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rene Nov 29. 2021

굴레

"세입자 나가면 전세금 줬다는 영수증 받아놔라."

"계좌이체로 할 거야. 통장에 찍히니까 괜찮아."

"그래도 확실한 게 좋으니까 받아놓으라면 받아놔. 그리고 인테리어 업체는 A는 안된다고. 알았어?"

"내가 알아서 할게."


부모님 같은 말을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들었다. 분명 내일도 듣게 될 것이다. '내가 알아서 할게'가 아닌 '알겠습니다'라고 할 때까지.


자식 걱정하는 마음이라는 거 안다. 부모님의 지시나 명령 같은 일방적인 통에 '네'라고 순응하는 척하며 대화를 종결시키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나, 그 간섭과 통제적인 양육 방식이 나와 혼연일체가 되어 같이 아들을 망쳐왔다는 걸 아차린 후부터는 매번 거슬리고 짜증이 나 반항하고 싶어 진다. 아마도 아들에 대한 죄책감이 무거워 부모님을 이해하기보다 원망는 쪽을 나 보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내가 경험하도록 그냥 놔뒀으면 좋겠는데, 정 걱정이 된다면 제발 한 번만 말하고 선택과 결정은 내가 하도록. 그렇게 나를 믿어주었으면 좋겠는데 본인들의 불안을 잠재울 때까지 통제하려 드는 모든 행위가 목줄 묶여 있는 듯 다.

나를 믿어주지 않으니 자기 확신이 없고 자기 확신이 없으니 내 생각이나 감정을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사소한 것도 남편에게 확인하곤 한다. "사람들이 그런 말을 듣고도 왜 화를 안 냈냐고 하네? 오늘 이런 일이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내가 기분 나쁜 게 맞는 거야? 니면 어떡하지? 내가 오버하는 건가? 이건 욕이야 칭찬이야? 이건 조언이야 비난이야? 이 땐 해도 되나?" 등등.. 

나는 이렇게 사회성이 덜 발달된 미숙한 사람이 됐고 내 아들도 그렇다.


"내가 알아서 할게. 그만 좀 얘기해요."


라고 하니 '인간관계 좋게 하는 방법'에 대한 영상 링크를 보내신다. 그거 보고 말 좀 이쁘게 하라는, 아니 결국엔 본인에게 순종하라는 의도가 담겼리라. 이 생각 역시 나의 꼬인 속이 하는 왜곡된 해석일지 모르겠만 시청하고 싶지 않다.

끝내 나에게 종의 대답을 듣지 못하니 대신 사위에게 전화해 "알겠습니다" 대답을 들어내고 마는 부모님. 본인들 걱정을 전염시 굴복시켜야만 직성이 풀리다보다. 오늘은 내 안에 버젓이 자리 잡았지만 숨겨오고 억눌렀던 원망이 어 나왔다. 내가 그간 엄마의 통제 때문에 얼마나 숨 막히고 답답했는지를 토로했다.

그랬구나.라는 공감이나 수긍 따위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너 참 이상하다. 넌 네 아빠랑 똑같아. 듣기 싫으니까 그만 해."라는 독설이 날아왔다.

우리 집에서 아빠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세상 가장 이기적이고 독재적이 강박적이고 불안하고 부정적이고 열등감 덩어리 하는데 이보다 더한 독설이 있을까.


나도 독기가 올라 '인간관계 좋게 하는 방법 같은 영상은 엄마보시라, 보지만 말고 실천을 하시라, 엄마 불안은 엄마 거니까 나에게 주지 말고 가져가시라.' 같은 말을 카톡에 쓰다가 지웠다. 띄어 쓰는 공간마다 '내가 이렇게 얘기하면 상처 받을 텐데.'라는 마음이 들이미는 바람에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던질 수도 없다. 아빠에게 짓눌려 살아온 엄마에 대한 연민 안전핀이 되 변화의 길목마다 주저하게 만고 한 번도 제대로 터지지 못한 나는 위다.


내가 아이들에게 output을 잘하고 싶어도 부모님의 부정적인 input이 끊임없이 들어오니 차단하고 싶어 지고 그 멀어지고 싶은 맘이 패륜 같아 죄책감이 다. 모님과의 관계도 내가 원인인 '나의 문제'일까 복기해보지만 이번엔 아니다. 지금까지 부모님의 불안을 촉발하지 않기 위해 '하라는 대로' 얼마나 말 잘 듣는 착한 딸로 순종해왔는가. 내가 문제를 일으키고 믿음을 주지 못해 야기된 불안이 아니다.

나에게 '내가 알아서 할게'는 치기 어린 반항이 아니라 레를 벗고자 하는 함이다.

작가의 이전글 나를 웃게 하는 사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