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확언으로 시작하는 하루
새벽 4시 45분. 새소리가 들린다.
알람이다.
일단 핸드폰을 대충 만져 소리를 잠재운다. 온몸이 너무 피곤하고 눈이 감겨 일어날 수가 없다.
어제 9시 반에 취침하며 내일은 반드시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리라 다짐했건만. 컨디션이 따라주지 않는다.
'아 잠시만 누웠다가 이제 일어나야지' 하고 5분 정도 눈을 붙인다.
마음은 5분이 지난 것 같은데 시계를 보니 5시 반이다.
'아 이젠 정말 일어나자' 하면서 스트레칭을 해본다. 여전히 눈꺼풀에 누가 풀을 발라놨나 싶지만 몸이라도 움직이면 깨어나겠지 싶은 마음으로 다리를 왼쪽 오른쪽 뻗어가며 뻐근한 몸을 풀어본다.
수면 어플을 종료한다. 침대에 누운 시간 8시간, 수면시간 6시간 30분이 적힌 숫자를 바라본다. 요즘 간절한 마음으로 컨디션 관리를 위해 7-8시간 수면을 지키려고 노력 중이다. 분명 눕자마자 잠이 들었는데 6시간 반이라는 숫자를 보니 '아 충분히 못 잤네.' 하는 생각이 든다.
부엌으로 가서 따듯한 물을 한 잔 마신다.
감기 기운이 여전히 남아있어 목이 좀 따끔하다. 오늘은 두 잔은 마시고 시작해야겠다 싶다.
몸이 무거워 스트레칭을 좀 더 하고 싶지만 산더미처럼 쌓인 할 일이 생각난다. 약간 긴장된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는다.
어제 간략하게 정리해 놓은 한 주 간의 일정과 오늘의 할 일을 다시 찬찬히 들여다본다. 그리고 이내 펜을 들어 매일 내게 하는 주문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의 날짜 2025년 4월 7일을 찾아 한 문장씩 적어 내려간다.
나는 자유롭다.
나는 미움받을 용기를 내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산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
나는 나의 자각의 그릇을 키운다.
나는 모든 인간을 존중하고 사랑한다.
나는 나를 깊이 있게 연민하고 수용한다.
이 일곱 가지 주문들은 그때그때 주기적으로 계속 바뀐다. 나의 모든 에너지와 주파수를 한 곳에 맞추기 위해 적는 문장들이다. 때문에 아무래도 내가 바라는 모습이 되고 싶은 염원을 나타낸다. 그런데 오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상태에 아직 '충분히' 도달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까?
주문의 내용을 하나하나 실제로 경험하기도 했고 행복을 느꼈었다. 생각의 전환으로 엄청난 자유와 해방감을 느낀 적도 있고, 과거와 미래가 아닌 현재에 몰입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지금 이 순간을 즐긴 적도 있다. 내가 만든 나의 이야기를 한 걸음 물러나 바라보며 내 생각과 감정들이 전부 틀릴 수도 있음을, 뒤통수 맞는 경험을 하며 의식이 확장되기도 했고 끊임없이 나를 알아차리며 한 걸음 물러나 평온함과 고요함을 느끼기도 했다. 나를 가장 아프게 했던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과정과 매 순간 나를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서 충만함을 경험했다.
이러한 경험들이 소중해 지속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반년정도 위 문장들을 적어나갔다. 물론 매일은 아니다. 주문처럼 삶을 유지하고 또 그 경험의 빈도를 늘려나가고 싶기에 나는 이미 그렇게 되었다고 세뇌하는 방식이다. 믿는 만큼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이 마음이란 게 교묘해서 의구심이 들 때가 종종 찾아온다. 그게 바로 오늘 아침이다.
새벽 5시 43분. 책상에 앉은 지 십여분이 채 지나지 않아 큰 아이가 일어나 나를 찾는다.
고단한 몸을 어렵게 깨워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인데, 더욱이나 할 일이 정말 많은 바쁜 하루인데, 큰 아이가 안방으로 들어가며 나를 찾는 소리가 들린다. 마음이 무겁다.
