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늘 끊임없이 돌아오는 이슈가 있다. 시간관리이다.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하는 나로서는 내 안의 열정을 다 채우려면 하루 24시간이 부족한 것 같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 것도 하고 싶다. 호기심과 궁금증이 가득하다. 배움에 대한 열정도 크다. 내 삶을 주도하고 주체적인 선택을 하며 나를 갈고닦는데서 기쁨을 느끼지만 그 열정이 종종 내 물리적인 한계를 벗어나는 경우가 잘 찾아온다.
새로운 것을 배우기 시작하면 기존의 것을 원하는 만큼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다는 느낌이 온다. 거기서 오는 불안감이 있다. 내가 과연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충분히 현재를 유지하며 배우고 있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면 자신 있게 “Yes”가 잘 나오지 않을 때가 찾아온다.
다양한 이벤트가 지속되는 삶이지만 나의 중심을 잡는 두 축이 있다.
바로 그 흔하디 흔한 것.
독서와 글쓰기다.
책에 빠져있게 된 지 몇 년 되었다. 정말 너무 좋아서 읽는다. 거의 대부분의 책들이 나의 눈을 뜨이게 한다. 책이 마치 한 사람 한 사람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저자의 이야기도 좋지만 저자라는 ‘사람’을 바라보게 된다.
글 보다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니 더 빠져들게 된 것 같다. 글 속에서 느껴지는 저자의 삶에 대한 태도나 글의 스타일이 보이고 그 뒤에 내용을 들으면 머릿속에 이야기가 쏙쏙 들어온다. 똑같은 이야기를 해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내가 갖는 느낌은 천차만별이다. 자신을 좀 더 드러내는 저자도 있고 정보 위주로 전해주는 저자도 있다. 각 책마다 발산하는 매력이 있다. 살아 숨 쉬는 영혼과 만나는 느낌이 든다.
책이 너무 좋아 이틀에 한두 권을 읽다 보니 내가 잘 소화는 하고 있나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간략하게라도 메모 정리를 놓지 않으려고 한다. 또 책을 읽고 한 가지는 꼭 삶에서 바로 실천하려고 한다. 행동력이 아주 우수한 나로서는 바로바로 실천하기 때문에 또 일상에서도 사소한 시도를 많이 하게 된다.
생각이 쌓이자 난생처음 글쓰기를 해야겠다 다짐했다. 실은 스스로의 의지로 다짐하지는 못했고 이 역시 저자의 영향이 컸다. 글쓰기는 뭐랄까 내 마음속 깊은 곳 ‘난 글쓰기를 못해’ ‘글쓰기는 어려워’라는 오래된 생각을 뚫어야만 가능한 영역이었다.
그런데 한 저자가 나의 마음을 흔들었다. ‘글을 쓰면 모호했던 것들이 명료해지고 생각이 정리된다.’ ‘글을 쓰면 자기 자신을 극복하게 된다.’ ‘글을 쓰면 나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글을 쓰면 외롭지 않다.’ 등의 메시지가 어느 날 우연히 나와 공명했다.
생각의 정리정돈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나 자신을 갈고닦는데만 집중한던 2-3여 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나를 극복하고 넘어서고 싶기도 했다. 타인에게 보이는 글쓰기는 하지 않았지만 자아탐구의 시간 동안 혼자 계속 끄적였다. 내 생각과 느낌을 적어 나열하고 이 생각이 과연 맞을까? 물끄러미 지켜봤던 날들이 떠오른다.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스님의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를 읽고 나서는 나의 생각들을 더더욱 의심했다. 그러기에 글은 탁월했다. 내가 나를 좀 더 쉽게 지켜볼 수 있으니 말이다. 혼자만의 글을 통해 나를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하던 중 블로그나 브런치에서 보이는 글쓰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책과 글은 나와 만나는 시간이다. 2-3년간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았다. 좀 상대적이긴 하나 워낙 사람을 좋아했고 자주 만났던 내 기준으로서는 과거 인연들과 많은 단절이 있었다. 한 달에 약속을 2-3회 이내로 가졌던 것 같다. 책과 함께하는 혼자만의 시간이 너무 소중하고 충만했다. 게다가 글을 쓰기 시작하니 나와 마주하는 시간이 더욱 기다려진다. 외로움을 느낄 틈이 없다.
