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스콧 피츠제럴드
어쨌든 나는 그 시절의 것들을 고스란히 다시 되살려 모든 종류의 전문가 중에서도 가장 희귀한 존재, 이른바 '균형잡힌 인간'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어쨌든, 하나의 창으로 보면 실제보다 훨씬 근사해 보이는 게 인생이다, 라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and now I was going to bring back all such things into my life and become again that most limited of specialists, the "well-rounded man." This isn't just an epigram-life is much more successfully looked at from a single window, after all.
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 화려함 속에 순수함이 빛나는 개츠비의 삶
� 끊임없는 관성의 힘이 아니라, 약간의 마찰력이 작용하는 의지의 나아감, 이것이 개츠비의 매력.
� 개츠비스러운 미국 문화에 대한 양가감정 (세계 1차 세계대전 후 고도성장기, 미국 사회의 단면과 인간 욕망의 초호화 파티, 그리고 유럽과 미국, 신흥 계급과 가치관의 전복, 1920년대 미국의 사회, 경제의 탈바꿈 등)
�독서See너지
▶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은 사람은 친구가 될 수 있다'_'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중에서
▶ 영화 지니어스, 영화 위대한 개츠비
▶ 음악 Young and Beautiful_Lana Del Rey (위대한 개츠비 OST), Sunflower_Colde
영화로도, 책으로도 너무나 잘 알려진 <위대한 개츠비>
화려함 속에 순수함이 빛났던 개츠비의 삶이 닉 캐러웨이라는 소설 속 화자의 창을 통해 근사하게 펼쳐진다.
미국의 대공황이 있기 전, 재즈와 춤이 유행하고, 금주법이 시행되었으나 파티와 밀주가 성행했던 시기. 개츠비 역시 불법적인 밀주를 통해 단시간에 부를 축적한 인물이다. 재즈의 애드립마냥 즉흥적인 미국 사회 분위기 속에서 가슴에 사랑을 품고 계획적으로 꿈과 이상을 실현시켜온 열정남이기도 하다. '위대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탐욕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 속에서 개츠비 자체로는 아련하게 빛나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겠다. 물질적 풍요를 지속할 수 있었음에도 사랑을 택한 그의 안타까운 결말이 오히려 개츠비의 유일함이다.
Young and Beautiful_Lana Del rey (위대한 개츠비 OST)
세계 1차 세계대전 후 고도성장기, 미국 사회의 단면과 인간의 욕망이 초호화 파티를 벌일 때, 개츠비는 톰의 아내가 된 옛 연인 데이지를 향한 마음으로 자신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어 버린다. 원동력은 오로지 과거의 연인을 되찾겠다는 마음 하나 뿐. 인간의 속물적 근성이 순수한 사랑과 교차되면서 집착과 탐욕, 순수와 사랑도 마구 뒤섞인다. 닉이라는 인물(작가의 분신같은)을 통하지 않았다면, 소설 속 대중들처럼 개츠비는 속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옛 연인을 보호하고자 했던 개츠비의 행동으로 그에 대한 오해가 이해로 전복된다.
그러나 이 소설이 한 인물을 쫓아 가는 것으로 그쳤다면, 이토록 오랜 시간 사랑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은 사람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소설 속 나가사와 선배 말은 지독하게 미국적이고, 개츠비스러운 미국 문화에 대해 우리가 갖는 양가감정과도 같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 열차나 기생충처럼 각각의 열차칸과 계단의 함의, 깜박이는 전등처럼 웨스트 에그(전통부촌)와 이스트 에그(신흥부촌)라는 지역이 갖는 상징성만 보더라도 유럽과 미국, 신흥 계급과 가치관의 전복, 1920년대 미국의 사회, 경제의 탈바꿈 등 많은 이야기들을 함축하고 있으면서도 그 뻔한 로맨스를 내세웠기 때문이다. 미국 중고등학생 필독서로도 읽힐만큼 대중적인 개츠비는 미국 그 자체이기도 하다.
