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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연습

우리는 어쩌면 너무 편리하고 깨끗한 환경에서 사는 것은 아닐까

by 서린

고통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두려움에서 온다. 어쩌면 행복을 찾는 것보다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행복에 이르는 길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미국에서 살 당시였다. 당시 큰 아이는 두 돌을 향해가고 있었고 내 배는 다시 만삭이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아침에 일어나 아래층 부엌으로 향했다. 전날 산 빵 봉지 아랫부분이 뜯겨있었다. 빵가루도 다소 지저분하게 게 떨어져 있다. '남편이 이렇게 먹진 않았을 텐데...' 하며 자세히 들여다봤다. 빵 아랫부분도 조금 없어져 있었다. 없어진 모양이 마치 작은 동굴 같았다. 순간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 내기 어려운 모양임을 직감했다.


그렇다. '이 것은 사람의 소행이 아니야.'



직감과 함께 빵봉지를 놓아버렸고 그대로 얼었다. 뒷목이 서늘하게 쭈뼛 섰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쥐소동이 시작됐다.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차단하고 밀폐시켰지만 한 번 먹이를 발견한 쥐는 같은 곳으로 계속 등장했고 그 흔적을 쥐똥으로 남겼다. 낮에는 볼 수 없었는데 분명 밤에 다녀가는 듯했다. 너무 두려운 나머지 나의 마음이 잘 진정되지 않았다. 저녁 시간 이후로는 아무리 목이 말라도 안방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위층 침실이나 아이 방에 쥐가 들어올까 봐 방문 틈도 막았지만 밤새 잠도 잘 수 없었다.



나의 극심한 공포와 불안을 누군가가 달래주길 원했다. 남편에게 계속 우는 소리를 했다. 남편도 학업으로 바쁜 와중에 육아도 하랴 놀란 와이프의 마음을 진정시키랴 놀란 본인의 마음까지 진정시키랴 분주했다. 나는 3-4일이 지나도 사태가 호전되지 않자 친정 부모님께 SOS를 날렸다. 부모님께서는 출산을 도와주시러 삼주 뒤에 오시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구조요청을 보낸 지 나흘 만에 미국 땅에 닿으셨다.



업체를 불렀지만 그들이 해주는 것은 결국 쥐가 나올만한 곳에 덫을 놓아주는 일이었다. 큰 아이가 놀다 다칠까 싶어 낯에는 쥐 덫을 놓을 수 없었다. 쥐 자체도 그렇게도 무서웠지만 더 끔찍하게 날 괴롭혔던 사실은 쥐 덫에 잡혀 괴로워하는 쥐와 마주할까 봐 겁이 났다. 쥐도 죽도록 싫긴 한데 덫에 잡힌 쥐는 얼마나 괴로울까. 그 와중에 쥐 덫은 쥐에게 너무 아플 것 같고 너무 잔인하니 끈끈이를 쓰자고 남편에게 제안하며 '결국 끈끈이나 쥐 덫이나 사실 그게 그거지' 싶었지만 생각만 해도 너무 괴로워 가쁜 호흡을 연일 몰아쉬며 그냥 머리를 쥐어짰다.



남편과 친정 아빠는 매일 저녁 끈끈이를 여기저기 놓고 매일 아침 확인했다. 나는 강박적으로 쥐가 다녀간 흔적을 찾았지만 발견한다고 한들 그것을 직접 치울 용기도 없었다. ‘좋은 아침! 잘 잤어?’로 하루를 시작하는 대신 나의 첫마디는 ‘쥐똥 나왔어?’였다. 우리 아이는 말이 느렸었는데 두 돌 무렵 '엄마, ' '아빠, ' '까까, ' '멍멍, ' 다음으로 배운 말이 '쥐똥'이었다. 아이는 매일 ‘쥐똥! 쥐똥!’을 외치며 FBI수사대처럼 바닥에 엎드려 소파 아래와 바닥을 살피는 우리를 따라 했다.



쥐가 처음 나타나고 한 이주 남짓의 쥐수색 소동 끝에 쥐가 몇 마리 잡혔다. 그 뒤로는 다행히도 더 이상 쥐가 나타나지 않았다. 쥐들은 들은 대로 한 번 위험을 느낀 곳은 또다시 오지 않는 영리함을 보였다. 한시름을 놓고 공포와 불안을 가라앉힌 뒤 지난날들을 돌이켜보았다.



