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는 이기고 토끼는 졌다. 우리가 흔히 아는 토끼와 거북이 동화가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지만 자세히 보면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우리는 누구나 도파민의 보상을 원한다. 본능적으로 추운 몸을 따듯하게 녹이고 싶고, 고픈 배를 빨리 채우고 싶다. 그런데 이 도파민 굴레에 빠져드는 순간 어느새 우리도 모르게 ‘더 빨리’ ‘더 많이’를 외치게 된다. 그렇게 탈이 난다.
어렸을 적 짜장면은 나의 최애 음식 중 하나였다. 소화를 잘 못 시켰던 나는 짜장면을 먹고 자주 배탈이 났다. 그런데 인간의 기억은 참 간사하지. 내가 먹다가 체한 기억보다 짜장소스의 달콤함, 그리고 고픈 배를 채우며 느꼈던 만족감이 더 강렬했던 나머지 같은 실수를 종종 반복했다. 심지어는 ‘짜장면은 소화가 안 된다’는 생각이 ‘각종 면류는 빨리 먹으면 체한다.’라는 깨달음으로 확장되기 전까지 다양한 음식을 먹고 탈이 났고 밤새 괴로워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이 간단한 경험이 인생의 수많은 법칙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이 간단한 교훈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 몸으로 체득하는 데까지 삼십몇 년의 세월이 걸렸다.
짜장면을 먹다 체하던 버릇은 학창 시절 벼락치기 습관으로 이어졌다. 벼락치기 공부를 하다 보면 몸이 아프거나 시험을 망치는 경험을 했음에도 간혹 벼락치기 공부가 성공했을 때 얻는 도파민 보상은 컸다. 몇 번의 시험 실패와 고생의 기억은 점수가 잘 나왔을 때의 보상으로 잊혔다.
조금 힘들고 아프고 스트레스받으며 내 몸을 고생해서 얻는 결과들은 만족스러웠다. 나이가 들 수록 원하는 보상의 규모도 커졌다. 보상의 규모만큼 탈이 점점 심해져 갔지만 견딜만했다. 대학입시, 자격증, 취업, 학위, 재테크, 결혼과 출산까지 삶의 다양한 국면에서 어렸을 적 짜장면 먹던 버릇을 알게 모르게 난 여전히 되풀이하고 있었다.
결국 탈이 났다. 탈이 나도 대단히 나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몸과 마음이 동시에 고장 났다. 어느새 나의 마음은 더 이상 즐겁지 않았고 상황을 탓하기에 이르렀다. 만족감과 평온함보다는 불안, 초조, 자책, 시기심 등의 감정으로 뒤덮였고 나의 몸 역시 주기적으로 현대의학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야 일상을 유지할 수 없었다. 짜장면을 탓할 것이 아니라 나는 어떤 소화기능을 가진 사람인가를 먼저 살폈어야 했다. 나는 음식을 천천히 먹어야 하며 각종 면류는 특히 더 조심해서 먹어야 한다는 그 어렸을 적 깨달음이 삶의 전반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이 걸린 것이다.
참으로 이상하지. 자동차가 멀쩡할 땐 고속도로에서 빠져나갈 생각을 잘 못한다. 기름이 떨어지고 경고등이 울리고 운전자가 배고프고 졸려야 그제야 자동차는 멈춘다. 직접 멈추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사고라도 났다면 끔찍하다.
멈추고 나서야 나는 평소에 해오던 두 가지 고민 앞에 더 큰 전제가 필요했을 알았다. 앞으로 어떤 길을 택할 것이고 어떤 속도로 갈 것인가 보다 더 중요했던 질문은 길을 선택하려는 ‘나는 누구고’ ‘왜’ 길을 선택하려고 하는가였다.
