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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아리다 Oct 20. 2023

심연_배철현VS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_김영하

파괴와 개척의 심연을 관조하다


자전거를 배우려면 쓰러지는 쪽으로 핸들을 꺾어야 해요. 
그리고 힘차게 페달을 밟으면 되죠.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김영하



� 파괴 = 개척 = 관조 = 발견 = 인간의 최선

� 한없이 건조하며 무료해 보이는, 조화같은 삶 대신 한 순간이라도 활짝 피어날 줄 아는 생화같은 삶에 대한 예찬

� 관조가 관찰과 다른 점은 바로 '고요함'이라는 심상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를 '인간의 최선'이라고 한다. 


� 독서See너지

▶ 도서 :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김영하 & <심연>배철현

▶ 작가 : 레프 톨스토이, 프랑수아즈 사강, 아리스토텔레스

▶ 음악 : Abyss (심연)_WOODZ(우즈), Fast Forward_전소미, Everybody knows_Justice League, Everybody knows_John Legend, 물에 비친 그림자_드뷔시





프랑수아즈 사강이 한 말이면서 김영하 작가의 이 불편한 제목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파괴도 권리도 아닌 바로 '관조'다.




동일한 사물이나 사람을 깊이 응시하고 자신이 사라지는 상태로 진입하는 단계를 '관조(觀照)'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를 그리스어로'테오리아 teoria' 즉 '인간의 최선'이라고 했다. 

<심연> 배철현



관조의 사전적 의미는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관찰하거나 비추어 봄'이다. 관조가 관찰과 다른 점은 바로 '고요함'이라는 심상에 있지 않나 싶다. 배철현 교수의 <심연>에서 말하듯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최선'이라고 했다. 



예술분야의 거장들은 이미 그 관조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고, 그들에게는 그것이 삶의 자세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책 속에 나오는 작품과 예술가들은 그런 경지의 인물들이고 '나'라는 화자 역시 간섭이 아닌  일관되게 관조적 자세를 취한다



Abyss (심연)_WOODZ(우즈)



이 소설 속에 다비드, 클림트, 백남준(소설 속 직접적 언급은 없으나 추측됨), 들라크루아 그리고 레너드 코헨 등 거장들의 예술 세계가 곳곳에 드러나 있고, 관조적이고 초연한 자세로 읽혀진다고 하겠다. 불편한 내용일 수 있지만, 유기적으로 연결된 스토리의 전개는 매우 설득력 있다.



우리는 파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파괴란 개척과 다름 아니다. 프론티어 정신으로 개척시대를 열어간다는 미명하에 다른 문명을 파괴하는 역사가 있어 왔고, 파괴는 또다른 문화의 건설을 앞당기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의 참상과 상흔을 남기기도 한다. 여기서는 파괴의 역할 중 긍정적인 부분만 분리해 생각해 보자.



그러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말은 '가짜같은 나'를 파괴함으로써 새로운 나, 진짜 나를 발견하는 일일 수도 있지 않을까? 관조적인 자세로 바라본다면 그것이 '인간의 최선'을 향한 거듭남의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겠다.




 작가의 궁극적 목표는,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삶의 진부함에 의문을 품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고객인 독자는 이 노련한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 일상에 박제된 ‘가짜 나’를 멋지게 부숴버리는 꿈을 꾼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출판사 서평 중에서    


사람들은 세상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이 변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레프 톨스토이



백남준 작가는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의 삶을 되감기할 수는 없다." 인생은 한번 뿐이라는 말이 다시금 스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변함없고 한없이 건조하며 무료해 보이는, 조화같은 삶 대신 한 순간이라도 활짝 피어날 줄 아는 생화같은 삶에 대한 예찬이라 생각된다.



Fast Forward_전소미



⭐️ 인생의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수용할 때 비로소 나타나는 별. 자신을 세상의 빛과 소리가 들어오지 않는 거룩한 공간에 놓아둘 때에야 비로소 등장하는 이 별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심연> 배철현



'깨어 있음이란 내 안에 숨어 있는 '또 다른 나'가 보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다._<심연>'라고 한다면, 잠든 나를 깨우는 것은 결국 남이 아닌 나 자신이다. '아무도 다른 누구에게 구원일 수는 없어요._<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깨달음을 실천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첫 걸음은 나 자신에서부터 시작된다. 



Everybody Knows_Justice League



생물이 화려한 색을 가지고 있을 때는 크게 두 가지 경우야. 누군가를 유혹해야 하거나 아니면 자신을 적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때.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김영하



Everybody Knows_John Legend



단순히 관찰이 아니라 관조에는 '고요함'이라는 심상이 필요하듯 물이나 거울에 자신을 비출 때 수식어가 필요하다. '맑고 깨끗한' 물에 그림자를 비춰 보고, '잘 닦은' 거울 앞에 섰을 때라야 비로소 왜곡되지 않은 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만의 시선에서  좀더 적나라한 나 자신과 마주할 때 어떤 기분이 들까. 저마다 다르겠지만, 부디 회심의 미소를 지을 수 있기를.



