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음색이다.
내가 삶에서 추구하는 메인 키워드가 여러 개 있는데 그중 하나는 ‘조화’다. 난 조화로운 것이 좋다. 어느 하나만 두드러지기보다는 전체 안에서 각각 고유의 특성이 조화롭게 발현되는 찰나가 좋다. 누군가 불편한 에너지를 발산하면 내가 텅 빈 공간이 되어 그 에너지를 완화시켜주고 싶기도 할 때가 있고 누군가 기쁨에 벅차있으면 덩달아 나도 신나게 하이파이브를 해주고 싶다.
음악과 관련된 각종 예술은 다 좋다. 오케스트라, 합창, 아카펠라, 무용, 발레, 뮤지컬, 대중가요 등 여러 선율과 퍼포먼스가 합쳐진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넋을 놓고 빠져든다. 감미로운 가수의 목소리와 그것을 적절히 뒷받침하는 악기 반주를 들을 때는 형용할 수 없는 몽글몽글함이 있다. 숨이 잠시 멈춰지고 고요해지며 가슴이 먹먹해진다. 공명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가만 보면 조화로움이 연주나 노래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좋은 노래도 있지만 노래를 듣는 날의 날씨, 나의 마음, 과거에 느꼈던 감정, 노래를 들으며 떠오르는 대상까지 많은 것들이 조화를 이룰 때 행복하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행복할 때도 마찬가지다. 음식 자체보다도 누구랑 어디서 먹으며 그때의 나의 마음가짐은 얼마나 여유로운지 그날의 날씨는 어떠한지 총체적인 경험이 중요하다.
조화를 추구하는 성격 탓이었을까. 지나고 보니 내가 부모님 말씀을 곧잘 듣고 자랐던 것 같다. 큰 그림에서 보면 부모님이 원하시는 대로 어느 정도 삶의 중요한 선택을 한 것 같다. 작게는 정해져 있는 통금시간을 어긴 적도 별로 없다. ‘항상 몸을 따듯하게 다녀야 한다.’ ‘소주 세 잔 이상 마시지 말아라.’ 등과 같은 사소한 말도 대학생 때까지는 잘 새겨들었던 것 같다.
왜 그렇게 해야 하나 싶을 때도 있었지만 질문의 꼬리를 늘여가며 갈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내가 맞추는 것이 편했고 항상 조화로운 상황이기를 바랐다. 그래서 누군가를 만날 때도 상대방 의견에 맞추는 것이 좋았다. 둘이서 함께 느끼는 즐거움이 내 개인적 취향보다 더 좋았던 것 같다. 아니 정확히는 함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내 취향이었다.
왜 그랬을까? 조화로움 안에 하나 되는 느낌이 있다.
그 느낌이 소속감 같다. 너와 내가 같다는 느낌. 너와 내가 비슷한 집단이라는 느낌. 난 함께하는 것들과 소속되어 하나라는 감정을 느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내게도 색깔이 있다. 투명한 색처럼 살아왔지만 나만의 색을 분명 띠고 있다.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가 지나치게 강렬한 색으로 나를 내 색을 덮어버리려고 하거나 나의 경계를 무너뜨리려고 할 때 나는 괴롭다. 몇 번의 괴로움을 겪고 나니 색깔에 대한 선입견도 생겼다. ‘저 색은 나와 안 맞는 색일 거야.’ , ‘저 물감은 농도가 너무 짙어.’라고 생각하며 나를 방어했다. 괴로운 것보다는 나를 보호하는 편이 수월하니 대상이 어떤 색상인지 빠르게 판단하고 색상을 범주화하여 나와 맞는 것 혹은 맞지 않는 것이라는 틀에 쉽게 가두었다.
정작 제일 중요하지만 간과했던 것은 내가 무슨 색인지 살펴보는 것이었다. 내가 무슨 색이고 어떠한 색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고려해 보지 못했다. 또 하나의 큰 착각은 나는 하나의 농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때로는 나의 농도가 옅을 때도 있지만 나의 농도가 짙을 때도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내가 누군가를 받아들이기 수월할 때도 있지만 내가 다른 이들을 물들이기 쉬울 때도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인생은 경계를 세워가는 것 아닐까.
나의 색깔이 무엇인지 알고 나만의 농도를 맞춰가는 일일 것 같다. ‘나는 이 경계까지는 괜찮습니다. 여기서 벗어나면 제가 힘듭니다.’를 알아가고 그것을 알리는 과정의 연속이 아닐까 한다.
소속되어 조화롭고 싶은 것도 다른 색으로 쉽게 물들고 싶지 않은 것도 모두 인간의 본성 같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세상이다. 자연을 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태양, 달, 나무, 물, 공기, 대지 어느 하나가 없어서는 안 된다. 조화를 이루어야만 살 수 있다. 동시에 각자는 자신만의 공간을 원한다. 그리고 그 경계를 침범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경계가 무너지면 조화와 균형이 깨진다. 자연의 이치처럼 인간도 그러하다.
어느덧 내 색깔이 뭔지 궁금해졌다. 누군가와 만났을 때 연예인 이야기, 드라마 이야기, 명품 이야기를 하면 공허함을 느꼈다. 분명 예전엔 나도 남들이 보니까 드라마가 보고 싶었었고 남들이 가지는 명품이 가지고 싶었다. 누군가와의 만남 혹은 소속감이 주는 온기가 좋아 서로 함께 물들고 싶었었다.
처음에는 공허함이 대화의 소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핵심은 마음이다.