쥐란 존재가 내가 이만큼 호들갑을 떨고 괴롭고 공포스러워할 만큼 정말 그렇게 큰 두려움이었을까? 실제로 난 쥐소동 기간 동안 쥐를 보지 못했다. 쥐와 마주치지도 않았으면서 집 안 어딘가에 쥐가 돌아다닌다는 공포가 그렇게나 나를 두렵게 만들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공포란 실제로 나에게 가해지는 물리적 위협이 아니어도 머릿속에서 만들어내는 상상의 스토리 만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 얼마나 에너지 낭비인가. 쥐라는 존재 하나 때문에 몇 날 며칠 나는 엄청난 공포감에 시달렸고 남편을 괴롭혔으며 심지어는 부모님의 미국행을 삼주나 앞당겼다.



솔직히 이쯤 되자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내가 만약 남편과 부모님 없이 혼자 있었던 상황이라면 쥐와 맞서 싸울 능력정도는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고 쥐도 그저 하나의 생명체인데 나한테 그렇게까지 미움을 받아야 했을까. 쥐에게도 미안했다. 똑같은 생명체인데 왜 강아지는 예쁨을 받고 쥐는 미움을 받을까. 너희들도 그저 우주의 작은 생명체로 태어나 자연의 섭리대로 살아갈 뿐인데. 왜 나는 너희들을 그렇게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볼까 싶었다.



어처구니없이 괴로웠던 이주가 지나자 나는 같은 고통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두려움을 다스리는 게 효율적이라 생각되었다. 내가 쥐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고 쥐가 나타나더라도 지금과 같은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있도록 강해지고 싶었다. 나도 지켜야 할 아이들이 있는데 두려운 상황에서 언제까지나 내가 누군가의 등 뒤로 숨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 첫걸음으로 나는 곤충부터 시작하자 싶었다. 나는 벌레나 곤충도 정말 무서워했다. 하지만 이 역시 무섭거나 두려운 대상이 아닌 더불어 함께 사는 존재임을 익혀보는 것은 어떨까 싶었다. 뱃속에서 배웠는지 둘째 아이는 특히 개미만 봐도 사색이 된다. 첫째도 별반 다름이 없다.



우리가 너무 편리하고 깨끗한 환경에서 자라는 게 아닐까. 인간이 곤충이나 벌레와 적당히 더불어 사는 것은 사실 100년 전이었다면 당연했을 것 같았다. 지금보다는 조금 더 자연 친화적으로 나도 변하고 아이들도 그렇게 키우고 싶었다.



곤충 중에서도 특히 기어 다니는 곤충은 딱 질색이다. 내가 제일 무섭고 싫어하는 곤충 중에 하나가 송충이다. 어렸을 때 살던 동네에 송충이가 어찌나 많았는지 가끔 어떤 나무 아래 송충이가 우수수 떨어져 있으면 1분이면 가로지를 거리를 10분을 돌아 피해 갔다. 어쩌다 송충이가 몸에라도 떨어지는 날엔 소리를 지르며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어느 날 집 발코니 화단에 나비가 알을 낳고 갔다. 그 알은 애벌레가 되었고 화단 잎사귀를 꽤나 많이 먹었다. 처음엔 애벌레를 보고 또 바라보고 호흡하며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심장 박동을 가라앉히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날 며칠을 바라보고 구경하다 보니 나중엔 정도 쌓이더라. 한국에 돌아온 요즘은 송충이가 나타나면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내 손으로 기어 올 수 있게 한다. 큰 송충이는 아직도 좀 어렵지만 작은 송충이는 이제 귀엽다고 생각한다. 정말 장족의 발전이다!!



얼마 전엔 지나가다 길에서 죽은 쥐를 보았다. 나는 그동안 본능적으로 운전 중 도로에 죽은 동물이 있어나 쥐가 죽어있는 모습을 보면 시선을 돌려 한 번도 쳐다본 적이 없었다. 너무나도 공포스러워서 불쾌한 장면에서 시선을 거두는 연습이 무의식 중에 얼마나 단련되어 있는지 모른다. 피 흘리는 영화도 거의 보질 못한다. 그러던 내가 죽은 쥐를 그저 물끄러미 잠시 3초간 바라보았다. 죽은 쥐야 평안하길. Rest In Peace를 외치는 내가 스스로 얼마나 뿌듯한지 모르겠다.



재작년 이영미 작가의 '마녀체력'을 읽으며 죽은 쥐가 둥둥 떠다니는 한강에서 수영도 하고 마라톤을 뛰는 작가의 강인한 모습에 매료되어 나도 달리기를 시작했다. 아직은 한강 물에 입수하기엔 터무니없이 실력도 용기도 부족하지만 철인 3종 경기에 도전하는 날이 내게도 반드시 올 것이라 확신한다.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마음 연습과 함께 운동을 하면서 조금씩 몸을 단련시켜나가고 있다. 이렇게 나는 세상과 좀 더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더불어 살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오늘도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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