나는 그렇게 2022년 여름 멈춤을 택했다. 그리고 지난 2년간 치열하게 나를 탐구했다. 덧붙여 ‘왜’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물론 가만히 앉아서 질문만 던지지는 못했다. 관성의 법칙에 의해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뱅글뱅글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래도 적어도 이 기간 동안 내 몸과 마음을 재정비하며 나에 대한 신뢰를 다져나갔다. 숙련된 운전자로 그리고 더 성능 좋은 자동차로 거듭나는 중이다.
동서남북으로 내 앞에 펼쳐져 있는 길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 요즘은 심장 뛰는 즐거움과 열정으로 천천히 어느 길을 택할지 살펴보는 중이다. 현재는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를 택했지만 평생 이 길을 택하겠다는 마음을 가진 것은 아니다. 출렁이는 파도의 물결처럼 어느 길이 ‘좋다’라고 판단하지 않고 그저 나를 믿고 묵묵히 걸어가 보려고 한다. 360도로 펼쳐진 길 중 어느 길을 택하더라도 ‘나와 타인의 자유’라는 목적지를 향해간다는 확신이 생기고 있다. All Roads Lead to Freedom!
작년엔 달리기를 시작했고 올해는 요가를 시작했다. 요가를 할 땐 특정한 동작을 완성해 내려고 애쓰지 않는다. 어느 날 안되던 특정 동작을 성공할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즐거움과 기쁨이 있지만 이내 그저 기쁨이 왔구나 하고 바라본다. 내 몸 구석구석을 느끼기만 하면 그만이다.
러닝을 할 때 내가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얼마나 많은 거리를 달렸는지는 모른다. 시계와 핸드폰을 놓고 뛴다. 그저 코로 쉬는 호흡에만 집중하고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어떤 동작을 만들었다는 느낌, 어떤 기록을 달성했다는 느낌이 분명 내게 도파민을 분비하고 쾌감을 가져다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마음이 자꾸 반복되면 동작과 기록에 집착할 수도 있음이 예상된다. 그리고 짜장면처럼 탈이 날 수도 있겠지 경험으로 안다.
아직은 그저 내가 나를 느끼는데서 만족한다. 손끝이 발에 잘 닿지 않는 나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한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만큼만 묵묵히 천천히 거북이처럼 걸어가는 중이다.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에서 간과한 것이 있다. 바로 마음이다. 인생은 어차피 한 번의 레이스가 아니다. 거북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토끼가 어떤 배움을 얻었는지 알 수 없다. 탈이 나본 적 없는 거북이는 다음 레이스에서 이전의 승리에 도취해 뒤늦게 탈이 날 수도 있다. 한 번 탈이 나본 토끼는 정신을 차렸을 수도 있고 놀다가 한 번 정도 진 것쯤엔 별로 큰 타격이 없어서 전혀 배움이 없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많은 경험을 통해 실패도 해보고 몸으로 익혀 자신만의 속도를 조절하고 마음을 다잡는 일 아닐까.
좀 빨리 달리고 인생을 즐겼던 토끼의 태도도 마냥 나쁘지만은 않다. 놀다가 망해본 경험이 한 번도 망해보지 않았던 경험보다 좋을 수도 있다. 게다가 탈이난 사람마다 느끼는 고통의 크기도 제각각이다. 그리고 그 고통을 잊는 속도도 몸에 새기는 속도도 다르다. 그러니 누구의 고통이 더 큰지 작은지 절대적인 비교는 하지 말자. 다 각자가 감당할 만큼의 고통이 찾아오고 그걸 극복하려고 애쓰는 모두에게 진심 어린 마음으로 응원을 보내면 될 일이다.
마지막으로 누가 빨리 가느냐 누가 지점에 먼저 도착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왜 경주를 선택했고 어떤 방식으로 경기를 펼칠 것이며 경주를 하면서 어떤 마음인지를 살피는 것이 내겐 제일 중요해 보인다. 어차피 인생은 한 번의 레이스로 배움을 얻기엔 터무니없다. 승자와 패자로 가르는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자. 토끼도 거북이도 인생에서 타이밍이 다를 뿐 각각 자신만의 싸움에서 승리를 움켜쥐는 승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