이제는 누군가와의 이야기 소재 안에 '나의 마음'이라는 중심이 없으면 겉도는 느낌이 든다. 내 마음에 대한 이야기는 쏙 뺀 채 우리를 둘러싼 것들 가족, 직장, 취미에 대한 이야기만 나누면 왠지 모르게 닿는다는 느낌이 안 든다. 가족에 대한 나의 마음, 일에 대한 나의 마음, 취미를 영위하는 나의 마음을 나누고 싶다. 명품을 소비하며 드는 나의 생각, 드라마를 시청한 소감이 어떤지, 연예인의 삶을 통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반추하는지가 궁금하다. 이야기의 중심 안에 '우리'가 있어야 한다. 명품, 드라마, 연예인의 소재는 흥미가 없지만 그것을 이야기하는 상대방이 누군지 그의 마음이 어떤지는 너무 흥미롭다. 사람이 궁금하다.
나의 색이 점점 분명해져 간다.
나의 색을 단정 짓기엔 이르다. 하지만 나의 색은 '마음'이 아닐까.
'마음색'이라고 이름을 지어본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한 상태에서 사람을 만날 때 즐거우면서도 외롭던 경험을 반복했다. 만나면 좋은데 왜 좋은지, 동시에 왜 외롭고 고독한지도 몰랐다. 종종 군중 속의 고독이란 말을 썼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뭘 해도 이중적인 마음이 잘 들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런 마음이 들어도 그냥 그렇구나 하고 만다. 나는 사람과도 친구지만 사물이나 자연과도 친구다. 꽃과 나무와도 대화한다. 사람에게 지칠 땐 자연과 소통하면 될 일이고 자연과의 소통이 조금 외롭게 느껴지면 사람에게 가면 그만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말은 이렇게 해도 여전히 나는 사람을 너무 좋아한다. 만나는 것도 좋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무궁무진한 영혼을 가진 존재라 궁금하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에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요? 이런저런 질문들을 끊임없이 묻고 싶다. 또 그런데 막상 만나면 그저 알아가기까지 천천히 뜸을 들이는 시간도 좋다. 관계마다 속도가 다르다. 그 관계를 이루는 주위 환경도 다르고 삶의 시간대도 다르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서 우리만의 속도를 조절해 나간다.
여태 내가 행복에 대해 보아 왔던 수많은 정의 중 정혜신 작가의 [당신이 옳다] 중 한 구절이 가장 와닿는다. ‘존재와 존재로서 마음과 마음이 포개질 때 지극한 행복을 경험한다.’ 존재와 존재가 만나 공명할 때가 바로 내가 느끼는 행복이다. 내게 그 존재는 사람이나 사물이나 자연이나 다 상관없다.
너와 내가 만나 마음이 맞을 때.
아름다운 음악의 선율이 나에게 울림을 줄 때.
가슴에 사무치는 그림을 보며 마음이 벅차오를 때.
친구들과 만나 따듯한 추억을 공유하며 서로에게 편안함과 즐거움을 선사할 때.
열정 가득한 사람들을 만나며 미래를 그리고 영감을 받고 함께 꿈을 꿀 때.
요가나 PT선생님의 운동 철학이 나의 마음과 맞닿을 때.
아이와 함께 부둥켜안고 뒹굴뒹굴 살을 맞대고 구르며 장난을 칠 때.
정말 밥 할 기력이 없는 저녁 냉장고 가득한 엄마의 반찬을 보며 안도할 때.
모든 순간 나는 존재와 마음을 포갠다. 그리고 말 그대로 지극히 행복하다. 내가 공간을 내어주고 상대의 에너지가 나와 맞닿아 공명했기 때문이다.
물론 경계를 넘어갈 때도 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음악의 크기나 소리 주위의 소음 정도가 있는데 그 한계를 넘을 때, 그림이 너무 과한 자극을 줄 때, 친구들과 만나 따듯한 추억을 공유하지만 계속 우리가 그 과거에만 머물러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 열정 가득한 사람들과 미래를 꿈꾸지만 뭔가 지금 이 순간을 놓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요가나 PT 선생님이 알려준 동작이 내 몸에 좀 무리가 될 때, 아이와 뒹굴뒹굴 잘 노는데 갑자기 아이가 계속 더 놀아달라고 떼를 쓸 때, 냉장고에 먹을 게 넘쳐나고 잔뜩 있는데 또 엄마가 반찬을 한가득 전해줄 때. 나는 '내 경계선은 어디에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내 경계를 침범한 것이 아니라 넓어졌다 좁아졌다 하는 가변적인 나의 경계선 때문이라.
삶에서 내 경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잘 알기만 하면 행복한 순간을 더 많이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경계 안에 들어오는 것을 늘리고 경계 밖의 것을 좀 자제할 수 있는 능력을 쌓아나가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싶다.
재밌는 것은 분명해져 간다고 생각했던 그 색상도 경계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쓴 [월든]은 내가 대학생 때 처음 읽으면서 ‘이게 대체 무슨 책인가. 왜 이 책을 극찬하는 거지. 정말 읽히지가 않아.’ 하면서 읽다 덮었던 책이다. 그런데 같은 책이 십 년이 지난 요즘 깊이 빠져들 정도로 재밌고 아름답고 마음에 사무치는 책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나의 경계를 알아가는 것을 즐거워하면서도 안다고 너무 스스로를 단정 짓지 말자. 나란 사람은 평생을 알아도 잘 모를 수 있다. 소속과 경계의 줄다리기를 해나가듯 인생은 나라는 끊임없는 시소에서 이쪽저쪽을 오고 가며 균형을 찾아내는 과정의 반복이니깐.
이제 와서 가만 보니 내가 조화를 추구해서 부모님 말씀을 잘 들은 게 아닐 수 있겠다. 추위를 많이 타서 따듯하게 다녔고, 대학생 때는 소주 맛을 몰랐다. 별로 마시고 싶지 않아 세 잔 이상 안 마셨을 뿐이다. (물론 지금은 전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