점 ‘이해’로 만들었다.
<바깥은 여름> 김애란, 침묵의 미래
"말 그대로 나의 외부. 나와 타인, 나와 세상의 간극을 나타내는 말로 썼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이 세상 또는 타인으로부터 느끼는 온도 차, 시차 때문에 가슴에 결로(結露)와 얼룩이 생기는 이야기들을 묶었다."
소설가 김애란
“수상작 제목에서 '바깥'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김애란 작가는 이렇게 답했다. 여기 <바깥은 여름>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 전체를 아우르는 말이기도 하다. 슬픔의 얼룩을 무늬삼아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의 시리도록 아프고 슬픈 이야기가 담겨 있다. ‘슬퍼요’에 응답하는 Siri의 표현처럼.
제가 이해하는 삶이란
슬픔과 아름다움 사이의 모든 것이랍니다._Siri
<바깥은 여름> 김애란,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바깥은 여름> 김애란, 풍경의 쓸모
스위스 여행을 할 때가 한여름이었다. 인터라켄에서 융프라우 정상에 오르니, 눈발이 날렸다. 등산 열차를 타고 오르는 사이 겨울이 온 것 같았다. 그래서 이 문장은 그날을 너무도 생생하게 떠올리게 한다.
우린 저마다의 계절을 지난다. 나와 타인의 온도차는 말할 것도 없고, 나의 안과 밖도 더웠다 시렸다 한다. 하지만, 항상 뜨뜻미지근한 것보다는 나을 것도 같다. 그 온도차로 인해 고기압과 저기압이 생기고, 바람이 불고, 비나 눈이 내리고, 계절이 된다. '계절이 하는 일과 시간이 맡은 몫'이 있을 터이니.
한 문장도 허투루 쓰지 않은 김애란 소설가의 문장들을 곱씹다 보면, 슬픔과 아름다움이 흰눈처럼 흩날리고 쌓여간다. 이내, '타인으로부터 느끼는 온도 차, 시차 때문에 가슴에 결로(結露)와 얼룩이 생기는 이야기'들이라는 작가의 의도는 눈 녹듯 사라지고, 가슴 한 켠에 따스한 감동이 물자국을 남긴다.
찬성이 자기 손바닥을 가만 내려다봤다.
얼음은 사라지고 손에 엷은 물자국만 남아 있었다.
동시에 찬성의 내면에도 묘한 자국이 생겼는데
그게 뭔지 몰랐다.
<바깥은 여름> 김애란, 노찬성과 에반
아이들은 정말 크는 게 아까울 정도로 빨리 자랐다. 그리고 그런 걸 마주한 때라야 비로소 나는 계절이 하는 일과 시간이 맡은 몫을 알 수 있었다. 3월이 하는 일과 7월이 해낸 일을 알 수 있었다. 5월 또는 9월이라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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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사람들이 ‘시간’이라 부르는 뭔가가 ‘빨리 감기’한 필름마냥 스쳐가는 기분이 들었다.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한. 점점 그 폭을 좁혀 소용돌이를 만든 뒤 우리 가족을 삼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이유도, 눈이 녹고 새순이 돋는 까닭도 모두 그 때문인 것 같았다. 시간이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편드는 듯했다.
잠이 오지 않을 때 찬성은 어둠 속 빈 벽을 바라보며 자주 잡생각에 빠졌다. 그럴 땐 종종 할머니가 일러준 ‘용서’라는 말이 떠올랐다. 없던 일이 될 수 없고, 잊을 수도 없는 일은 나중에 어떻게 되나. 그런 건 모두 어디로 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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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성이 자기 손바닥을 가만 내려다봤다. 얼음은 사라지고 손에 엷은 물자국만 남아 있었다. 동시에 찬성의 내면에도 묘한 자국이 생겼는데 그게 뭔지 몰랐다.
당시 이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도화 혼자 어른이 돼가는 과정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일이었다. 도화의 말투와 표정, 화제가 변하는 걸, 도화의 세계가 점점 커져가는 걸, 그 확장의 힘이 자신을 밀어내는 걸 감내하는 거였다.
나는 나무에 그려지고 돌에 새겨지며 태어났다. 내 첫 이름은 ‘오해’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들 필요에 의해 나를 점점 ‘이해’로 만들었다.
어떤 사건 후 뭔가 간명하게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을 불만족스럽게 요약하고 나면 특히 그랬다. ‘그 일’ 이후 나는 내 인상이 미묘하게 바뀐 걸 알았다. 그럴 땐 정말 내가 내 과거를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화는, 배치는 지금도 진행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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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쩐지 두 사람이, 좋은 일은 금방 지나가고, 그런 순간은 자주 오지 않으며, 온다 해도 지나치기 십상임을 아는 사람들 같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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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왔다.
어른들은 잘 헤어지지 않아. 서로 포개질 수 없는 간극을 확인하는 게 반드시 이별을 의미하지도 않고. 그건 타협이기 전에 타인에 대한 예의랄까, 겸손의 한 방식이니까. 그래도 어떤 인간들은 결국 헤어지지. 누가 꼭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해. 서로 고유한 존재 방식과 중력 때문에. 안 만나는 게 아니라 만날 수 없는 거야. 맹렬한 속도로 지구를 비껴가는 행성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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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란 몸에 그런 그을음이 많은 사람인지도 모르겠구나. 그 검댕이 자기 내부에 자신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암호를 남긴. 상대가 한 말이 아닌, 하지 않은 말에 대해 의문과 경외를 동시에 갖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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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해하는 삶이란 슬픔과 아름다움 사이의 모든 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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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표정을 알 수 없는 시리의 캄캄한 얼굴 위로 지성인지 영혼인지 모를 파동이 희미하게 지나갔다. 시리는 무척 곤란한 질문을 받았다는 듯 인간에 대한 ‘포기’인지 ‘단념’인지 모를 반응을 보였다. .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바깥은 여름> 김애란
2018. 3. 20 기록 / 2023. 11. 19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