독서와 글쓰기는 삶의 저변에 깔고 가는 리추얼 같은 것이 되는 중이다. 굵직해 보이는 이 두 행위가 자리 잡히기 위해 시간과 자원과 에너지가 더 많이 필요했다. 체력도 필요하여 운동도 한다. 독서, 글쓰기, 운동 등의 ‘긴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것’에 투자하기 위해 다른 시간 동안 내가 해야 할 일을 어떻게 하면 최대한 더 잘하고 단시간에 하고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을지 주기적으로 계속 점검해야 하는 시간이 찾아온다. 시간관리다.
좋은 육아를 하는 엄마이고 싶기에 그에 상응하는 할 일도 무수히 많다. 남편에게 힘이 되어주는 아내이고 싶기에 남편의 생활의 리듬에 맞춰 일상을 조율한다. 심장 뛰는 천직을 찾아 열정을 불태우고 싶어 조금씩 일도 시작하고 계속 나의 능력을 갈고닦는다. 이 외에도 좋은 딸, 며느리 동생 등 내가 맡은 많은 역할들을 잘 조율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그러다 보니 2-3개월마다 한 번씩 뭔가 '벅차다.' '시간관리가 필요하다.' '우선순위를 매겨야 해.'라는 생각과 함께 긴장감이 찾아온다. '나 이거 새로 배우고 싶은데 내가 지금 이거 할 때인가?' '아 뭔가 나의 두 중심 축인 독서와 글쓰기의 퀄리티가 떨어지는 것 같은데, 이게 맞나?' 질문들이 몰려온다.
그러다가 생각에 압도되면 '나도 벚꽃길에서 산책을 하고 싶은데 왜 내가 오르는 산은 바위산인 것 같지?' 혹은 '잔잔한 호수에서 노 저으며 단풍구경도 좀 하고 싶은데 왜 지금 나 급류가 몰아치는 계곡에서 래프팅 하는 것 같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바로 어제 이러한 마음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와의 온전한 대화 속에서 '나는 바위산이구나!' '나는 급류가 몰아치는 계곡이구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왜 나는 자꾸 시간이 없는 것 같아서 주기적으로 시간관리가 필요해 보이지?'의 초조함이 더 이상 초조함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아하! 이 시기가 또 나를 찾아왔구나.' '나를 조망할 시기가 되었구나!' 하면 그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재밌는 것은 내가 이 삶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90프로를 즐기다 보면 10프로의 벅참이 밀려온다. 나는 지금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것이다. 바위를 오르며 클라이밍을 하고 래프팅을 하며 기쁨을 만끽하던 중에 잠시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다.
이 생각을 하고 나니 마음이 너무 편안해졌다.
아 시간관리 이슈가 내게 주기적으로 찾아왔던 이유가 있었구나. 사람을 만나지는 않았지만 내가 지금 세차게 흐르는 계곡 물살에 있었구나. 그리고 그 삶을 너무 좋아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시간관리를 더 철저하게 한다의 문제 상황에서 한 걸음 물러나 나의 상황을 좀 더 초연하게 받아들이게 된 이 순간의 깨달음이 나에게 에너지를 주고 시간과 체력을 벌어준 느낌이 들었다. 물론 시간 조정은 조금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삶의 두 중심축인 독서와 글쓰기가 자리 잡히는 중이니 중심이 단단히 서고 있는 느낌이 든다. 중심이 잘 잡힐수록 산에 오를 힘도 물살을 잘 탈 수 있는 힘도 생기는 게 아닌가 싶다.
벚꽃 산책 길이, 단풍이 가득한 호수가 아쉽지 않다. 그저 바위산과 계곡 뒤에 언젠가 나타나겠지 생각하니 묵묵히 내가 택한 길만 즐기면 될 것. 지금의 내 길이 아닌 곳에 마음을 두었구나 싶다.
오늘도 장비 제대로 차고, 구명조끼 단단히 조이고 하루를 시작해 본다.
자 이제 다시 시작해 볼까나.