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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아메리카노에 비친 하늘과도 같다

by 서린

어느 하루였다. 12시에 역삼역 근처에서 약속이 있었다. 시간이 40분가량 제법 많이 남았다. 포스코타워 스타벅스가 보였다. 스타벅스를 잘 가지 않지만 지갑 안에 선물 받은 기프트카드가 떠올랐다.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를 한 잔 주문하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가방에 있던 책을 한 권 꺼내 읽기 시작했다.



내 커피가 나왔다. 커피 위에 갓 내려진 커피의 크레마가 보인다. 크레마의 부드러움을 놓칠세라 자리에 앉자마자 한 모금을 들이켠다. '음… 스타벅스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는 맛이 그냥 그래…'를 생각하며 커피 잔을 내려놓고 책을 다시 집었다.



책을 읽다가 중간중간 생각이 들면 고개를 든다. ‘음.. 작가의 말이 맞아…’ 혹은 ‘음… 진짜 그럴까?’ 하며 잠시 창 밖 허공을 잠시 바라본다. 다시 책으로 돌아온다. 한참을 읽다 마음에 드는 문장이 나왔다. 밑줄을 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형광펜을 내려놓고 잠시 또 생각에 잠겨본다. 시선을 다시 책으로 옮기기 전 한 김 식은 아메리카노가 보인다. 그리고 문득 아메리카노의 비친 하늘을 바라본다.


'오늘 하늘이 파랗구나.'


순간 행복을 느낀다. 이 여유로움, 고요함, 혼자만의 시간, 잠시의 찰나에 마주하는 하늘, 그것도 직접 바라본 하늘이 아닌 아메리카노에 비친 하늘이 이렇게 예쁠 수 있나 싶은 마음에 잠시 삼천포로 빠져 행복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래 내가 생각하는 행복은 이런 거야.


고요, 여유, 책, 사색





실은 지난 4일간 행복에 대해 글로 하도 떠들다 보니 오늘쯤 되자 약간 혼란스러운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행복에 대해 말할 입장이나 되나 싶다. 문득 행복에 대한 책 속 한 구절도 떠오른다. 행복에 대해 거창하게 논하는 사람치고 행복을 제대로 모를 수도 있다는 말.



그런데 행복은 사람마다 정의 내리기 나름이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래서 절대적인 진리나 정답도 없다.

내가 요즘 정의 내린 행복이 누군가가 정의 내린 행복과 맞닿으면 또 그게 그렇게 좋을 수 없다. '맞아 맞아!!!'를 연신 외치며 두 손바닥을 마주하고 짝짝짝 마음을 나누고 싶어진다.



2025년의 봄, 나의 행복을 이렇게 정리해 본다.


'고요함과 평온함'

그리고 그 안에

'존재와 존재가 만나 공명할 때'



고요함은 나에게 어느 정도의 공간과 거리가 필요함을 말한다. 아이들이 어리다 보니 요즘 내게는 나만의 공간, 나를 잘 느낄 수 있는 마음속 공간과 외적 공간이 조금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평온함은 도파민보다는 세로토닌 쪽이다. 따사로운 저녁노을의 햇살 아래 잔잔한 파도가 치는 해변가가 떠오르기도 하다. 요즘 루틴에서 평온함을 주는 요소로 책 읽기, 글쓰기, 명상, 요가, 달리기 정도는 확실하다.




'존재와 존재가 만나 공명하는 순간'

이 표현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가치관을 공유하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이야기를 꽃피우는 순간뿐 아니라 나와 음악의 선율이 만날 때, 나의 마음이 아름다운 색감에 동할 때, 부드러운 바람이 살갗을 스칠 때, 발코니 나무들이 힘차게 새순을 틔울 때 등 무수히 많다. 사람과 음악과 그림과 바람과 나무의 존재는 나와 함께 울린다. 찰나의 순간이다. 그런 순간들에 나는 행복하다. 그리고 그 찰나를 붙잡으려 하지 않는다.



나의 행복의 정의는 시시각각 변하며 또 연령대마다 삶의 굵직굵직한 마일스톤마다 달라짐을 느낀다. 요즘 정의 내린 이 행복감으로 당분간의 생활을 풍성하게 꾸려나가면 그만이다. 그리고 또 앞으로 고통이 찾아오고 견디고 나면 행복에 대한 새로운 정의로 살아가면 될 것이다.



그렇게 30-40년이 흐른 어느 날 내가 인생을 돌이켜보며 행복은 이 것이었노라 한 마디로 정의 내릴 수 있을까? 짐작건대 행복은 ‘그저 먼지였다.’ 혹은 ‘진짜 나와 만나는 것이었다.’ 등의 뻔한 이야기로 귀결될 것 같다. 정의에 집착하지 말자. 그냥 지금 이 순간을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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