무거운 마음으로 이부자리가 이미 정돈된 안방 침대에 함께 누워 잠시 아이가 다시 잠들기를 기다린다. 십오 분 정도가 흘렀을까. 아이는 계속 잠들지 않고 내게 이야기를 건넨다. 이내 다소 조급해진 마음으로 내가 아이에게 단호하게 말을 한다.
'00야. 이렇게 2주째 매일 새벽에 안방으로 오면 엄마가 오전 시간을 보낼 수가 없어. 6시 반까지는 엄마가 엄마의 시간을 보내야 해. 지금 시간이 너무 이르니 더 자야 한다. 계속 이렇게 엄마가 이야기하는데도 새벽에 안방으로 오면 엄마가 혼을 내야 해. 엄마 일단은 나가 볼 테니 혼자 뒹굴뒹굴하다가 잠들어봐.'
방문을 나서며 순간 또 나를 자책한다.
아이에게 꼭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을까.
'잘 잤어? 좋은 아침이지. 우리 00이 무슨 꿈꿨어? 우리 조금만 더 자면서 꿈 하나 더 꿔볼까?'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책상에 다시 앉으며 생각해본다. 심호흡을 하고 다시 집중하려는데 큰 아이는 잠이 오지 않는다고 방문을 두드린다. 그 소리에 둘째까지 깬다. 갑자기 마음이 천근만근이다. 다소 낮고 단호한 목소리를 내며 근엄한 표정을 짓는다.
'얘들아. 시계 보이지. 긴 바늘이 여기 6까지 올 동안 엄마는 방에 있을 거야. 6시 반까지는 엄마 시간이거든. 그 뒤에 엄마가 나올게 알겠지?' 하고 방문을 닫는다.
이렇게 말해 놓고는 마음만 더 불편해서 잘 집중이 되지 않는다. 아이들이 방에 들락날락하면서 말을 거는데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하지만 정신없는 와중에도 오늘의 바쁜 하루를 쭉 정리하고 우선순위를 매긴 뒤 급히 처리할 수 있는 일 한두 가지를 하고 나니 조금 마음이 가벼워진다. 아이들도 포기하고 혼자 놀고 있다.
이내 물끄러미 내가 쓴 주문들을 바라보며 내게 질문한다.
지금의 나의 마음은 자유로운가?
나는 아이들에게 미움받기 싫어 단호하지도 친절하게 대해주지도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의 마음은 지금 이 순간에 있지 못하고 오늘 할 일들을 생각하며 미래를 걱정하는 것은 아닌가?
아침에 나만의 시간을 꼭 보내야 한다는 신념을 고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이들의 이른 기상 때문에 무거운 감정에 휩싸여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과연 아이들의 입장을 존중했을까?
나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일곱 문장 제일 앞에 한 문장을 추가하기로 마음먹는다.
'나는 지금 이대로 충분하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며 '충분히 못 잤어' 대신 '이 정도면 충분하다'라고 생각을 선택할 수 있다. 나의 컨디션이 '안 좋다' 대신 피곤하지만 오늘 하루를 힘차게 보내기에 '충분하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아이들이 일어나 내 시간을 빼앗길까 '조급하다' 대신 상황에 맞추어 '충분하게' 여유 있는 하루를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해 본다.
덧붙여 때로는 의구심에 빠지기도 하는 지금의 나의 상태와 주문 간의 괴리감을 느끼는 대신 '음 당연히 자책할 수도 있고 내 목표가 너무 먼 것 같다는 의심도 들 수 있지. 하지만 지금 이대로 충분해'라고 생각해 본다.
자책 대신에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 그냥 자책도 의구심도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보자 생각한다.
한번 더 꾹꾹 눌러써본다.
'나는 지금 이대로 충분하다.'
주문이 통했다. 방문을 열고 아이들에게 달려가 힘껏 안아주고 뽀뽀해 주며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은 충분한 하루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