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넘어졌다.
주차장에서 황급히 트렁크에 짐을 싣고 있었다.
그 사이 일행이 아이들 킥보드를 싣기 편하게 내 뒤에 놓아두었다.
미처 뒤를 보지 못했다. 킥보드를 밟고 그대로 미끄러져 등으로 제대로 낙하했다.
허리가 주차 방지턱으로 떨어져 윗등을 세게 부딪혔고 그 반동으로 팔꿈치가 땅바닥으로 내리쳐졌다. 오른팔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왼팔로 겨우 운전을 해서 아이들과 집에 왔다. 집에 오니 오른쪽 네 번째 다섯 번째 손가락이 저리고 잘 접히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니 왼손 중지, 약지, 새끼손가락도 저려온다.
오늘 하루 예정된 대다수의 일을 취소했다. 할 일이 진짜 많았는데 그냥 아파서 일찍 일어나는 것도 포기했다. 친정 아빠한테 첫째 등원을 부탁했다. 며칠 뒤 정말 오랜만에 여행을 떠나시는 아빠가 내가 다친 것을 아시면 부모님이 걱정하실 듯하여 더 유쾌하게 안 아픈 척 아빠와 첫째를 얼른 내보냈다. 둘째를 셔틀에 태우자마자 가장 가까운 정형외과가 위치한 옆 동네 상가까지 걸어갔다.
터덜터덜 걸으며 횡단보도를 건너 봄날씨를 만끽하니 내가 진짜 한가롭고 여유롭다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웃겼다. 아무도 안 시켰는데 누가 이렇게 바쁘게 살라고 한 거지? 하루 계획이 무너졌지만 일상에 큰 타격을 받지 않는 삶에 감사했다.
기존의 커리어를 자의 반 타의 반 그만두고 진짜 좋아하는 일을 찾으며 살기 위해 하루하루 고군분투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멈췄다고 생각했는데 나 또 엄청 달리고 있었잖아. 새벽에 일어나 책 읽고 글 쓰고, 아이 보내고 운동 갔다가 공부하고 일하다가 집안을 구석구석을 비우고 정리한 뒤 아이를 다시 맞이하려고 계획했었던 하루. 신호등에 멈춰 서서야 깨달았다. 내가 요즘 멈춰서 여유롭게 나를 제대로 돌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또 분단위로 치열하게 살고 있었잖아?
다치거나 아프고 나면 진짜 멈추는 게 뭔지 보인다.
시계를 들여다보지 않고 오늘의 할 일 생각하지 않는 거 오랜만이네. 천천히 봄날씨를 즐기면서 옆 동네 상가에서부터 집까지 걸어가는 15분가량을 왜 못 즐기고 살았을까. 이렇게 여유롭고 한가로운데. 이젠 주 5일 중 하루는 여유 Day로 배정해야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그래 주 5일 쉴 틈 없이 사는 것은 너무 빡빡한 것 같아.
유난히 연두색 향기를 품은 나무들과 빨강 보라의 찬란한 빛을 내뿜는 영산홍이 눈에 들어온다. 제대로 봄이구나 싶다.
요즘 안 그래도 새로운 일들이 많이 들어오고 배우고 싶은 것들이 많아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조금만 에너지가 생기고 조금만 여유가 나면 틈을 비집고 무언가를 시작하거나 배우는 나다. 그러면서 열정 과부하에 걸려간다고 느꼈던 날들이었다.
어김없이 몸이 말해준다.
워워. 잠시만 멈춰. 제대로 잘 가고 있는지 확인하란 말이야.
통증과 손 저림에 시달리고 있지만 다행히 뼈에 금이 간 곳이나 골절은 없다. 이만하길 다행이다.
어쩐지 집이 좀 어수선해서 정리를 해야겠다 마음먹던 한 주였다. 그리고 유난히 바쁘긴 하지만 제대로 한곳에 집중을 잘하고 있는 것인가 많은 생각이 들던 참이었다. 여기저기서도 내게 '뚜렷한 목표를 세워라'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비워낼 것을 비워내고 집중해야 해'
딱 적절한 시기에 적절하게 다쳤다. 아파 죽겠는데 좀 웃기지만 이 상황이 너무 내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번 한 주는 시간을 내어 내 10년을 구체적으로 그려볼까 한다. 막연하게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이제 때가 된 것 같다. 아주 구체적으로 내가 무엇을 할지 그리고 10년 뒤에 나는 어떤 모습일지.
딱 10년을 염두에 두고 지금부터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 나가기 위해 그림을 그려본다.
비워내는 한 주의 시작.
빈 도화지에 닿을 연필을 쥐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