'The Great Gatsby'라는 제목을 '위대한 개츠비'로 번역한 것은 실제 great에 비해 다소 과장된 느낌도 있고, 많은 번역서가 출판사별로 쏟아져 나오지만, '위대한 개츠비'라는 제목만큼은 고유어 같아서 다른 제목을 붙일 수 없을 것 같다. 제목이란 게 조금 과장되거나 모순과 역설을 담을 때 그 힘이 더 크게 작용하곤 하니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는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원제를 버린 번역서가 당시 판권도 없이 엄청난 성공을 거머쥔다. 이것이 제목의 힘이다. 원래 'Great'라는 단어도 피츠제럴드가 원했던 것이 아닌, 편집자에 의해 붙었다고 들은 적이 있다. 요즘은 독립출판이나 전자책 등 출판 문화도 많이 바뀌고 세분화되었지만, 출판 경로가 제한적이었던 시대에 편집자의 영향력을 짐작케 한다.
영화 <지니어스Genius>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스콧 피츠제럴드를 쥐락펴락했던 최고의 편집자 '맥스 퍼킨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1929년 뉴욕, 유력 출판사 스크라이브너스의 냉철한 천재 편집자 맥스 퍼킨스(콜린 퍼스)가 모든 출판사에서 거절당하는 작가 토마스 울프(주드 로)의 천재성과 가능성을 알아보고 <천사여, 고향을 보라>를 출간한다. 곧바로 평단의 극찬으로 이어지며 미국 문학계를 흔들어 놓는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다보니 5천 쪽에 달하는 원고를 쓸만큼 글에 진심인 작가와 출판과 대중성을 고려한 편집자의 입장도 흥미롭다.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 중에도 편집자에 의해 원작과는 전혀 다른 작품으로 (작품 훼손에 가깝게) 편집되어버린 경우가 있는데, 숨은 조력의 영향력은 어디까지여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만든다.
위대한 개츠비는 민음사 김욱동 번역가의 번역본과 문학동네 김영하 작가의 번역본으로 읽었다. 영문 원서는 일부 발췌 필사를 했다. 영화는 여러번 시도하다가 중간에 자꾸 졸아서(재미가 없었다기 보다 딱 중간지점에서 자꾸 그랬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네번째쯤 시도에 드디어 집중해서 본 걸로 기억한다. 개인적으로 영화 <인셉션>이나 <타이타닉>을 좋아해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영화들도 꽤 좋아하는데도 말이다. (요즘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라고 써야 하는데, 여전히 디카프리오가 편하고 좋다.)
<위대한 개츠비>는 다들 너무 좋다고 하는데, 내가 잘못 읽었나 싶었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유독 자주 중간중간 펼쳤다. 게다가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이 무슨 의미인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기도 했다. 여전히 분명하진 않지만, 거스르며 나아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하다. 끊임없는 관성의 힘이 아니라, 약간의 마찰력이 작용하는 의지의 나아감 이것이 개츠비의 매력이랄까. 물론 지금은 위대한 개츠비를 추천한다. (아니 왕강추?!)
기록을 뒤적이다 보니 개츠비를 다시 읽고서 남긴 기록 중에 이런 글이 있었다.
유난히 초록색이 많이 등장하는 <위대한 개츠비>
초록 불빛, 초록색 등 초록빛, 초록 카드, 초록색 기차표, 초록색 가슴.
"개츠비다운 유일함이 크리스마스트리처럼 화려하면서도 순수하게 빛나는 소설'이라는 한마디로 간직하는 것으로. 당시 나는 그저 멋지고 아름다운 소설로 기억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발췌
이는 현실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일 수 있는지를, 그리고 이 세계의 기반이라는 것이 요정의 날개 위에도 든든하게 세워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보증 같은 것이었다.
웨스트에그라는 동네를 하나의 완결된 세계로 인식하고, 그 자체의 기준과 형태에 비추어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내가 이미 그렇게 되어버렸다는 자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눈을 갖게 되었다.
나로서는 이 모든 것들이 사건의 본질과는 동떨어진 비본질적인 것으로 보였다.
다시 그 공기 속으로 스며들어가기 전, 이 기묘한 한 시간 남짓의 시간 동안, 이 지역과 우리가 완전히 하나가 된다는 것을 말없이 깨닫는다.
내일 우리는 더 빨리 달리고 더 멀리 팔을 뻗을 것이다... 그러면 마침내 어느 찬란한 아침...그러므로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쉴새없이 과거 속으로 밀려나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tomorrow we will run faster, stretch out our arms farther... And one fine morning -
So we beat on, boats against the current, borne bac ceaselessly into the past.'
위대한 개츠비, 피츠제럴드 (문학동네, 김영하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