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아리다 Sep 17. 2023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언뜻 지나치며 본 한 장면, 끊어진 한 토막의 대화, 어렴풋한 소리들을 예민하게 포착하는 모디아노의 예민한 감각과 탈색된 언어는 그 유례를 찾기 어렵다. 그의 문체는 탐정의 보고서만큼이나 단순명료하다. 그래서 더욱 많은 침묵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래서 신비스럽다. 

김화영 문학평론가, 역자




� '기 롤랑'이라 불리는, 기억을 잃은 한 남자의 과거를 따라 가는 '기억의, 기억에 의한, 기억을 위한' 여정

 파트릭 모디아노는 잃어버린 시간과 기억이라는 주제 면에서 프루스트를 연상케 하는 작가이자 201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1978년 콩쿠르 수상작, 1984년 피에르 드 모나코 상, 2000년 폴 모랑 문학 대상  

 파트릭 모디아노는 2차 세계대전을 관통한 세대들의 잃어버린 존재 의미를 기억 상실처럼  과거의 시간 속에서 찾아 나섰다. 



�독서See너지

▶ 도서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 영화 : 코코, 메멘토

▶ 그림 : 고흐의 '밤의 카페 테라스'

▶ 음악 : On the Street_J-hop (with J.Cole), Streets of Philadelphia_Bruce Springsteen (영화 필라델피아 OST),  Remember Me_Miguel (feat. Natalia Lafourcade), Immortals_Fall Out Boy (Big Hero 6 OST)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p9
고흐 '밤의 카페 테라스'




파트릭 모디아노는 이 강렬한 첫 문장을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단서들을 조각조각 내어 마치 마흔 일곱 장의 카드처럼 소설을 구성했다. 기 롤랑이라 불리는, 기억을 잃은 한 남자의 과거를 따라 가는 여정으로.



글자들이 춤을 춘다. 나는 누구일까?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p110




On the Street_J-hop (with J.Cole)



그러나 불확실한 증언과 빗나가는 예측들. 그가 진정 누구인지 퍼즐 조각을 맞추다가 당혹감이 극에 달하는 중반을 넘어서면 그제서야 깨닫는다. 눈부신 기억은 바래지고 아련한 잔상만 남아 있음을.



어제 저녁에 그 거리들을 훑어 지나가며 나는 그 거리들이 전과 똑같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것들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건물들도 거리의 폭도 변하지 않았지만 그 시절에는 빛이 달랐었고 다른 무엇이 대기 속에 떠돌고 있었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Streets of Philadelphia_Bruce Springsteen (영화 필라델피아 OST)




애니메이션 '코코'에서 죽은 자들의 영혼이 산 자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순간 저 세상에서마저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나 혹은 타인의 상자 속에 들어 있는 기억이란 것도 이와 같을까. 어떤 특정한 순간의 실루엣만 어렴풋이 형태를 드러낼 뿐, 그 실루엣마저도 점점 옅어진다고... 뇌의 망각 작용 때문이든, 시간의 휘발성 때문이든.



Remember Me_Miguel (feat. Natalia Lafourcade)




파트릭 모디아노는 잃어버린 시간과 기억이라는 주제 면에서 프루스트를 연상케 하는 작가이자 201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다. 그의 대표작이자 콩쿠르 수상작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기억을 그린 작품이라는 점에서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와도 닮았다.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다만 채색 방식이 다르다. 제목과 달리 완벽하게 틀린 예감이었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가 기억의 오류를 겹쳐 그린 유화라면,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기억의 번짐 효과로 윤곽선이 사라지는 수채화 같다고나 할까. 파트릭 모디아노는 이 작품을 통해 '기억이란 모래 위의 발자국 같은 것. 모래 위를 지나는 우리 삶의 자취는 찰나의 흔적과 소멸의 파동'이라고 나즈막이 읊조리는 듯 하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두 '해변의 사나이'들이며 모래는 -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 우리들 발자국을 기껏해야 몇 초 동안 밖에 간직하지 않는다'고 위트는 늘 말하곤 했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p76




문득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메멘토>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이 영화는 '10분 밖에 기억을 못하는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가 사진, 메모, 문신으로 남긴 기억을 따라 범인을 쫓는 기억 추적 스릴러'다. 흑백과 컬러 영상이 오가며, 조각난 기억의 퍼즐들이 시간에 뒤섞여 기억의 왜곡과 혼선을 일으킨다. 




어떤 기억들은 잊혀진 편이 낫다.
Some memories are best forgotten

메멘토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인간의 뇌에 망각이라는 장치가 있다는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도 고통이니까. 때론 기억되지 않는 것도, 기억하지 않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은 때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거나,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불충분하게 기억한다. 현대 프랑스 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파트릭 모디아노는 2차 세계대전을 관통한 세대들의 잃어버린 존재 의미를 기억 상실처럼  과거의 시간 속에서 찾아 나섰다. 




위트와 나는 종종 흔적마저 사라져버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곤 했었다. 그들은 어느 날 무(無)로부터 문득 나타났다가 반짝 빛을 발한 다음 다시 무로 돌아가버린다. 미(美)의 여왕들, 멋쟁이 바람둥이들, 나비들. 그들 대부분은 심지어 살아 있는 동안에도 결코 단단해지지 못할 수증기만큼의 밀도조차 지니지 못했다. 위트는 '해변의 사나이'라고 불리는 한 인간을 나에게 그 예로 보이곤 했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우리가 이미 지나간 과거의 기억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내 생각엔 소설 속 기 롤랑이 자신이 누구인가를 찾는 여정은 결국 책 속 글귀처럼 '과연 이것이 나의 인생일까요? 아니면 내가 그 속에 미끄러져 들어간 어떤 다른 사람의 인생일까요?'라고 되묻는 듯 하다. 



지금의 나는 이미 존재하고 있고, 과거를 헤매는 지금의 순간도 다시 과거가 되고 만다. 그러니 라떼를 마시며 과거에 묻혀 현재를 놓치지 말자. 자신이 누구인지는 증명하고 증거를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정체성은 지속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니까. 그게 삶의 이유이자 살아가는 재미일 테니까.



Immortals_Fall Out Boy (Big Hero 6 OST)



<발췌>

그것들은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필요 불가결한 작업 도구라고 위트는 몇 번이나 내게 말하곤 했었다. 그 전화번호부들과 연감들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귀중하고 가장 감동적인 도서관을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왜나하면 그들 페이지마다에는 오직 그것들만이 증언할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사물들과 세계들이 분류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나간 뒤에도 무엇인가 계속 진동하고 있는 것이다. 점점 더 약해져가는 어떤 파동, 주의하여 귀를 기울이면 포착할 수 있는 어떤 파동이, 따지고 보면 나는 한 번도 그 페드로 매케부아였던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었다. 그러나 그 파동들이 때로는 먼 곳에서 때로는 더 세게 나를 뚫고 지나갔었다. 그러다 차츰차츰 허공을 떠돌고 있던 그 모든 메아리들이 결정체를 이룬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였다. 

왜 어떤 종류의 과거들은 사진처럼 정확하게 불쑥 솟아나는 것일까?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라고 한 당신의 말은 옳았습니다. 

세상에는 이따금 신비스러운 우연의 일치도 있는 법이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2018. 3. 8 기록 / 2023. 9. 17 기록

매거진의 이전글 체호프 단편선 VS 스토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