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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나의 인생을 바라보기

by 서린

지금으로부터 어언 20년도 더 전이겠다. 중학생 때인지 고등학생 때인지 기억에 나지 않는다. 국어시간에 문학의 시점에 대해 배웠던 기억이 있다. 1인칭 주인공 시점, 3인칭 관찰자 시점,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 등이 떠오른다. 분명 시험에서 주관식 단답형 문제로 나왔던 것 같기도 하다. 제시문이 주어졌고 어떤 시점으로 작성된 글인가에 대한 답을 적었던 기억이 지금 이 글을 쓰는 내 머리에 스쳤다. 이렇게 학습한 내용은 시험용이었고 20년간 내 머릿속에서 휘발했다. 우리의 교육과정은 이렇게 밖에 가르치지 못했을까. 20년이 지나 기억 속에서 꺼내 삶에 다시 적용해 본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동물이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도 인간은 허구를 만들어내는 능력 덕분에 협력하고 문명을 만든 동물이라고 한다. 인간인 우리는 대다수 호모 사피엔스 종에 속한다. 호모 사피엔스 종은 허구를 믿고 집단적으로 상상하고 협력하는 능력을 통해 지구의 주인이 된 유일한 인류 종이다. 이러니 요즘 말하는 대로, 꿈꾸는 대로, 믿는 대로 세상이 변하고 우리의 꿈이 이루어진다는 말은 내게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우린 이 꿈꾸는 능력을 미래를 위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용할 때도 있지만 또 자책 비난 등과 같은 적절하지 못한 방식으로도 사용하기도 한다.



나름 꿈꾸는 대로 성취해 왔다고 생각했다. 원하는 대학을 갔고 원하는 곳으로 교환학생도 갔다. 교환학생에 다녀와 대학 졸업 후 유학을 꿈꾸며 준비도 했다. 유학 비용을 마련할 겸 직장 생활을 통한 경제적 자립이 필요해서 회사도 6년간 잘 다녔다. 회사를 다니면서 장학금을 받으며 석사학위도 마쳤고, 결혼을 하여 유학 길에 올랐으며 두 아이도 낳았다. 모든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의 최선의 선택을 했고 큰 그림에서 목표하는 대로 인생의 마일스톤을 달성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사고는 상자 안에 갇혀버렸다. 삶이 원하는 대로 더 이상 풀리지 않고 모든 것을 감당하기에 힘에 부치자 나는 나를 희생자로 만들어버렸다. 희생자가 꾸며낸 이야기는 내가 원했던 모든 과거의 이야기에서 나 자신을 정당화하기에 급급했다. 분명 내가 원했고 최선의 선택이라고 했던 그 선택들을 회의하며 내가 왜 그때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는지 나를 변명했다. 그리고 상황에 탓을 돌리기 시작했다.



내가 남편한테서 좋았다고, 그의 장점이라고 느꼈던 그 특성들은 고스란히 그의 단점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미국 생활을 꿈꾸며 초기에 경험했던 해외 생활의 장점과 즐거움이 어느덧 보이지 않고 불만으로 이어졌다. 한평생 엄마한테 받아온 사랑과 정성은 온 데 간 데 사라지고 피해자처럼 나를 묘사하기 시작했다. 아이를 좋아해서 '2-3명은 꼭 낳고 살겠다' 던 마음이 '왜 나는 아이 여럿을 당연히 낳을 생각을 했지? 누가 그런 생각을 내게 심은 거지?'로 바뀌어가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내가 꾸며낸 모든 이야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경험을 했다. 더 이상 과거의 꾸며낸 이야기에 빠져있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호모 사피엔스 종의 특유의 힘으로 유연하고 창의적인 미래를 보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극적으로 마음이 바뀌는 경험을 하다 보니 내 마음이 움직이는 방식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걸음 물러나서 나를 바라보고 내가 얼마나 과거 혹은 미래의 이야기에 매여 살았는가 싶었다.



위기의 순간, 스트레스로 압박받는 순간, 일이 잘 안 풀리는 순간, 불안과 긴장으로 가득한 순간 우리는 본능적으로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만 상황을 바라보게 된다. 내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나를 둘러싼 나의 삶 이야기에는 ‘나’ 중심으로 돌아간다. 상대방의 겉모습만 묘사할 뿐 상대방의 마음까지 들여다보거나 헤아리기 어렵다.



삶에서 한걸음 물러나는 연습을 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벗어나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이동하고자 했다. 나의 마음과 타인의 마음이 더 눈에 들어온다. 남편의 마음은 이랬구나. 엄마는 이런 마음이었구나. 상황은 이랬을 뿐이구나. 남편과 엄마의 보석과 같은 귀중한 면모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면서 내게 참으로 평온하고 충만한 순간이 찾아왔다. 정확히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나를 바라보며 아 내가 또 이런 이야기를 만들고 있구나 알아차리는 과정이었다. 관찰자 시점에서 묘사하는 세상은 고요하고 평온하다. 관찰자는 어떠한 생각도 감정도 꾸며내지 않는다. 그저 바라볼 뿐이다. 관찰자가 되고 나니 진짜 나와 마주하게 된다. 물론 그런 경험이 계속 지속되는 것은 아니고 관성의 법칙에 의해 1인칭으로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물이 흐르듯 순환하고 있지만 말이다.



내 삶이 어땠는지 '진짜 나'를 어떻게 잠깐이라도 마주할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을 좀 더 낱낱이 드러내고 싶다. 한꺼번에는 어렵겠지만 차근차근 용기를 내어보고 싶다. 요즘은 마음이 잔잔한 편이라 과거에 대한 생각이 잘 안 나는데 한 번은 제대로 정리하며 생각을 가두어보아야 지녔던 생각을 해방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이 과정이 내게 더 큰 자유를 줄 것 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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