이렇게 일상과 다른 나만의 시선으로 관찰하다 보면 좀 더 적나라한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이런 행위를 회심(回心)이라고 한다.

<심연> 배철현



삶은 자신만의 임무를 발견하고 실천해나가는 여정이다. 하지만 요즘 현대인들은 자신의 생각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고 너무 쉽게 타인의 평가와 기준에 스스로를 맞추곤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외부의 지식과 정보를 더 많이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심연(深淵)’으로 들어가 내면의 소리를 듣고 이를 행동으로 옮기려는 마음가짐이다.

<심연> 책 소개 중에서, 교보문고 제공    



물에 비친 그림자_드뷔시




발췌_<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김영하


다비드나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보여주면서 그 감상을 묻지도 않을 것이다. (...) 나는 그들이 의미 없이 내뱉는 말 속에서 가능성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이 즐겨 듣는 음악, 언뜻언뜻 내비치는 가족사, 감명깊었다던 책, 좋아하는 화가 등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내고야 만다.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내면의 충동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그들은 나같은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구스타프 클림트일 겁니다."

수많은 화가들이 유디트를 그려왔지만 그녀는 다른 누구의 유디트도 아닌 클림트의 유디트를 닮아 있었다.


"생물이 화려한 색을 가지고 있을 때는 크게 두 가지 경우야. 누군가를 유혹해야 하거나 아니면 자신을 적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때."


두려움은 흔히 혐오의 외피를 쓰곤 하죠. 자전거를 배우려면 쓰러지는 쪽으로 핸들을 꺾어야 해요. 그리고 힘차게 페달을 밟으면 되죠.


브라운관 속의 전자총들이 내쏘는 불규칙한 주사선들. 그때 돌아본 그의 아파트는 깊고 깊은 동굴이었고 그 속에서 외로이 빛나는 푸른 모니터는 미미였고 동시에 유디트였다. 그는 되감기 버튼을 눌렀다. 목이 심하게 말라왔다.


같은 소재를 삼류화가가 그렸다면 아마도 사르다나팔이자기 머리를 두 팔로 감싸며 비통해하는 것으로 묘사했을 것이다. 들라크루아는 알고 있었으리라. 죽음을 주재하는 자의 내면에 대해서 말이다.


아무도 다른 누구에게 구원일 수는 없어요.


미미는 욕조로 들어가기 전 레너드 코헨의 <everybody knows>를 틀어놓고 오랫동안 춤을 추었다.


당신의 꽃들이 영원하길


나는 아무 예고 없이 다가가 물어볼 것이다. 멀리 왔는데도 아무것도 변한 게 없지 않느냐고. 또는, 휴식을 원하지 않느냐고. 그때 내 손을 잡고 따라오라. 그럴 자신이 없는 자들은 절대 뒤돌아보지 말 일이다. 고통스럽고 무료하더라도 그대들 갈 길을 가라.


내 거실 가득히 피어 있는 조화 무더기들처럼 내 인생은 언제나 변함없고 한없이 무료하다.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김영하






발췌_<심연> 배철현_나를 깨우는 짧고 깊은 생각


⭐️깨어 있음이란 내 안에 숨어 있는 '또 다른 나'가 보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다.


⭐️단테의 신곡은 이렇게 시작한다."우리 인생 여정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어두운 숲속에서 헤매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반듯한 길이 숨겨져 있다."


⭐️동일한 사물이나 사람을 깊이 응시하고 자신이 사라지는 상태로 진입하는 단계를 '관조(觀照)'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를 그리스어로 '테오리아 teoria' 즉 '인간의 최선'이라고 했다.


⭐️숭고함은 그것을 관찰하는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완성한다. 그런 의미에서 숭고함은 자연 그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보고 반응하는 인간의 마음에 존재한다.


⭐️관찰이란 가시적으로 보는 것을 넘어 '안 보이는 것을 보는' 행위다. 우리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도록 뇌와 눈을 훈련해 왔다. 하지만 그 대상의 배후에 있는 어떤 것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내가 지닌 관습과 편견의 시선을 제거해야 한다.


⭐️이렇게 일상과 다른 나만의 시선으로 관찰하다 보면 좀 더 적나라한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이런 행위를 회심(回心)이라고 한다.


⭐️생각은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공식이나 철학으로부터 시작되지 않는다. 생각은 내 삶에서 없어도 되는 것들을 분별해내는 능력이다.


⭐️30초를 달릴 수 있다면 마라톤도 완주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수용할 때 비로소 나타나는 별. 자신을 세상의 빛과 소리가 들어오지 않는 거룩한 공간에 놓아둘 때에야 비로소 등장하는 이 별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당신은 1년동안 자신이 가야할 길을 깨닫고, 그 운명적인 삶을 자발적으로 실천했습니까?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가치가 있는 자신만의 삶의 문법을 가지고 있습니까?


<심연> 배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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